취향을 넘어선 안목, 질 비달
수동 기어부터 자율주행 방식까지, 지금 디자인 신에서 가장 격렬한 변화를 맞이하는 분야는 자동차가 아닐까. 격변하는 환경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디자이너, 질 비달Gilles Vidal 르노 디자인 부사장을 르노 성수에서 만났다.
산업 디자인의 꽃이라 불리는 자동차는 안전 규제는 물론 국가 간 정서 차, 무역 상황까지 고려하며 디자인해야 하는 제품이다. 오늘날 모빌리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성의 절제 혹은 새로운 도전을 강요받는다. 그래서인지 BMW의 크리스 뱅글, 재규어 랜드로버의 이언 칼럼처럼 소속 브랜드의 스타일을 정립한 디렉터의 이름을 듣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이 격변하는 환경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는 한 명을 꼽는다면 단연 질 비달이다. 르노가 자동차 기업에서 벗어난 전동화 브랜드로서의 비전을 제시한 지금, 질 비달이 그리는 자동차 디자인의 미래가 궁금해 지난 4월 르노 성수에서 그와 대화를 나눴다.
푸조에 이어 르노에서 다시 한번 변화를 앞두고 있다. 디자이너 질 비달의 역할은 어떻게 바뀔까
오늘날 디자인은 좀 더 진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자체가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변해가기 때문이다. 푸조에서 일하던 20년 전만 해도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설계가 확정되면 콘셉트를 다양한 차에 적용해보던 시대였다. 지금은 다르다. 신차 출시 직전까지 콘셉트가 계속해서 바뀐다. 나 역시 미디어 시승 때 소개했던 차에 디테일을 추가한 뒤 출시해 기자에게 아직 다 못 봤다고 연락한 적도 있으니까.(웃음) 푸조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PSA 그룹 내 브랜드가 합병되면서 내부적으로 변화를 가속화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덕이다. 이런 흐름은 현재 르노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소비자들이 새로운 것을 더 빨리 찾는다. 르노 CEO는 차량 개발 기간을 3년에서 2년까지 단축하자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트위스트를 가미한 디자인이다. 언뜻 평범한 듯해도 가까이에서 보면 디테일이 세심하다. 그룹 내에는 35개 국적의 디자이너가 일하고 있다. 브라질의 ‘르노 디자인 센터 라탐(RDCL)’과 한국의 ‘르노 디자인 센터 서울(RDCS)’도 이끌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한국 디자이너들이 디테일에 우수한 것 같다. 세심하면서도 어떤 실행이 필요한 단계에서는 정말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진행한다.
디자이너로서 수많은 과도기를 거치고 있다. 한 대의 차 안에 아날로그부터 디지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기술이 적용된다. 둘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혀가고 있나?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균형감을 구현하는 감각이 필수적이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물리적 버튼을 만들고, 때로는 버추얼 경험 요소를 적용하는 이유다. ‘매일을 함께하는 차(Voiture á Vivre)’를 표방하는 르노의 지향점 역시 이런 맥락과 맞닿아 있다. 자동차 실내의 공간감이나 광량, 햇빛이 들어오는 각도가 중요한 것처럼, 사용자가 소중하게 대접받는다는 느낌은 전기차뿐 아니라 일반 내연기관 차에도 중요해질 것이다. 차 안에서 이뤄질 수 있는 많은 것을 첨단 기술로 서로 연결해 소비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해야 한다. 자동차에서 ‘심플’이란 단순하게 만든다는 뜻을 넘어 소비자가 다가가기 쉬운 차라는 의미도 있다.
특히 전기차가 트렌드가 되면서 실내 디자인에 대한 기대치가 훨씬 높아진 듯하다.
여기서 디자이너가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다양한 첨단 기기를 사용하되 정보가 범람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피지컬과 디지털을 합친 ‘피지털’이라고 할까? 소재 사용도 마찬가지다. 균형감을 잃지 않으면서 차별화된 경험과 감성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차를 만드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비자도 차 안에서 다양한 것을 조합하며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세닉 E-테크를 경험하면 내가 말한 것의 핵심을 알게 될 것이다.
자동차 디자인은 충돌 안정성은 물론 공기역학이 어우러진 효율성도 신경 써야 한다. 자율 주행에 쓰이는 라이다 기능처럼 차 외부에 카메라 센서를 부착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 어떻게 극복하나?
1970년대 디자이너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웃음) 별다른 기술을 탑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원하는 대로 그렸을 것 같다. 공기역학은 늘 중요했다. 스포츠카가 등장했을 때도 그랬고, 에너지 소비량과 직결된 전기차 시대에는 더욱 중요해졌다. 보행자 충돌 안전 기술도 디자이너들에게 도전 과제이자 임무가 되었다. 예컨대 중국의 어떤 차는 주변 물체와 환경을 감지하는 라이다가 지붕 위에 장착돼 있다. 그러면 센서를 차 앞에 탑재한 다른 국가의 모델과 비교했을 때 끝 단의 디자인이 달라진다. 어차피 규제는 불가피하고 디자이너는 최고의 디자인으로 최고의 경험을 선사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이런 기술을 어떻게 변모시킬 수 있을지 연구하는 단계에 있다. 다양한 기술을 어떻게 연출하고 안정화하며 소위 미장센을 만들 것인지 고심 중인 단계랄까. 무엇보다 이러한 요소를 브랜드 자산이자 디자인 에셋으로 만들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확실한 것은 20~30년 후 자동차 디자인은 전혀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10년 전 인터뷰에서 “좋은 자동차 디자인은 자동차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나온다”라고 말했다. 이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다. 항상 우리의 사고를 리셋할 필요가 있다. 차를 디자인할 땐 다른 자동차나 관련 레퍼런스 이미지로 머리가 가득 차는데, 이를 비워야 진정한 혁신이 이뤄진다. 의도적으로 기존의 디자인과 방식에서 벗어나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장을 내밀 용기가 생긴다. 물론 그것이 늘 좋은 해법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나는 모든 패션 스타일에 열려 있는 사람이다. 어제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스니커즈에 후드 티셔츠, 재킷을 입었다. ‘슈퍼 스트리트웨어 플러스’랄까? 요즘 세상이 그런 것 같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을 매치해야 한다. 물병 하나를 만들더라도 취향을 넘어선 사회적 트렌드가 무엇인지 꿰뚫어보는 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