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F 2026 영 디자이너 멘토 ① 권순만 일광전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전구 산업이 쇠퇴하던 시기, 60년 된 전구 회사를 조명 브랜드로 탈바꿈시키는 데 기여한 디자이너가 있다. 디자인 컨설팅 스튜디오 제로식스포 대표이자 일광전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권순만이다. 제품과 그래픽, 브랜드 전략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디자인 접근으로 일광전구의 리브랜딩을 이끌었고, 대표 제품 ‘스노우맨’ 시리즈를 통해 브랜드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다. 2018년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에 참여했던 그가 올해 멘토로 돌아왔다.

SDF 2026 영 디자이너 멘토 ① 권순만 일광전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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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컨설팅 스튜디오 제로식스포 대표이자 일광전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경영 악화로 위기를 겪던 중소기업 일광전구에 합류해 리브랜딩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전구 생산보다 조명 사업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수차례의 설득 끝에 조명 브랜드 ILKW를 론칭했다. ILKW의 베스트셀러인 스노우맨의 라인업을 탄생시켰다. 제로식스포와 일광전구를 오가며 독자적인 브랜딩 철학을 정립 중이다. zerosixfour.com
2014년 독립 후 제로식스포를 설립했다. 당시 디자이너로서 어떤 고민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나?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4년여간 근무했다. 당시 회사 대표가 굉장히 능력 있고 스타일도 명확했는데, 나는 에지 있고 강한 스타일보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디자인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제품이 실제 판매로 이어질 때, 사람들이 기꺼이 선택하는 디자인을 할 때 큰 보람을 느꼈다. 전공은 산업 디자인이지만 독립 후에는 브랜드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싶었다. 브랜드에 뜻이 있었으니 제품뿐 아니라 그래픽, 패키지, 양산 과정, 협력 업체와의 조율까지 회사에서 최대한 많이 경험하려고 했다. 퇴사 전에는 일부러 업무 범위를 넓혀 패키지도 해보고 생산 관련 조율도 담당하면서 실무 감각을 익혔다. 그렇게 2년간 준비하다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무렵에 독립했다.

디자인 컨설팅 스튜디오로 첫발을 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광전구 브랜드 팀장으로 합류했다.

독립 초기에는 컨설팅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다만 처음부터 좋은 브랜드를 만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일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추구하는 방향이 명확해졌다. 당시 국내 시장에서는 젊은 브랜드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고 있었고, 2세 경영인들이 기존 사업을 새롭게 풀어가는 흐름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일시적으로 눈길을 끄는 데에만 집중했다. 좀 더 오래가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일광전구를 클라이언트로 만났다. 처음에는 전구 패키지 디자인 의뢰로 시작했지만, 일광전구에 대해 알아갈수록 매력적인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리브랜딩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해외 사례를 많이 봤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패키지 작업을 하면서 브랜드 리뉴얼과 향후 방향에 대한 제안을 했다. 실제로 패키지 디자인보다 제안서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웃음) 작은 수정 작업부터 명함, 현수막, 각종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으로 일이 점차 확장됐고, 어느 순간 디자인 팀장을 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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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15 포터블은 일광전구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품고 있는 첫 번째 무선 조명이다. 납작한 눈사람의 모습과 닮은 150mm의 쉐이드는 풍선을 불듯 플라스틱 레진을 부풀려 연결 부위 없이 한 피스로 만들어 그림자 간섭 없는 자연스러운 빛을 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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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 스노우맨 8 포터블. 제품 상단의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의 유리구는 수작업 블로잉 방식으로 제작했다. 스틸 소재를 섬세하게 가공한 후 유리구와 연결하며 묵직한 소재감이 안정감 있는 구조를 구현했다.
일광전구를 글로벌 조명 브랜드로 도약시키기까지 역할이 컸다고 알고 있다.

초창기에는 제품 디자인보다 브랜딩 비중이 훨씬 컸다. 당시 일광전구는 전구 사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흔들리던 시기였다. 백열전구 중심의 시장이 LED로 급격히 바뀌었고, 브랜드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실제 판매는 LED 제품으로 이뤄지는 상황이었기에 회사 차원에서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다. 전환점은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직전에 찾아왔다. 3세 경영진이 합류하면서 사업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브랜딩 작업이 중심이었다면 이후에는 제품 개발에 훨씬 더 집중하게 됐다. 기존 전구 사업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조명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대표적인 제품이 ‘스노우맨’이다. 이 제품이 코로나19 시기와 맞물리면서 빠르게 반응을 얻었다.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카테고리를 확장하고 제품력을 계속 개선했다. 이와 함께 브랜드 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처음에는 팔로워도 거의 없고 판매 채널도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브랜드가 됐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위기를 이야기한다. 이 회사는 늘 위기 속에서 성장해온 기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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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패키지는 일반적으로 유리나 금속 등 깨지기 쉽고 스크래치에 취약한 상품을 보호하는 기능적 측면에 집중하는 반면, 일광전구는 과감한 패턴 그래픽을 사용하고 불필요한 문구와 로고를 덜어내 패키지 자체의 조형성과 완성도를 강조했다.
일광전구를 비롯해 다양한 브랜드와 작업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나?

