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 브레이커 선배의 가장 현실적인 솔루션, 박시영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스튜디오 빛나는의 박시영 대표는 디자인 비전공자이자 비수도권 출신으로 20여 년간 고군분투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왔다.

룰 브레이커 선배의 가장 현실적인 솔루션, 박시영

학교가 스승과 제자로만 이뤄져 있다는 건 단선적인 사고다. 학교란 그 자체가 거대한 공동체이자 커뮤니티이기 때문이다. 초기 대학의 원형으로 알려진 볼로냐 대학교가 지금의 협동조합과 유사한 모델이었다는 것이 증거다. 그런데 이 네트워크에 속하지 않은 디자이너라면 어떨까?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스튜디오 빛나는의 박시영 대표는 디자인 비전공자이자 비수도권 출신으로 20여 년간 고군분투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왔다. 그는 그동안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예전의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청년들을 돕기 위한 솔루션을 고민 중이다. 직설적이지만 현실적인 선배의 ‘찐 조언’ 속에 미래 세대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어려 있다.

촬영할 장소로 전통 시장을 추천한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는 엔터테인먼트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필수다. 그러자면 소비자가 무엇에 즐거워하는지 알아야 한다. 또 영화 포스터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창작자로서 온라인 소통 방식에 매몰되어서는 곤란하다. 지나치게 편협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친구들과 일부러 전통 시장에서 약속을 잡고 다른 사람들이 쓰는 단어와 어조, 분위기 등을 살펴본다. 어르신들이 얼마 전까지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욕하다가 이제는 현 대통령을 욕하더라.(웃음) 이처럼 디자인에 앞서 대중을 파악하는 것이 내겐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일부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건축가가 설계할 때 땅 형태와 특성을 철저히 파악하는 것처럼, 내 작업을 볼 대상이 지금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는지 조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도 말이다. 솔직히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전라남도 고흥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한다고 들었다. 구미에서 상경한 지 30여 년 만에 서울을 벗어난 셈인데.

18세에 처음 서울로 올라왔는데, 비전공자에다 가난하기까지 한 탓에 갖은 고생을 하며 말 그대로 밑바닥에서 시작해 업계의 정점까지 도달했다. 성공한 뒤로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경험했다. 패션쇼에 초청받거나 유명 클럽에 VIP로 초대받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순간 속된 말로 ‘현타’가 왔다. 이 모든 것이 진정 내가 원했던 것인지 회의감이 든 것이다. 서울의 소비 중심적인 문화에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모든 것에 진절머리가 나 서울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따뜻한 해안가에 정착하고 싶어 여러 지역을 돌아보다 2년 전 고흥을 선택했다. 홀로 이주했고 직원들과는 원격으로 소통하고 있다.

박시영 대표가 대중의 트렌드를 읽는 곳은 전통 시장이다. 서울의 대표 전통 시장 중 동묘 벼룩시장에서 촬영했다.
디자인 비전공자로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다.

업계에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은 누구나 힘들기 마련이지만 전공자들은 네트워킹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업계에 먼저 진출한 선배들과 교수들이 도와줄 수 있지 않나. 하지만 비전공자는 인맥이 없으니 프로젝트 수주 과정과 방식 자체를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다. 나도 처음에는 클라이언트를 어디서 만나야 하고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1년 정도 고립감과 비관에 빠져 살다 보니 작품 퀄리티에도 영향을 미치더라.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여러 영화제에 무작정 찾아가 포스터 없이 영화를 출품한 감독들에게 포스터를 제작해주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그렇게 독립 영화 포스터로 포트폴리오를 쌓았다. 특히 촉망받는 젊은 감독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독립 영화 포스터 작업을 10개 정도 하고 나니 상업 영화 제작사에서도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설립 이후 디자이너 대신 다년간 영화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기획자를 채용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디자인밖에 없으니, 업계 사람들을 많이 아는 직원에게 클라이언트와의 소통을 일임하면서 영업에서도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자기 객관화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였던 것 같다.

냉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현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한계를 인정하면 자연스레 이를 보충할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특수성을 잘 활용해야 한다. 요즘 AI가 인간의 이럴 때일수록 대중은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 ‘휴먼 터치’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니 디자인 스킬은 기본적으로 갖춘 상태에서 독창적인 관점과 스토리를 개발해야 한다. 앞으로 디자이너는 자신을 쇼잉하고 세일즈하는 일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소셜 미디어에 자신의 약점과 개성을 어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처럼 소비한 것을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라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 생산자로서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나의 조건이 남들과 다르다면 해야 할 일도, 방향성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스튜디오 빛나는의 차별화 전략은 무엇이었나?

기존 룰에 갇히지 않는 것. 영화계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규칙, 디자인에 쓰이는 논리까지 모두 의도적으로 지키지 않았다. 당시 주 7일 근무가 일상이던 현실에도 의문을 던졌다. 그래서 주 7일로 일할 것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를 노동부에 신고한 적도 있었다. 덕분에 1년 정도 일이 뚝 끊기기도 했지만.(웃음) 하지만 그런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한 이들이 우리의 충성 고객이 되었다. 업계에 통용되던 룰을 따르지 않았고, 부당하다고 판단하면 이의를 제기하고 공격적으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나의 성격과 개성에 잘 맞는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대중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스튜디오 빛나는만의 경쟁력을 만들었다. 타깃층 분석을 통한 마케팅 전략 컨설팅을 진행한 것이 타 스튜디오와의 차별점이 되었다.

