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만나는 이탈리아 디자인의 거장, 미켈레 데 루키

미켈레 데 루키가 말하는 디자인의 본질

전위적 디자인 그룹 멤피스의 핵심 멤버이자, 아르떼미데의 톨로메오 램프를 디자인한 미켈레 데 루키. 2026 이탈리아 디자인의 날 앰버서더로 선정된 그가 서울을 찾았다.

서울에서 만나는 이탈리아 디자인의 거장, 미켈레 데 루키

“가장 위대한 영감은 서로 다른 문화적, 기술적, 과학적, 예술적 입장들이 낯설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결합될 때 탄생한다.”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미켈레 데 루키(Michele De Lucchi)의 말이다. 멤피스의 파격적 가구에서 출발해 건축, 조명, 드로잉, 장인과의 수공예 협업까지. 반세기 가까이 전혀 다른 영역을 넘나든 그의 궤적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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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떼미데 톨로메오를 디자인한 미켈레 데 루키(Michele De Lucchi)

이탈리아 디자인의 가치를 소개하는 연례 행사 ‘이탈리아 디자인의 날(Italian Design Day)’이 서울에서 열렸다. 2026년 디자인 앰버서더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자인 거장 미켈레 데 루키. 현대 조명 디자인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아르떼미데(Artemide)의 톨로메오(Tolomeo) 램프를 설계한 인물이다. 방한을 맞아 서울 곳곳에서 다양한 활동을 선보인다.


건축가의 방

두손갤러리 전시 〈The Room I’m In: 내가 머무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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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미켈레 데 루키, 건축 Architettura, 종이에 템페라, 42×29 cm, 2025 (오) 미켈레 데 루키, 건축 Architettura, 종이에 혼합 매체, 25×35 cm, 2025 © 두손갤러리

3월 11일 두손갤러리에서 열린 〈The Room I’m In: 내가 머무는 방〉은 데 루키의 한국 첫 개인전이다. 회화, 조각, 에칭,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건축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는 그의 작업 세계를 조망한다. 전시 제목에 포함된 ‘방(room)’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작가가 실제로 머무는 장소이면서 인식과 호기심, 작업에 대한 감각이 형성되는 정신적 영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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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레 데 루키, Mostro 괴물, 천배접 종이에 비닐 페인트, 100×140 cm, 2025 © 두손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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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레 데 루키, Mostro 괴물, 천배접 종이에 비닐 페인트, 100×140 cm, 2025 © 두손갤러리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2025년 신작 대형 캔버스 회화 연작이 놓인다. ‘괴물(Monsters)’ 연작은 동물적 특징을 지닌 건축 형상을 그린 작업이다. 초록과 노랑이 강하게 대비되는 화면 위에 코끼리를 닮은 거대한 붉은 건축물이 서 있고, 그 옆에는 나무처럼 솟은 녹색 기둥이 다리를 받치고 있다. 데 루키는 건축에도 유머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건축적 괴물’이라는 이미지를 제안한다. 환경을 해치는 현실의 괴물 같은 건물들에 대한 비판이자, 건축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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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레 데 루키, 네트워크 건축 Architettura di rete, 종이에 혼합 매체, 25×35 cm, 2025 © 두손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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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미켈레 데 루키, 네트워크 건축 Architettura di rete, 종이에 혼합 매체, 29.7×21 cm, 2025 (오) 미켈레 데 루키, 네트워크 건축 Architettura di rete, 종이에 혼합 매체, 21×29.7 cm, 2025 © 두손갤러리

‘네트워크 건축(Network Architecture)’은 종이 위에 혼합매체로 그린 소품 연작이다. 격자무늬가 촘촘하게 쌓인 건축 형상이 녹색 배경 위로 솟아 있고, 그 곁에는 어김없이 작은 인물 실루엣이 서 있다. 설계도면도 아니고 완성된 건물의 재현도 아닌, 건축이 되기 이전의 상상이 종이 위에 머무는 형태다. 손끝에서 시작된 드로잉이 어떻게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의 씨앗이 되는지, 전시는 그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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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om I’m In: 내가 머무는 방〉 전시 전경 © 두손갤러리