제품과 그래픽, 브랜드 전략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한다. 그렇게 접근했을 때 결과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클라이언트가 빠른 결과를 원한다. 브랜드를 바꾸는 일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일광전구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특별한 사례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브랜드를 만들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일광전구가 더 성장하길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사례가 있어야 다른 기업들도 영향을 받고, 디자이너들에게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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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전구의 베스트셀러이자 시그너처 조명 제품인 스노우맨 22 .360도로 골고루 빛을 퍼트리는 매끄러운 유리구와 이를 단단하게 받치는 금속 소켓을 눈사람처럼 단순화한 형태로 디자인했다.
브랜드를 오래 지속시키는 디자인의 조건은 무엇일까?

디자인만 따로 떼어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일본 출장을 자주 가면서 느낀 건, 오래된 기업이나 노포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 디자인이 세련되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인의 태도와 운영 방식, 공간과 시간의 흔적 등 여러 요소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브랜드의 힘이 만들어진다. 디자인은 그 안에서 브랜드를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도구에 가깝다. 그래서 좋은 디자인은 기업이 오래갈 수 있는 구조와 조건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

디자인을 시작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필요한 역량은 무엇이라고 보나?

무엇보다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겉보기에 멋있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어렵고 경쟁도 치열한 분야다. 그래서 학생이든 회사원 출신이든 너무 빨리 자기 것을 하겠다고 뛰어들기보다, 이 일이 결국 사업과도 연결된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했으면 좋겠다. 디자인과 사업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몸담은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표가 어떤 판단을 하는지, 실무가 어떤 구조로 굴러가는지 충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하나는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다. 20대 초·중반에만 아이디어가 많은 건 아니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쌓이면서 만나는 사람도 많아지고, 여행도 더 하게 되고, 레퍼런스도 더 넓어진다. 그런 축적이 오히려 더 좋은 디자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해외 디자이너들을 봐도 대부분 오랜 시간을 거쳐 자기 세계를 만든 사람들이다. 빨리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길게 보고 꾸준히 가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올해 영 디자이너 멘토로 참여하는 데 대한 소감은?

영광스럽다. 예전에 학교를 다닐 때와 졸업 후 다시 학교를 방문했을 때 느낀 감정이 전혀 다르듯, 영 디자이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참여자였던 프로그램에 멘토로 돌아온다는 사실 자체가 울컥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당시의 불안감을 너무 잘 안다. 학생이든 초기 사업가이든 회사원이든 모두 불안하다. 나 역시 영 디자이너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사업 5년 차 때 똑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 멘토링에서는 그 불안감을 조금 낮춰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형식적인 이야기나 듣기 좋은 말보다는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한편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는지도 궁금하다. 나도 어느새 기성세대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배우고 흡수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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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밀라노 살로네 델 모빌레의 조명 박람회 유로루체Euroluce에서 총 14개 제품으로 구성된 스노우맨 시리즈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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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서울리빙디자인 페어에서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키워드로 스노우맨8 포터블, 도킹 스테이션(Docking Station), FROG V2 펜던트 등 8가지 신제품 시리즈를 선보였다.
현재 계획하는 일이나 목표가 있다면?

가장 큰 목표는 일광전구를 글로벌 브랜드로 안정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올해 6월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쓰리데이즈오브디자인에 참여한다. 이에 맞춰 브랜드의 제품 디자인 스타일도 조금씩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본격적으로 조명을 다룬 지난 5년간은 스노우맨을 중심으로 안정감 있는 형태와 한국 시장에 잘 맞는 전략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좀 더 강한 방향으로 스타일을 전환하는 과정에 있다. 제품 라인업과 전략도 그에 맞게 다시 세팅하고 있다. 현재는 일광전구가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지만, 제로식스포도 조금 더 알려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는 보다 글로벌한 프로젝트를 해보는 것이 목표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4호(2026.04)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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