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마우로 포르치니 CDO

형태와 기능은 의미를 따른다

마우로 포르치니는 삼성전자의 새로운 디자인 방향성을 제시했다.

삼성전자 마우로 포르치니 C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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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 부문 최고디자인책임자(이하 CDO). 이탈리아 밀라노 공과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공부했다. 필립스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3M과 펩시코를 거쳐 2025년 4월 삼성전자 CDO로 취임해 현재 전 사업 영역의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다. 20여 년간 활동하며 2300개 이상의 디자인 & 혁신상을 받은 그는 2012년 디자이너로서 유일하게 〈포춘〉지의 ‘40세 이하 리더 40인’에 선정된 바 있다. design.samsung.com

1년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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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디자인의 인스타그램. 삼성전자 디자인의 새로운 기조인 ‘인간 중심’과 ‘익스프레시브 디자인’을 시각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 @design.samsung
삼성전자에 합류한 지 꼭 1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 최초의 외국인 디자인 총괄로 큰 화제가 되기도 했죠.

처음 삼성전자로부터 연락받은 게 2024년 여름쯤이었습니다. 감회가 새롭더군요. 제가 밀라노 공과대학교 재학 시절에 쓴 논문 주제가 웨어러블 기술이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이상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삼성 같은 회사가 컨슈머 일렉트로닉스 영역에서 그 비전을 실현하고 있죠. 저는 기술을 다루는 제품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전 직장인 펩시코에서 CDO로 13년간 근무하면서 브랜딩을 체득했고요. 돌이켜보니 지나온 시간이 결국 이 자리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디자인과 기술, 브랜딩 영역에서 쌓은 경험을 응축해 발현할 기회를 찾은 듯해요.

조직에 합류하고 느낀 회사의 첫인상도 궁금하군요.

지금까지 몰랐던 혁신적인 기술들이 이곳에서 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 혁신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입니다. 회사 안에선 비즈니스 담당자, 엔지니어, 디자이너가 기술을 기반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입니다. 저는 이것을 최대한 이해하고 빠르게 흡수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내외 1500명의 소속 디자이너와 사업 파트너, 개발자들이 함께 꿈을 현실화해 나간, 흥분되는 한 해였습니다.

지난해 12월에 개편한 삼성 디자인의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을 흥미롭게 보았어요. 스스로 거대한 미디어처럼 작동한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제품, 패키지, 시각물, 리테일… 이 모든 것이 결국 커뮤니케이션이죠. 오늘날 소비자들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 경험과 스토리텔링을 구매합니다. 웹사이트 개편에 앞서 정립한 것은 ‘이 팀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었어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디자이너는 이를 위해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필요를 찾아요.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브랜드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죠. 웹사이트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삼성전자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솔루션을 고안했는지, 그리고 어떤 철학을 가졌는지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기술과 디자인 언어의 혁신을 일구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하는지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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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디자인의 웹사이트.

익스프레시브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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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럭시 S26울트라. S25 대비 AI 기능이 대폭 향상됐다. 세계 최초로 ‘프라이버시 디스플레이’를 탑재해 사용자의 개인정보 보호까지 고려한 이 제품은 지난 3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 2026에서 최고 전시 제품상을 수상했다.
취임 후 삼성전자의 새로운 디자인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익스프레시브 디자인expressive design이라고 부릅니다.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기조를 유지하되 좀 더 사람들의 다양성을 반영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죠.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모두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차를 탑니다. 제 거실과 당신의 거실은 분명 다르겠죠. 그런데 왜 유독 가전제품만큼은 획일적일까요? 저는 바우하우스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명제에 따라 미니멀리즘과 근본주의에 기반한 디자인이 범람한 것이죠. 그런데 이제 디자인은 여기서 한발 더 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익스프레시브 디자인의 명제는 ‘형태와 기능은 의미를 따른다’입니다. 앞으로 삼성전자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맞춘 TV를 출시할 것입니다. 그 첫 시작이 바로 130형 마이크로 RGB와 더불어 CES에서 공개한 S95H입니다. 베젤리스 화면 주변으로 과감하게 프레임을 적용해 마치 화면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올레드 TV죠.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는 다양한 소재와 컬러 중 선택할 수 있는 선행 콘셉트를 선보여 우리가 추구하는 익스프레시브 디자인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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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95H. 마치 화면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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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CES에서 선보인 130형 마이크로 RGB TV. 삼성전자 고유의 ‘타임리스 디자인’을 적용했다.
‘형태와 기능은 의미를 따른다’는 말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이 떠오르네요. CDO님이 이탈리아 출신이기에 나올 수 있었던 의제가 아닐까요?(웃음)

