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 디자인의 미래가 있다, 마레이에 보헬장

본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사피엔스’는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다’라는 뜻의 동사 ‘사페레sapere’에서 파생한 단어다. 이는 인간의 정체성이 먹는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는 동시에 이팅 디자인의 본질을 납득시킨다. 네덜란드 디자이너 마레이에 보헬장Marije Vogelzang은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이팅 디자이너eating designer’라고 명명한다.

음식에 디자인의 미래가 있다, 마레이에 보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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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레이에 보헬장 2004년 디자인 스튜디오 겸 레스토랑 ‘프뢰프Proef’를 열어 이팅 디자인과 관련한 급진적인 실험을 진행했다.
자신의 실험적 이팅 경험을 선보인 프뢰프는 2011년 문을 닫았지만 2014년 모교인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의 ‘푸드 논 푸드food non food’ 학과 주임 교수로 부임했다.
2016년에는 푸드 디자이너 네트워크 DIFD를 설립했다. marijevogelzang.nl

본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사피엔스’는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다’라는 뜻의 동사 ‘사페레sapere’에서 파생한 단어다. 이는 인간의 정체성이 먹는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는 동시에 이팅 디자인의 본질을 납득시킨다. 네덜란드 디자이너 마레이에 보헬장Marije Vogelzang은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이팅 디자이너eating designer’라고 명명한다. 현재 그녀를 빼놓고는 이 분야를 이야기하기 어렵다. 스타일링 외에는 음식과 디자인 사이에 별다른 연결 고리가 없던 2000년대 초반, 그녀는 먹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며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녀의 활약 이후 먹는 행위와 경험이 본격적으로 디자인 영역에 들어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2000년 자신의 졸업 전시에서 흰색 디스플레이와 의상, 오가닉 푸드로 연출한 ‘하얀 장례식 만찬’으로 단숨에 디자인계의 주목을 받은 보헬장은 20년 가까이 이팅 디자인의 가능성에 대해 설파 중이다. 그녀의 행보는 이제 이팅 디자인의 가능성을 공유하는, 보다 체계화된 커뮤니티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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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질 수 없는 벤토〉전. 도쿄 메트로폴리탄 아트 뮤지엄에서 선보인 전시다. 거대한 벤토 모양의 구조물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환경, 미래, 미생물, 인간관계 같은 개념을 표현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팅 디자인의 정의는? 푸드 디자인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

이팅 디자인이 푸드 디자인보다 광의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푸드 디자인은 문자 그대로 음식과 관련된 디자인이지만 이팅 디자인은 파종과 추수, 식문화, 먹거리 정치, 식사 예절, 음식을 둘러싼 다양한 풍경과 감각을 아우른다. 다시 말해 먹는 행위와 관련한 다양한 의식을 포함하는 것이다.

특히 유럽을 중심으로 이팅 디자인, 이팅 경험이 대두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음식처럼 중요한 주제가 지금껏 간과되어온 현상이 오히려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출처나 기원을 인지하지 않은 채 음식을 먹고, 식사 방식에 대해서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식량 고갈, 환경문제 등) 미래를 생각한다면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 즉 음식을 대하는 새로운 방법과 사고방식이 필요한데 디자이너들이 이러한 변화를 도울 수 있다. 이팅 디자인이 중요한 이유다.

이팅 디자인에 관해 특히 네덜란드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풍성한 식문화를 자랑하는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아닌 네덜란드라는 점이 의외였다.

네덜란드는 디자인 문화가 매우 고차원적이고 비평적인 데 반해 식문화 수준은 낮은 것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반된 두 요소가 맞물려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먹는 것에 대해 인색하다. 그들은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이 너무나 명확하고 관습과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오히려 식문화가 깊이 정착한 지역에서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척박한 자연환경을 사람의 힘으로 이겨냈고 지금의 농업 선진국, 디자인 강국을 이루게 된 데에는 근검절약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좀 더 일찍 음식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아니었을 수 있다. 오히려 음식을 수단 삼아 다른 이야기, 예컨대 기후변화나 생물의 다양성, 집단 치유, 사회 통합에서부터 음식물 쓰레기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화두로 던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이르렀던 것 같다.

*강은경 스몰바치 대표는 이에 대해 네덜란드에서 식재료는 매우 품질이 좋고 풍부하지만 미식과 음식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오랫동안 매일의 소박하고 단조로운 음식 문화를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더했다.

초기에 경험과 식습관에 집중하던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속 가능성과 음식 생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또한 이제는 이 분야에 존재하는 플레이어들을 연결해주고 싶다.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푸드 논 푸드’ 학과를 이끌고 있다.

