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라이프 디자인을 추구하는 디자인 활동가 나가오카 겐메이 長岡賢明
오사카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경영자인 나가오카 겐메이가 지난 10여 년간 걸어온 발자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를 ‘디자인 활동가’라고 부르는 그는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거기에서 깨달은 수많은 문제점을 여러 가지 프로젝트로 구현하며 꾸준히 사회에 비평적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미덕은 끊임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쏟아내는 것일까? 친환경 제품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생산하는 것을 과연 환경을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까? 전통은 그저 버려야 하는 낡고 오래된 것에 불과할까? 이런 일련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다면 오사카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경영자인 나가오카 겐메이가 지난 10여 년간 걸어온 발자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를 ‘디자인 활동가’라고 부르는 그는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거기에서 깨달은 수많은 문제점을 여러 가지 프로젝트로 구현하며 꾸준히 사회에 비평적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나가오카 겐메이의 디자인 철학이 일반 디자이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새로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디자인업계에 뛰어들어 실무를 경험한 그는 1990년 일본디자인센터에 입사했다. 1991년에는 하라 겐야와 함께 하라 디자인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1997년 드로잉 앤드 매뉴얼(Drawing and Manual)을 설립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이때 개인적인 취미로 모아두었던 중고품을 소비할 방법을 고민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리사이클 숍을 구상하게 된다. 사실 산업화와 대량생산이 일반화된 오늘날 우리는 제품의 소중함을 쉽게 망각하곤 한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이처럼 시간이 흘러 애물단지가 된 물건 중 한때는 세련된 감각을 앞세워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제품도, 오랜 시간 사용하기에 좋은 제품도 있음에 주목한다. “디자이너가 꼭 새로운 것만 만들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잊고 있던 좋은 디자인을 발굴해서 그것이 좋은 것임을 깨닫게해주는 것, 그러기 위해서 새롭게 보여줄 방법을 궁리하는 것, 그 또한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디&디파트먼트 프로젝트(D&Department Project)다. ‘디자인 회사가 만든 리사이클 숍’을 콘셉트로 한 이 프로젝트의 주요 키워드는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 유행에 치우치지 않고 오랫동안 사용해도 문제가 없는 보편적인 물건을 좋은 디자인이자 롱 라이프 디자인으로 규정하고 2000년부터 이 기준에 부합하는 제품을 한데 모아 판매하는 디자인 생활용품 전문점 디&디파트먼트 프로젝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디&디파트먼트는 일반적인 재활용품 매장이나 중고 매장과는 상품 선정 기준부터 다르다. 직접 발품을 팔며 생산 현장을 방문하고 제품을 만드는 과정과 생산자의 철학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 상품 판매자 스스로 발굴한 제품을 직접 사용해보고, 일정 기간 사용한 이후 되팔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좋은 제품인지 꼼꼼히 따져본다. 혹시 사용 중 문제가 생겼을 때 고쳐서 다시 쓸 수 있을지도 염두에 둔다고. 제조사가 일회성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만들고 개선할 의지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한 판매 원칙 중 하나다. 이런 기준들을 모두 만족시켰을 때, 비로소 지속적으로 판매하고 사용할만한 가치 있는 물건이 나온다는 생각 때문이다. 디&디파트먼트 프로젝트는 잊힌 물건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판매 구조를 개척해냈다는 측면을 높이 평가받아 2003년에는 일본 굿 디자인 어워드의 심사위원장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발굴하는 디자이너’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첫 번째 롱 라이프 디자인 제품인 가리모쿠사의 K 체어와의 인연을 계기로 ‘가리모쿠 60’의 리브랜딩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영감을 받아 1960년대 일본 디자인을 재조명하는 ‘60 비전(60 Vision)’을 시작했다. “1960년대 일본에서는 생활용품의 디자인 품질을 높이자는 국가 정책이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디자인 붐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했다. 단순히 이윤 창출에만 몰두하는 디자인이 아닌 정말 훌륭한 물건을 많이 만들었던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스타일을 디자인의 핵심에 둔 브랜드를 만들자는 생각을 했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이 외에도 일본의 지역 산업과 전통 공예를 실생활에 도입해 젊고 현실적인 고객의 수요에 맞게 소개하는 ‘니폰 비전 프로젝트’도 전개해 생산자와 판매자, 소비자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시스템을 완성했다. “디자이너라고 하면 으레 대표작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대표작을 만드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물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거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떤 활동의 기초나 토대를 만드는 일에 더 흥미를 느끼며 이것 또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그의 디자인 철학에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도쿄와 오사카의 직영점을 포함해 삿포로, 시즈오카, 가고시마 등 7개 지역에 디&디파트먼트 매장이 들어섰다. 지난 11월에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밀리미터밀리그람(MMMG)과 함께 이태원에 첫 해외 매장인 ‘디&디파트먼트 서울 바이 밀리미터 밀리그람’도 오픈했다. 이 매장에서는 디&디파트먼트의 기존 제품 외에도 한국의 롱 라이프 디자인 제품이 30% 정도 차지한다. 무리한 확장은 지양하지만, 같은 철학을 공유한 이들이 나타난다면 47개의 일본 행정구역에 매장을 열고 싶다는 나가오카 겐메이. 그는 이내 “그러나 무모한 계획”이라며 웃어 넘겼지만 사실 이 프로젝트는 느리지만 매우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글: 이수향, 자료 제공: 디&디파트먼트·MMMG, 인물 촬영: 이관형 실장 (스튜디오 검정 사과), 담당: 최명환 기자
“서울은 디&디파트먼트의 철학이 반드시 필요한 도시다.”