에토레 소트사스를 비롯한 멤피스가 기능주의에 반기를 들고 감성, 색상, 형태를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익스프레시브 디자인은 삼성전자의 예전 모델에서도 발견됩니다. 저는 2000년대 중반쯤 삼성전자에서 출시한 보르도TV와 스피커를 구매했습니다. 삼성전자가 한창 가전업계의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하던 시기였죠. 그때 아름다운 디자인에 매료된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구매한 지 20년이 다 되어 사용하진 않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겠더군요.(웃음) 그만큼 매력적인 디자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삼성전자의 뿌리에는 이미 익스프레시브 디자인이 있었습니다. 올해 iF 디자인 어워드에 선정된 77개 작품 중 골드를 수상한 뮤직 스튜디오 스피커도 바로 여기에 집중한 디자인입니다. 기능주의를 넘어 감성을 터치한 디자인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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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iF 디자인 어워드 골드를 수상한 ‘지속 가능한 가전 소모품 선행 콘셉트’. 가전제품을 만들고 남은 폐기물을 정교하게 재가공해 가전 소모품 소재로 사용하고, 소모품 후처리 방식별로 다른 색상을 적용해 인지하기 쉽게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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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디자인 어워드 위너 수상작인 ‘인피니트 AI 콤보’.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로 고급스러움과 내구성을 강화하고, 가벼운 터치만으로 열리는 ‘히든 도어’ 기능을 적용해 편의성을 더한 프리미엄 올인원 세탁 건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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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셜 사이니지. 3D 전용 안경 없이도 3D 공간감을 구현한 혁신적인 디스플레이다. 올해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위너로 선정됐다.
실제로 여러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인간 중심’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더군요. 그렇다면 디자이너가 인간 중심의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지난해 제가 집필한 〈혁신의 인간적 면모: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힘(The Human Side of Innovation: The Power of People in Love with People)〉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이 있을 때 무언가를 탐독하고, 관찰하고, 다른 이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죠. 그런 사람들의 머릿속은 퇴근 후에도 쉬질 않아요. 관찰과 사유가 생활화되어 있죠. 두 번째는 공감입니다. ‘공감’을 뜻하는 ‘empathy’에서 ‘pathy’는 파토스pathos*에서 유래했습니다. 접두어를 붙이면 ‘(타인에게) 영혼을 넣는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공감 능력을 갖춘 이가 진정한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지금 내가 디자인하는 제품을 내 주변 사람들이 사용한다고 상상할 때 그들에게 가치를 선사하는 디자인을 하게 된다는 뜻이죠.

* 열정, 고통, 내적 감정 등을 뜻한다. 넓은 의미에서 영혼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소비자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동료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동일할 것 같군요.

맞습니다. 디자인은 원맨쇼가 아닙니다. 다양한 전문가들이 협업하며 가치를 빚어냅니다. 그만큼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는 과정이 중요하죠.

Design is an act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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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일 삼성전자의 디자인 전시 〈Design is an Act of Love〉의 키 비주얼.
앞서 짧게 언급한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 전시 이야기를 더 나눠보죠. 삼성전자 CDO로서 치르는 첫 밀라노 디자인 위크인 만큼 더욱 각별히 공을 들였을 텐데요.

