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선물하는 문구점, 서촌 스물트론스텔레

종이를 고르고 엮는 페이퍼 바

서촌 골목 깊숙이, 주거지처럼 보이는 수수한 건물 안에 비밀스러운 문구점이 들어섰다. 디자인 문구 브랜드 썸무드 디자인의 첫 번째 오프라인 공간, 스물트론스텔레다.

기록을 선물하는 문구점, 서촌 스물트론스텔레

서촌 골목 깊숙이, 주거지처럼 보이는 수수한 건물 안에 비밀스러운 문구점이 들어섰다. 어딘가 이질적인 금속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는 달라진다. 낮게 깔린 조명과 낯선 색감의 가구, 묵직한 알루미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종이들. 디자인 문구 브랜드 썸무드 디자인(SMD)의 첫 번째 오프라인 공간, 스물트론스텔레(Smultronställ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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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구점, 스물트론스텔레 © 사진 최용준ㅣ출처 스물트론스텔레

스웨덴어로 ‘야생딸기밭’을 뜻하는 이 단어는 평온과 안식을 주는 소중한 장소, ‘나만 아는 행복한 아지트’를 의미한다. 이름처럼 사적인 경험을 제안하는 스물트론스텔레. 이곳에서 종이를 직접 고르고 시필하며 기록의 도구를 발견할 수 있다. 취향이 세밀해지는 시대, 관심을 관점으로 키워가는 문구점의 이야기를 들었다.


Interview

김설 스물트론스텔레 대표·디자이너

디자인 문구 회사에서 6년간 디자이너로 일하며 제품 기획부터 제작까지 전반을 익혔다. 이후 독립해 디자인 문구 브랜드 썸무드 디자인(SMD)을 창업, 드로잉 브랜드 프로우(PROW)까지 두 브랜드를 운영해왔다. 브랜드 초창기부터 품어온 오프라인 쇼룸의 꿈을 8년 만에 서촌에서 실현했다.

서촌에서 찾은 문구인의 아지트

온라인 기반의 문구 브랜드 썸무드 디자인의 첫 쇼룸이에요. 오프라인 공간을 열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브랜드를 시작할 때 책상 앞 벽에 ‘5년 차에 오프라인 쇼룸 열기’라고 적어두었어요. 5년 차에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 열망은 계속 남아 있었죠. 플리마켓이나 팝업에 나갈 때마다 손님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해 주는 경험이 참 좋았거든요. 임시 공간에서 나눈 순간들이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것도 늘 아쉬웠고요.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곳에서 그 경험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죠. 그러다 작년 여름쯤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작년부터 다이어리 제품이 연달아 좋은 반응을 얻었고, 고객 반응과 브랜드 인지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었거든요. 오프라인 공간이 생기면 더 좋은 시너지가 날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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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매끈한 금속 문(Solid Door)은 외부의 번잡함을 끊어내고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경계로 설계했다. © 사진 최용준ㅣ출처 스물트론스텔레
스물트론스텔레는 서촌 끝자락에 자리하죠. 이곳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 분위기가 브랜드의 결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발품을 팔다 우연히 이 자리를 소개받았는데요. 처음에는 외관만 보고 시큰둥했죠. 하지만 직접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확신이 들었어요. 원래 화실로 쓰던 곳이라 바닥의 물감 자국이나 벽의 낙서 같은 흔적이 가득했거든요. 정돈되지 않은 듯하지만 시간이 쌓여 있는 느낌이 좋더라고요. 이곳에 우리 제품이 놓인 장면이 단번에 그려졌어요. 계약서를 쓰면서 8년 전 벽에 붙여둔 꿈이 생각나 무척 벅찼던 기억이 나요. 마음 깊이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결국 그 길로 가게 되는구나 생각했죠.

처음 기획한 공간을 시공 직전에 전면 백지화하셨다고요. 어떤 이유였나요?

시공 업체와 미팅까지 마치고 내부적으로 거의 확정된 상태였어요. 그런데 막상 보니 우리가 원했던 경험의 공간이 아니라 제품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되어 있더라고요. 어디가 아쉬운지는 알겠는데 저희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죠. 그러던 중 양나윤 공간 디자이너님을 만났어요. 첫 미팅에서 제가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감각을 디자이너님도 똑같이 느끼고, 같은 언어로 표현해 주시더라고요. 비용이 더 들더라도 이분과 함께해야겠다는 확신이 바로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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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길이 닿을수록 에이징되는 알루미늄 테이블과 원목 시필 테이블이 나란히 놓인다. © 사진 최용준ㅣ출처 스물트론스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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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금속, 목재. 시간이 흐르며 깊어지는 재료들. 그 변화는 공간의 결함이 아니라 함께 쌓여가는 시간의 일부로 자리한다. © 사진 최용준ㅣ출처 스물트론스텔레
설계팀과 처음 논의했던 공간의 방향성은 무엇이었나요?

종이가 에이징되는 것처럼 시간이 쌓이는 공간이길 바랐어요. 가볍고 연약한 종이가 오래 머물기 위해서는 그 변화를 단단하게 받쳐줄 무거운 재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오래된 건물의 느낌을 살리되 너무 낡아 보이지 않도록 디자이너님이 균형을 잡아주셨어요.

곳곳에 다양한 소재가 사용된 것이 인상적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구성을 생각하셨나요?

처음엔 어두운 원목 위주로 생각했어요. 에이징 느낌도 좋고 카페 분위기도 좋아하거든요. 디자이너님이 에이징 소재만 가득하면 그냥 노쇠한 공간이 될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알루미늄이나 유리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소재들을 같이 넣게 됐어요. 알루미늄 테이블은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들어간 거예요. 바닥 타일도 일본에서 가져온 건데, 빛에 따라 초록빛도 검은빛도 나서 공간 전체를 잡아줘요. 한국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느낌을 찾아주신 거죠.