디자인의 본질을 말하다

더쇼룸 토크올로지(Talk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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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roduzione Privata 홈페이지

12일 서울 신사동 더 쇼룸에서는 토크 프로그램 ‘토크올로지(Talkology)’가 열렸다. 데 루키는 연사로 참여해 건축과 디자인의 본질을 인간과 연결의 관점에서 풀어냈다. 건축가는 단순히 벽을 세우는 기술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긍정적인 경험을 설계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공간은 기능을 넘어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만들어내는 장이라는 설명이다.

그의 창작을 관통하는 태도는 두 단어로 정리된다. 용기와 호기심.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두려움을 통과해야만 새로운 시도에 다가갈 수 있다고 했다. 걷는 행위를 예로 들었다.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몸은 균형을 잃고, 다음 발이 닿아야 다시 균형이 잡힌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결국 불균형을 감수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젊은 시절 하나의 분야를 선택하지 못했던 경험 역시 같은 맥락이다. 건축, 제품 디자인, 조각, 글쓰기 사이를 오가던 시간은 결국 서로를 보완하며 하나의 작업 방식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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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태도는 작업의 결과를 대하는 방식에도 드러난다. 그는 대표작인 톨로메오의 성공 이유를 여전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의도를 가지고 만든 작업은 오히려 잘 되지 않았고,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작업이 더 오래 남았다는 것이다. AI와 디지털 도구의 시대에 대한 질문에도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전기가 멈추면 모든 기술은 작동을 멈추지만, 손은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는 것. 그는 A4 용지를 잘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이동 중에도 계속 그림을 그린다. 일과 삶의 경계에 대해서는 삶의 이유나 보람을 뜻하는 일본어 ‘이키가이(生き甲斐)’를 언급했다.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삶. 중요한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그 감각을 스스로 발견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토크와 함께 더쇼룸에서는 국내 최초로 데 루키의 실험적 디자인 프로젝트 Produzione Privata의 오브제가 전시됐다. 1990년 설립된 이 프로젝트는 대량 생산의 논리 바깥에서 장인과의 협업을 통해 소량 제작되는 오브제를 선보여왔다. 이번에 소개된 제품 중 비손테(Bisonte) 스툴은 들소 뿔을 닮은 형태의 나무 스툴로, 겹쳐 놓으면 하나의 동물 형상이 완성된다. 본뉘(Bonne Nuit) 조명은 고블릿 형태의 유리 안에 빛을 담고 돔형 뚜껑으로 덮는 구조로, 뚜껑을 들어올리는 순간 숨겨진 빛이 드러난다.


About 미켈레 데 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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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미켈레 데 루키(Michele De Lucchi)

1951년 이탈리아 페라라 출생.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자인 거장으로, 1980년대 전위적 디자인 그룹 알키미아와 멤피스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아르떼미데를 위해 설계한 조명 톨로메오로 1987년 콤파소 도로(Compasso d’Oro)를 수상했다. 1988년부터 2002년까지 올리베티 디자인 총괄을 맡아 기업 디자인 전략을 이끌었다. 2022년에는 콤파소 도로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이탈리아와 유럽의 주요 기업을 위해 가구 및 제품을 디자인했다. 문화, 업무, 산업, 주거 분야에 걸쳐 전 세계에서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현재 건축·디자인 스튜디오 AMDL CIRCLE을 이끌고 있으며, 최근에는 드로잉과 회화를 통해 건축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The Room I’m In: 내가 머무는 방>
기간 2026년 3월 11일 – 4월 30일
주소 두손갤러리 (서울 동대문구 고미술로21 답십리 고미술상가 2동 B1층 75호)
운영 시간 10:30 – 18:30 (일 휴무)
웹사이트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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