이번 전시는 삼성전자의 철학을 발신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할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익스프레시브 디자인과 ‘Design is an act of love’, 즉 디자인은 사랑의 표현이라는 화두를 선언처럼 드러낼 예정입니다. 또 한 가지, 이번 전시는 일종의 오픈 랩으로 기능할 것입니다.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선행 디자인 콘셉트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올해 전시에선 혁신적인 기술들이 집약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CDO님과 삼성전자에 매우 중요한 테마인 것 같군요.(웃음)

규모에 상관없이 오늘날 기업과 디자인 커뮤니티는 인류를 사랑하고 돌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이게 궁극적으로 디자이너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봐요. 사업을 키우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집중하는 비즈니스맨과의 본질적 차이기도 하죠.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고, 꿈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AI가 삶에 들어오면서 인류는 다시 한번 엄청난 기회를 맞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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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is an Act of Love〉전의 공간 렌더링.
재미있네요. 다른 한편에선 AI 기술로 인한 인간의 획일화를 우려하는데 방금 그 말은 오히려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다양성을 확보해줄 것이라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오늘날 AI를 둘러싼 서로 다른 생각은 무척 심오한 철학적 관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누구나 각기 다른 배경과 서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류하고 대화하며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죠. AI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과 관점을 살필 수 있도록 해주죠. 물론 여기서도 호기심과 공감, 온전한 지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게 없다면 차별화된 생각을 할 수 없어요. AI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힘을 증폭시키는 것은 EI(Emotional Intelligence, 감성 지능)와 HI(Human Imagination, 인간의 상상력)입니다. 저는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회사는 사람을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판단하고 디렉팅하는 주체가 없다면 경쟁력을 상실할 테니 말이죠.

지난 3월 23일 디자인하우스 모이소 갤러리에서 열린 ‘이탈리아 디자인의 날’ 마스터 클래스에서도 AI 시대에 창작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에 대해 역설했습니다.

학창 시절 배운 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은 제 디자인에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필요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데 명료한 지표가 되어주죠. 우리는 기본적으로 같은 욕구가 있어요. 결국 사람의 필요를 충족해주는 것이 회사의 경쟁력을 만들고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줍니다. 저는 지금까지 거친 모든 회사에 이 이론을 접목했습니다. 삼성전자에 합류해 처음 한 일 중 하나도 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이 회사가 가진 제품 포트폴리오 및 기술과 매칭하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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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디자인의 날 마스터클래스에서 강연 중인 마우로 포르치니. 사진 김한이 기자
재해석의 결과가 궁금하군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Live Longer’입니다. 매슬로의 욕구 중 1단계 생리적 욕구, 2단계 안전 욕구와 관련이 있죠. 오늘날의 기술은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돌보고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더 오래, 안전하게,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해주죠. 두 번째는 ‘Live Better’입니다. 요약하면 인간에게 시간을 되돌려주는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I나 로보틱스 기술을 통해 삶의 편의성과 업무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개인의 여가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가족, 친구 등 소중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 역시 늘어나는데 매슬로의 이론에서 3단계(사회적·애정 욕구)에 해당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Live Loud’입니다. 작게는 소셜 미디어, 크게는 자기 사업을 하는 데에서 상상력, 창의력, 자아 표현 능력을 향상해주는 기술이죠. 세상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이를 통해 인정받고자 하는 4단계 욕구와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Live On’은 AI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보존하고 디지털 레거시를 구축하는 것을 말합니다. 초월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기술을 통해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음식 맛이 그리울 때 그 레시피를 구현한다든지, 인생의 난관에 부딪혔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지혜를 구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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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CES에서 공개한 뮤직 스튜디오 5. 2015년 더 세리프로 협업한 에르완 부룰레크와 다시 한번 합을 맞췄다. 스피커 중앙의 오목한 점이 특징이다. 에르완 부룰레크는 “오디오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선함과 다양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순수함을 갖춘 디자인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디자인 에르완 부룰레크
이야기를 나눠보니 앞으로 삼성전자가 펼쳐나갈 디자인이 더욱 기대되는군요.

사실 가구, 조명, 패션 등 이미 다른 디자인 산업에서 익스프레시브 디자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산업 디자인에서도 변화가 일어날 시기이고, 여기에서 특별한 기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많은 이들이 AI가 열어갈 미래를 기대하면서도 두려움을 느끼기에 더더욱 이러한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삼성전자 같은 회사는 그 미래를 건강하게 열어가야 할 책임이 있죠.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4호(2026.04)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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