방문객의 시선과 동선도 세심하게 계획하셨다고요.

이 공간에서 어떤 장면이 먼저 보이느냐가 중요한 기준이었어요. 입구로 들어오면 잠시 어둡다가 정면의 ‘종이 바’가 조명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도록 설계했죠. 문을 열었을 때 시선이 먼저 향하는 왼쪽 조명을 밝혀 제품을 먼저 보게 하고, 이후 자연스럽게 종이 바 쪽으로 빨려 들어가듯 이동하는 동선을 생각했어요. 시필 존도 처음엔 따로 분리된 방에 넣으려 했지만, 공간이 트이면서 종이 바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바꿨고요. 간판도 자그맣게 숨겼어요.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아지트 같은 곳이길 바랐거든요. (웃음)

종이와 함께 쌓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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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자형 원목 선반에 가지런히 쌓인 세계 각지의 종이들. 미색부터 백색까지, 두께와 질감이 저마다 다른 종이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사진 최용준ㅣ출처 스물트론스텔레
전 세계 다양한 종이를 직접 고르고 경험하는 ‘페이퍼 바’ 기획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다이어리를 만들면서 수많은 종이 테스트를 거쳤어요. 만년필에만 특화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다양한 필기구에 다 대응되면서도 사각거리는 느낌이 있고, 만년필과도 잘 맞는 종이를 계속 찾았어요. 저희 기준으로 테스트한 종이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경험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보통 필기구에 따라 종이를 고르잖아요. 사실 같은 펜도 종이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그걸 직접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 싶어서, 오셨을 때 어떤 필기구를 주로 쓰시는지 먼저 여쭤보고 거기에 맞는 종이를 추천드리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실제로 방문객 반응은 어떤가요?

“종이를 이렇게 집중해서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어요. 집에 잘 쓰지 않던 펜들이 있잖아요. 종이만 바꿔도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매끄러운 종이에 어울리는 펜이 있고, 까슬한 종이에 어울리는 펜이 따로 있으니까요. 이 공간을 문구인의 ‘놀이터’라고 생각하며 기획했는데, 실제로 방문객들이 그렇게 즐겨주시는 모습을 볼 때 정말 재미있습니다. (웃음)

오픈과 함께 진행한 문구 전시도 인상적이었어요. 문구 큐레이션 기준이 궁금합니다.

『문구뮤지엄』과 『문구는옳다』를 쓰신 정윤희 작가님과 함께했어요. 문구 분야에서 백과사전 같은 책을 쓰신 분이 국내에 많지 않거든요. 다른 매장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제품과 서로 겹치지 않는 포지션을 기준으로 채웠어요. 성경 책처럼 얇은 종이부터 미색이 아름다운 종이까지,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제품들을 소개했죠. 어릴 때부터 흔히 보던 빅볼펜 같은 제품도 알고 보면 오랜 역사와 장점이 있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함께 소개하고 있어요. 노란 종이에 적힌 코멘트는 작가님이 직접 쓰신 글이에요.

브랜드를 설명할 때 ‘기록을 선물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시더라고요. 대표님에게 문구와 기록은 어떤 의미인가요?

작은 영역 안에 담긴 디자인을 좋아해요. 손에 쥘 수 있는 물건 가운데 가장 예쁘고 다양한 게 문구였죠. 어릴 때부터 하굣길에 동네 문방구를 매일 들렀어요. 고등학교 때 친구가 지나가듯 “너 이런 일 하면 되겠다”고 말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제가 문구를 좋아한다는 걸 인지했어요. 기록도 마찬가지예요. 디지털로도 많이 하지만 종이에 직접 쓰는 건 조금 달라요. 꾹꾹 눌러 쓰는 과정에서 생각이 더 깊어지고, 그 시간이 몸으로 전달되면서 기억도 오래 남거든요.

그 철학이 브랜딩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거군요.

썸무드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제품을 사는 사람이 선물받는 기분을 느끼길 바랐어요. 주문서를 자필로 써서 보내고, 브랜드 향을 개발해 택배에 뿌려 보내고, 포장지도 정성스럽게 접어 보내고요. 회사가 커지더라도 고객 이름을 직접 써드리는 이 방식만큼은 끝까지 지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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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선반과 원목 테이블 위에 다이어리, 노트, 문구 관련 서적이 놓여 있다. © 사진 최용준ㅣ출처 스물트론스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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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무드 디자인 제품과 함께 페어링할 수 있는 필기구들로 큐레이션 됐다. 입문자부터 깊이 파고드는 문구 애호가까지 모두를 위한 셀렉션. © 사진 최용준ㅣ출처 스물트론스텔레
앞으로 이 공간에서 계획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요?

예약제로 진행하는 프로그램 ‘종이와의 시간’을 준비 중이에요. 영업시간 외에 소수 인원을 모시고 새로 들어온 종이들을 깊이 있게 소개하는 자리예요. 로스터리 카페에서 원두를 고르듯 저희가 고른 종이를 편지 봉투에 담아 정기적으로 보내드리는 ‘종이 구독 서비스’도 구상 중이고요.

스물트론스텔레가 어떤 공간으로 남길 바라나요?

동네 오래된 문방구 같은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뒤적거리다 보면 새로운 걸 발견하고, 그게 재밌어서 또 오게 되는 곳이요. 언제 와도 한결같은 그 시절 문방구처럼요. 일단은 오래 살아남는 게 먼저지만요. (웃음)

스물트론스텔레
주소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7길 8, 1층
운영 시간 13:00-19:00 (화-목), 9:00-20:00 (금-일)
설계 스튜디오 양나윤
시공 CNTD, 스튜디오 양나윤
사진 최용준
웹사이트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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