‘푸드 논 푸드’는 학사과정으로 에이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의 8개 학과 중 하나다.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생체生體다. 학생들은 오브제나 제품을 만드는 대신 시나리오를 만들거나 경험을 설계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음식과 식재료가 자라는 토양, 박테리아나 식물 등을 다룬다.

‘프뢰프’라는 이름의 실험적인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도 했다. 특히 디자인 스튜디오와 F&B 인상적이었다.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실험을 했지만 수익 면에서 그리 안정적이지는 못했다. 매번 너무 많은 변화를 줬기 때문이다. 결국 레스토랑은 7만에 문을 닫았다.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레스토랑이라는 공간, 레스토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프레임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내게 캔버스로서의 레스토랑이 그다지 흥민로운 대상이 아니라는 점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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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트본’. 고기가 자라는 식물을 상상해서 만든 오브제 시리즈.
당신도 인정했듯이 지속 가능한 수익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팅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암울한 이야기 아닌가?

글쎄, 내가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생각했던 팝업 콘셉트는 당시 네덜란드에 존재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내가 너무 일찍 나간 것이다.(웃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많은 레스토랑이 조용히 바뀌기 시작했다. 산업 전반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으며 세계는 새로운 비전과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다. 소비자 역시 점점 더 비판적이고 깊이 탐구하며 열린 태도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음식과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에게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다. 관광, 오락, 장례 산업, 의료 사업, 건강, 농업, 풍경, 교육, 의식과 정서 발달, 미래 식량 개발 그리고 사회적 화합의 매개체로서 음식을 상상해보라.

당신의 철학과 색깔을 잘 보여주는 최신 프로젝트를 몇 가지만 소개해달라.

‘푸드 마사지 살롱’과 ‘먹을 수 있는 미래들Edible Futures’ 그리고 ‘시즈Seeds’가 있다. 세 작업 모두 오디오 내러티브를 활용했다. 예를 들어 미래의 음식에 관한 인터랙티브 전시인 〈먹을 수 있는 미래들>에서 관람객은 생산자 혹은 소비자를 선택하고 이에 따라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시즈’에서 관람객은 씨앗 하나를 삼키는데, 씨앗이 그에게 말을 건다는 설정에서 관람이 시작된다. 나는 음성을 활용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사과 하나를 먹더라도 이야기가 곁들여지면 사람들은 그것을 둘러싼 세계를 상상하고 사과의 향 또한 더 잘 맡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관점마저 변화시킨다. 상상력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길을 찾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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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체인지’. 일종의 수정란 교환 사무실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가상 계좌를 하나 열면 수정란 하나를 받는다.
20년 가까이 이팅 디자인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관점이나 사고 면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초기에 나는 주로 인간의 감각적 경험과 식습관에 집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속 가능성과 음식의 생산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됐다. 또 작품 속에서 사람의 심리적 측면을 발전시켜나갔다. 현재는 정신성, 우아함 그리고 미래 먹거리에 대한 상상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 다른 관심사는 교육이다. 나는 새로운 세대의 이팅 디자이너를 가르치는 데 전념하고 싶다. 최근 교육을 위한 온라인 코스를 개설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코스는 케이터러, 셰프, 영양사, 디자이너, 마케터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참여 구성원 또한 호주, 파키스탄, 알래스카, 콜롬비아 등 출신이 다양하다. 먹는 행위를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때 더욱 새로운 크리에이티브가 나올 수 있다.

2016년 설립한 ‘Dutch institute of Food & Design’(이하 DIFD)은 전 세계 푸드 디자인을 잇는 기관이다.

나는 무엇보다 푸드 & 디자인 분야의 훌륭한 프로젝트를 보여줄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음식과 관련된 일을 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을 독려하고 푸드 디자인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플랫폼 말이다. 아직 이 분야에 대한 비평이 약하다는 점 또한 DFID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푸드 & 디자인이 이 세계를 더 나은 수준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이뤄낼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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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 프로젝트. 석영 제조 브랜드 시저스톤Caesarstone과 협업해 캐나다 토론토의 인테리어 박람회 IDS 기간 동안 선보였다. 관람객은 내레이터가 된 씨앗의 안내에 따라 음식을 둘러싼 다양한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DFID를 통해 앞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나?

앞서 말했듯이 새로운 식경험에 대한 니즈는 세계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나 울타리 밖에서는 이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분야에 존재하는 플레이어들을 연결해 푸드 & 디자인 산업의 잠재력과 영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DFID는 이를 위한 단단한 네트워크의 초석이다. 이미 전 세계에 포진한 20명 이상의 통신원들이 DFID에 좋은 프로젝트를 제보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미래 음식 디자인 어워드’를 시작했고 순회전도 갖는다. 이를 통해 식경험을 함께 고민하는 단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01호(2020.03)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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