함께 일한 디자이너 중 비전공자의 비율은 얼마나 되나?

비전공자가 65%, 전공자가 35% 정도 된다. 국문과, 건축과, 영화·연기 전공, 도시 재생 전공자도 있었다. 채용할 때 디자인 테크닉이나 툴 숙련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배운 스킬은 현업에서 활용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것이라 어차피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한다. 영화 포스터 디자인 작업이 워낙 다양한 툴을 활용하면서도 수작업으로 드로잉하거나 사진을 촬영하는 등 할 일이 많기도 하고. 그래서 지원자가 제출하는 포트폴리오와 에세이를 통해 개성과 관점을 집중적으로 살핀다. 관점은 곧 디자이너가 가야 할 길이다. 길만 잘 정해져 있다면 기술을 익히는 것은 쉽다. 하지만 관점을 개발하는 것은 회사에서 돕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포트폴리오에 디자인 작업물 없이 오직 사진만 실은 지원자를 채용한 적도 있었다. 독특한 구도에서 그만의 관점과 개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업자 등록을 마치고 처음 진행한 프로젝트인 〈짝패〉 포스터.
포스터 디자인 스튜디오 ‘스테디’, ‘다이버스’와 독특한 협업 관계를 유지해왔다.

사실 심플하다. 4년 전쯤 두 스튜디오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둘 다 실력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모인 곳이었다. 포스터 디자인업계 자체가 폐쇄적이고 일이 힘들다 보니 새로운 스튜디오가 등장하는 일이 드물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신인 디자이너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당시 둘 다 독립 영화 포스터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경험 상 독립 영화로 시작해 상업 영화까지 커리어가 이어지려면 대략 8~10년 정도 걸린다. 정작 실질적인 수익은 상업 영화 작업에서 나오는데 말이다. 앞으로 겪어야 할 10년 가까운 기간을 단축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다고 정상에서 내려갈 일만 남은 우리 스튜디오의 직원으로 영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각자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자신의 작업은 계속하되, 내가 상업 영화 관계자와 미팅이 잡힐 때마다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미팅을 통해 성사된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와 관계 맺은 클라이언트도 상당수 넘겨줬다. 두 스튜디오 모두 우리와 일하며 상업 영화 포트폴리오를 충분히 채우고 독립했다. 나는 비전공자라 후배가 없어서 평소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후배 삼아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고, 기회가 생겨서 실행했을 뿐이다. 요즘 나는 고흥에서 지내지만 이들을 통해 업계 근황을 파악할 수 있고 명절이 되면 전화도 온다.(웃음) 내 나름대로 식구들을 꾸린 셈이다.

지난해에는 ‘원더월’을 통해 포스터 디자인 온라인 클래스를 진행했고, 호남 지역의 청년 창작자들을 위한 워크숍 ‘빛남’도 기획했다.

사실 클래스 제안은 원더월 말고도 많은 플랫폼에서 들어왔다. 그중 원더월을 선택한 것은 강의를 수강하는 디자인 비전공자를 대상으로 아이맥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줌으로 개인별 피드백을 했다. 원래는 10명만 선발하려고 했는데, 수강생들이 남긴 사연 하나하나가 너무 절절해서 피드백에 참여할 시간이 있는 수강생들 모두 다 봐주기로 했다. 한 사람당 30분씩 총 6시간 동안 포트폴리오를 중심으로 진행했다. 이들 중 일부가 ‘빛남’에도 참여했다. 고흥에 가보니 서울 지역 외 청년들에게는 디자인 회사가 일하는 시스템을 접하거나 구경이라도 해볼 기회 자체가 아예 없더라. 그래도 스튜디오 빛나는이 서울에서 나름 잘나가는 스튜디오였으니 우리가 일하는 체계를 경험하도록 하고, 청년 창작자들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지역 디자이너나 디자인 싱킹이 가능한 자영업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수도권 지역을 서울의 열화 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이 지역에만 있는 것을 활용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피드백하는 과정을 거쳤다. 모두 똑똑하고 의지가 강한 청년들인데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기회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까웠다. 내 20대 시절보다 생활수준도, 테크닉도, 취향도 뛰어난 이들이 왜 각자 고립되어 안개 속에서 헤매야 하는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든 시도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

포스터 디자인은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참신한 스타일의 상업 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시도하고 싶다. 해외 영화감독들과도 작업 중이다. 그리고 남들이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벌일 예정이다. 빛남을 비롯해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현재 시급한 사회 문제를 디자인으로 해결하는 프로젝트를 여럿 준비 중이다. 가령 지역 어르신들이 버스 도착 시간을 몰라 정류장에서 오래 기다리는 상황을 해결하고자 카카오톡으로 도착 예정 시간을 전송하는 서비스를 기획하고 있다. 그 외에 앱 개발도 진행 중이고 리빙 브랜드 론칭도 고민하고 있다. 스튜디오 빛나는 산하에 여러 레이블을 두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중이다. 이렇다 보니 서울에서 일할 때보다 고흥에서 훨씬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왕성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어 때로는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글 박종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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