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이 된 목욕탕, 갤러리 필리아 〈Human After All〉전
서울 금호동에서 만나는 한국 컬렉터블 디자인 6팀
국제 디자인 갤러리 필리아가 4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옛 목욕탕에서 전시장으로 변모한 공간에서 한국 디자인 6팀과 함께 인간과 기계 사이의 디자인을 묻는 전시 〈Human After All〉 을 열었다.

AI가 이미지를 그려내고 알고리즘이 최적의 형태를 제안하는 시대, 디자인에서 ‘인간의 몫’은 어디까지일까. 디지털 도구가 생산의 문법을 바꾸고 있지만, 결과물에 깃든 디자이너의 미세한 선택까지 대체할 순 없다. 환원 불가능한 인간적 차원을 들여다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제 현대 디자인 갤러리 필리아(Galerie Philia)가 2022년 이후 4년 만에 서울에서 새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글로벌 협업 플랫폼 메종 나비(MAISON NAVIE)와 함께 〈Human After All〉 전시를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FICT Studio(장혜경), 황형신, 이시산, 윤새롬, 스튜디오 차차(차신실), 공민선(미드서머) 등 한국 디자인 6팀이 참여한다. 서울을 시작으로 선전과 도쿄로 이어지는 아시아 3부작의 첫 장이기도 하다.

전시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어디인가”를 묻는다. 단순히 특정 기술의 사용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다. 오늘날 많은 디자이너가 3D 모델링이나 알고리즘 같은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지만, 그 과정에는 언제나 디자이너의 의도와 감수성, 선택의 흔적이 남는다. 전시명 〈Human After All〉은 바로 그 지점을 가리킨다. 인간의 정교한 설계와 기계의 정밀함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오늘날 디자인이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는지 탐구하는 전시다.

2015년 설립된 갤러리 필리아는 조각적 디자인을 건축적 맥락과 대화시키는 큐레이션으로 알려져 있다. 르 코르뷔지에의 시테 라디외즈, 오스카 니마이어의 니테로이 현대미술관 등 역사적 건축물에서 전시를 선보여왔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션은 공동 설립자이자 아트 디렉터인 이가엘 아탈리(Ygaël Attali)가 맡았다. 한국 로컬 파트너로 참여한 메종 나비가 공간 발굴과 현장 운영, 한국 내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다.
메종 나비는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 대신 금호 알베르 건물을 필리아 측에 제안했다. 금호 알베르는 1980년대 대중목욕탕에서 교회로, 다시 전시장으로 변모한 공간이다. 지하에서 옥상까지 이어지는 수직 구조와 거친 콘크리트, 자연광이 어우러져 공간 특유의 분위기를 만든다. 한국 디자이너들의 미학적 언어와 공명하는 이 공간에서 전시는 단순한 오브제의 나열이 아닌 하나의 공간적 서사로 펼쳐진다.
지하에서 옥상까지, 여섯 개의 장면

가구와 오브제, 조명, 꽃까지 범주를 넘나드는 6팀의 참여 작가로 구성됐다. 새로운 세대의 한국 창작자들이 장르 사이를 유연하게 오간다는 점이 이번 구성의 출발점이었다. 디자인을 하나의 닫힌 분야로 제시하기보다, 다양한 매체와 접근 방식이 교차하는 장을 만들겠다는 의도다. 건물의 수직 구조는 곧 전시의 동선이 된다.
관람객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입구에서는 공민선(미드서머)이 꽃으로 전시의 첫 장면을 연다. 금속, 돌, 나무 같은 영속적 재료가 주를 이루는 전시에서 살아 있고 덧없는 매체는 의도된 대비다. 대부분의 작품이 재료의 영속성을 탐구하는 반면, 공민선 작가의 작업은 취약함과 시간성을 도입한다.


지하에서는 이시산이 돌과 금속 등 무겁고 구축적인 재료를 선보이며 공간의 중력감을 끌어올린다. 자연과 도시에서 수집한 재료의 본질을 형태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중간층에서는 FICT Studio(장혜경)가 전통 공예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재료 사이의 전환을 만들고, 황형신의 대형 조명 설치물이 여러 층에 걸쳐 시야에 들어오며 건물 전체를 하나의 서사로 연결한다. 도시 환경과 기억의 층위를 폴리프로필렌, 스틸, 폐콘크리트로 재구성하는 황형신의 작업 역시 건물의 거친 콘크리트와 공명한다.


상층부로 올라가면 윤새롬의 색채 조각과 스튜디오 차차의 유리, 레진 작업이 빛을 포착하며 공간을 가볍게 연다. 윤새롬은 구름, 수면, 파도 같은 자연의 색채와 질감을 조각적 가구로 번역한다. 스튜디오 차차는 유리와 금속, 레진을 예상치 못한 구성으로 재해석하며 기능성과 시적 존재감 사이의 균형을 모색한다. 지하의 물질적 무게에서 출발해 위로 갈수록 밝고 실험적인 영역으로 이동하는 흐름이다.



장인정신과 디지털 프로세스 사이에서 오늘날 디자이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 서울에서 시작된 이 질문은 선전과 도쿄로 이어지며 각기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서 다시 탐색된다. 이가엘 아탈리는 “서울은 2022년에도 강렬한 도시였지만 그 사이 한국 디자인은 더 대담해졌다”며 “이번 전시는 한국 디자이너들이 물질과 기술, 전통과 미래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언어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15일까지.
〈Human After All〉
기간 2026년 3월 5일-15일
주소 서울 성동구 금호로3길 14
운영 시간 12:00-20:00
주최 Galerie Philia
협업 MAISON NAVIE
참여 작가 장혜경(FICT Studio), 황형신, 이시산, 윤새롬, 스튜디오 차차(차신실), 공민선(미드서머)
웹사이트 홈페이지,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