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용 이후의 디자인

다섯 개의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동시대 리사이클 디자인 전략

기후 위기와 자원 고갈이 가속되는 시대, 리사이클은 디자인과 건축의 기본 조건이 됐다. 오늘날의 리사이클 디자인은 단순히 폐기물을 재사용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재료 기술과 사회적 메시지, 순환 시스템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확장하고 있다.

재활용 이후의 디자인

기후 위기와 자원 고갈이 가속되는 시대, 리사이클은 디자인과 건축의 기본 조건이 됐다. 오늘날의 리사이클 디자인은 단순히 폐기물을 재사용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재료 기술과 사회적 메시지, 순환 시스템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확장하고 있다. 탄소를 저장하는 콘크리트 다리부터 폐기된 컵으로 만든 파빌리온까지, 다섯 개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동시대 리사이클 디자인의 흐름을 살펴보자.

탄소를 저장하는 건축 재료

Paebbl × Heijmans

1 1 1 1
© Paebbl, Heijmans

네덜란드 로스말런에 설치된 보행자 다리는 CO₂-중립 콘크리트(carbon-neutral concrete)를 사용한 최초의 다리다. 단순히 재활용 자재를 사용하는 수준을 넘어, 콘크리트 자체가 이산화탄소를 저장하도록 설계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페블(Paebbl)*이 개발한 탄소 저장 소재를 사용해 일반 시멘트의 일부를 대체하고, 광물화 과정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안정적인 광물 형태로 고정한다. 식물 폐기물로 만든 바이오차를 추가해 탄소 저장 효과를 높였다.

​*로테르담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탄소 저감·건설 소재 스타트업

1 2 2
© Paebbl, Heijmans

일반적으로 콘크리트는 건설 산업에서 가장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재료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이 프로젝트에서는 오히려 구조물이 탄소를 흡수하고 저장하는 시스템이 된다. 프로젝트는 재활용이 기후 기술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버려진 물건을 공간으로 바꾸는 건축

Wallmakers – Kulhad Pavilion

2 1 3
© Wallmakers, Studio IKSHA

인도 고아의 미라마르 해변에 세워진 쿨하드 파빌리온은 차를 마실 때 사용됐던 테라코타 컵을 건축 재료로 활용한 프로젝트다. 지역 공동체에서 수집한 약 1만8000개의 컵을 쌓아 세 개의 캐터너리 볼트 구조를 구축했다. 이 구조는 철근이나 프레임 없이 중력과 형태만으로 안정성을 확보하는 전통적인 조적 방식에 기반한다. 컵 사이의 틈은 빛과 공기를 통과시키며, 파빌리온 내부에는 자연스러운 그늘과 쉼의 공간을 형성한다. 프로젝트는 대량 생산된 일회용 물건이 건축 재료로 다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폐기물이 공공 공간의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2 2 1
© Wallmakers, Studio IKSHA

지역의 폐기물을 디자인 자원으로

Sungai Design – Ombak Chair

발리에서 제작된 옴박(Ombak) 라운지 체어는 강에서 수거한 비닐봉투 약 2000개로 만들어졌다. 프로젝트는 비영리 단체 선가이 워치(Sungai Watch)가 강과 바다로 흘러가는 플라스틱을 수거하는 활동에서 출발했다. 수거된 봉투는 세척과 분쇄 과정을 거쳐 열압착으로 단단한 판재로 만들어지고, CNC 절단을 통해 의자의 구조를 형성한다. 제작 과정에서는 재료 낭비를 최소화하도록 설계해 남는 조각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이 의자는 지역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온 재료를 디자인으로 전환한 사례다. 지역 폐기물을 지역 디자인 자원으로 전환하는 순환 모델을 보여준다.


재활용 소재의 미학

MVRDV – Bulgari Shanghai Façade

4 2 3 1
© bulgari

상하이 플라자66에 위치한 불가리 플래그십 매장 외관에 재활용 샴페인 병으로 만든 녹색 유리 패널이 사용됐다. 패널은 아르데코 스타일의 황동 프레임과 결합되어 옥과 같은 질감을 만들어낸다. 이 프로젝트에서 재활용 소재는 숨겨야 할 친환경 재료가 아닌, 건축의 시각적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핵심 요소다. 밤에는 후면 조명이 유리를 비추며 외관 전체가 은은하게 빛난다. 이는 재활용 소재가 기능적 대안이 아닌, 디자인의 미적 언어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해체와 재사용을 전제로 한 집

V8 Architects – Villa Residu

5 1 1
© V8 Architects, Loes van Duijvendijk

로테르담에 지어진 빌라 레지두(Villa Residu)는 재사용 자재를 중심으로 설계된 주택 프로젝트다. 강철 구조, 목재 바닥, 외장 패널, 창호 등 대부분의 자재를 이전 건물에서 회수된 재료로 구성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건물 자체가 미래의 재사용을 고려해 설계됐다는 것이다. 건축가는 자재 확보 상황에 맞춰 설계를 유연하게 수정했으며, 건물을 향후 해체가 가능하도록 계획했다. 이는 건축이 재료의 순환을 전제로 하는 시스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섯 개의 프로젝트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등장했지만 공통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드러낸다. 오늘날 리사이클 디자인이 재료 기술과 지역 자원, 건축 시스템, 문화적 메시지를 결합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탄소를 저장하는 콘크리트, 지역 폐기물을 건축 재료로 전환하는 실험, 해체와 재사용을 전제로 한 건축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리사이클은 더 이상 디자인의 주변적 실천을 넘어서는 설계 과정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같은 흐름은 또 다른 질문을 남긴다. 리사이클이 디자인의 새로운 미학이 되는 순간, 그것이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전략인지 아니면 지속가능성을 소비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지에 대한 논의가 늘 따라붙어야 한다는 점이다.

2 3 2
© Wallmakers, Studio IKSHA

재활용 소재가 기술과 시스템, 문화적 메시지로 확장되는 지금, 디자인이 단순히 폐기물을 새로운 형태로 바꾸는 데 그칠 것인지, 자원과 생산의 구조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인지는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재활용하느냐 보다, 어떤 방식으로 자원의 순환을 설계할 것인지가 방점이 돼야 할 것이다. 리사이클 디자인은 이제 우리가 재료와 생산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다시 묻고 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