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열린 페이퍼 아트 전시

종이로 만든 우주, 〈Paper Universe: The Book as Art〉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책’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전시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다.

도서관에서 열린 페이퍼 아트 전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책’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전시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이하 SLNSW,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에서 열리고 있다. ‘책’이란 단순히 글자를 읽는 매체가 아니라, 예술가의 시각과 손길을 통해 작품 자체로 재탄생한 예술적 객체임을 보여주는 전시, 〈Paper Universe: The Book as Art〉.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한 편의 예술 작품과 같은 다양한 책을 SLNSW의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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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a Axford, Neighbourhood 2022ㅣ출처: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약 100점에 가까운 희귀한 아티스트 북(artist’s book)이 모여 있는 이번 전시는 책의 역사와 형식, 의미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채로운지를 증명하듯 작은 크기부터 최대 40미터에 달하는 대형 작품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아티스트 북은 단지 책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책 자체가 예술적 표현의 매체로 기능하는 형식이다. 전통적인 종이책이 텍스트와 정보 전달을 주목적으로 한다면, 이 전시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종이, 바인딩, 접합, 레이아웃, 재료의 선택과 응용까지 모든 요소가 예술가의 의도 아래 작동하는 예술 작품이다. 이들은 때로는 조각과도 같고, 설치 예술처럼 공간과 상호작용을 하며, 때로는 펼쳐질 때만 비로소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형식으로 관객을 놀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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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ny Evans, Proof 2015ㅣ출처: Art Guide Australia

전시 작품의 크기와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의 작품이 있는가 하면, 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40미터 길이의 콘서티나(concertina: 종이를 지그재그로 접어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책 형태로 접힌 상태는 작고 휴대가 편하며 펼치면 길게 이어지는 구조가 특징) 형태로 펼쳐지는 대형 작품까지 존재한다. 책이 하나의 객체로서 지니는 물리적 가능성의 한계를 실험적으로 드러내는 이러한 시도는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책과 함께 움직이고 손으로 접고 펼치며 상호작용을 하는 행위 자체가 예술적 체험임을 강조한다. 전통적인 서적의 범주에서 벗어나 텍스트와 이미지, 디자인과 구조가 복합적으로 결합한 예술적 성취를 보여 준다.

또한 전시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시대와 국적을 넘어 폭넓은 범위를 아우른다. 예를 들어 미국의 사진작가 에드 루샤(Ed Ruscha)의 ‘Every Building on the Sunset Strip(1966)’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유명한 거리를 사진으로 기록한 콘서티나 형식의 작품으로 40년이 넘는 시간 전에 이미 거리의 풍경을 연속적인 이미지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스트리트 뷰 기술을 연상케 한다. 한편, 주디 왓슨(Judy Watson)과 빌 핸슨(Bill Henson)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주 예술가들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어 책이라는 매체가 회화나 사진과 같은 전통적 예술 장르와 결합할 때 어떤 시각적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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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nna Hitti, Towla 2017ㅣ출처: www.deannahitti.com

이 외에도 눈여겨볼 만한 독특한 작품들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더한다. 멜버른 기반의 아티스트 테오 스트레서(Theo Strasser)의 작품 ‘In Ecstasy’는 강렬한 색채와 추상적 화면을 통해 예술적 영감의 순간과 과정에 대한 명상을 펼친다. 장중한 색의 겹침은 그림으로서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책이라는 매체의 각 페이지가 어떻게 감정과 사유의 연속을 형성하는지를 보여 준다. 레바논계 오스트레일리아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는 디애나 히티(Deanna Hitti)의 ‘Towla’는 고대 보드게임을 재해석하여 부모와의 기억과 언어적·문화적 연결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이 작품은 책 상자를 열면 보드게임이 되는데 게임의 지침이 영어와 아랍어로 나란히 배치된 형태로 문화 간 소통과 정체성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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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ril Makula, A World View 2020ㅣ출처: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또한 에이브릴 마쿨라(Avril Makula)의 ‘A World View’는 폐기된 지도책을 활용해 접고 펼쳐지는 콘서티나 형태로 구성된 작품으로 우리가 상상하거나 갈망했던 장소와의 관계, 그리고 이동과 기억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탐색한다. 작품이 천천히 펼쳐지고 접힐 때마다 숨겨진 단어와 이미지가 드러나며 책을 정보의 저장소가 아닌 뜻밖의 감정과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장치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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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ia Haby and Louise Jennison, Salvaged Relatives 2014-2015ㅣ출처:gracialouise.com

멜버른에서 활동하는 여성 듀오 그레이시아 헤이비(Gracia Haby)와 루이스 제니슨(Louise Jennison)이 공동으로 작업한 ‘Salvaged Relatives’는 19세기 후반의 오래된 사진에서 영감받아 콜라주, 색채, 연필 드로잉을 통해 무명의 인물을 재탄생시키는 작품이다. 이들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넘나들며 책과 이미지를 통해 기록되지 않은 역사와 기억을 다시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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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e Hayes, Flow 2022ㅣ출처: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종이의 강도와 섬세함, 투명성과 불투명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니콜 헤이즈(Nicole Hayes)의 작품 ‘Flow’는 자연광 아래에서 1년 동안 약 14만 개의 바늘구멍을 뚫어 만든 작품이다. 이 작은 구멍들은 연속적인 형태로 자연의 거대한 구조를 연상시키며 책의 물질성과 시각적 리듬을 동시에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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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ren Bryant, Fold. Volume 2 2020ㅣ출처: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이처럼 〈Paper Universe: The Book as Art〉는 우리가 책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전시다. 페이지를 넘기는 익숙한 행위는 이번 전시에서는 새로운 감각의 출발점이 된다. 관객은 책을 읽는 대신 펼치고, 접고, 들여다보고, 때로는 공간 속에서 마주하며 텍스트와 이미지, 재료와 구조가 만들어내는 긴장과 조화를 경험하게 된다. 책은 더 이상 정보 전달이나 유희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작가의 사유와 감각이 응축된 하나의 조형 언어로 기능한다. 아티스트 북이라는 형식은 이야기와 물성을 동시에 다루며 읽는 행위와 보는 행위를 교차시키는 독특한 장을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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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Universe: The Book as Art,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이번 전시는 책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하는 창의적 실험을 통해 종이라는 매체가 지닌 확장성과 가능성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책’의 개념은 조용히 해체되고 다시 새로운 형태로 조립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책이 어떻게 예술가의 사유를 담는 구조물이자 감각을 환기하는 오브제로 변모하는지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될 것이다.

〈Paper Universe: The Book as Art〉
기간
2025년 8월 12일 – 2026년 5월 3일
주소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도서관
웹사이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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