디&디파트먼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디&디파트먼트의 첫 번째 제품인 K 체어를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우연히 리사이클 숍에서 이 의자를 발견했을 때 외국 제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디자인에 매료되어 구입했는데 집에 돌아와서 살펴보니 나사가 하나 빠져 있더라. 나사를 구하기 위해 제품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다가 이 의자가 가리모쿠라는 일본 회사 제품인 것을 알게 됐다. 당시 가리모쿠 사는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었지만 여전히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처럼 좋은 제품임에도 미처 그 가치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제품을 소개하자는 취지로 디&디파트먼트를 시작하게 됐다. 또 가리모쿠사와의 인연을 계기로 ‘가리모쿠 60’도 탄생했다.
<디 디자인 트래블> 편집부가 일본의 47개 도도부현을 여행하며 접했던 현지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 매달 지역별 제철 음식을 선정해 메뉴를 구성한다. 지역 생산자를 초대해 워크숍이나 강연을 여는 등 정기적으로 음식에 관한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한다.
(중) 디&디파트먼트 도쿄점
최초의 디&디파트먼트 매장인 도쿄점. 현재 디&디파트먼트 전 매장에서 카페와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우) 디&디파트먼트 훗카이도점의 디스플레이
디&디파트먼트는 디스플레이 방식에도 분명한 원칙이 있다. 매장을 찾는 사람들이 충동구매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이런 기준에 따라 상품을 필요 이상으로 돋보이게 한다거나 구입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은 주지 않으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레트로 붐(retro boom)이 일었다.
사실 나는 레트로 붐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붐이란 결국 유행이란 말인데 내가 보기에 가리모쿠의 K 체어는 롱 라이프 디자인 제품이지, 유행에 편승하는 제품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발굴하고 소개하는 제품이 단순히 유행에 휩쓸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도 좋은 제품을 소개하고 판매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디&디파트먼트가 발굴한 제품들을 모아 소개한 책.
롱 라이프 디자인 제품을 발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제품 발굴과 수익 창출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조율하는지 궁금하다.
우리의 사명은 롱 라이프 디자인 제품을 발굴하고 그 제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한 뒤 이를 고객에게 정확하고 진솔한 표현으로 설명하는 일이다. 고객이 우리의 설명을 듣고 납득하면 구매로 이어져 곧 매출이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매출 향상을 위해 이런 프로세스를 뒤엎을 생각은 없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줄 아는 이들을 만나는 것, 그리고 상품의 가치와 가격이 제대로 부합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도 제조 과정이 부실하거나 구매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없다면 판매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 반면 상당한 기술력이 응집되어 있거나 구하기 힘든 소재를 사용하는 등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면 비싸더라도 납득을 하는 것이 소비자의 심리다. 우리는 가격 이외의 다양한 부가가치와 그 의미를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잘 이뤄지면 물건은 자연스럽게 팔리기 마련이다.
디&디파트먼트의 디자인 활동을 전달하던 매거진 <d>가 최근 <디 디자인 트래블>로 제호를 바꾸며 디자인 여행 가이드 매거진으로 편집 방향을 선회했다.
(우) 디&디파트먼트가 선보이는 제품들
최근에는 MMMG와 손을 잡고 디&디파트먼트 서울을 오픈했다.
디자인에 관한 다양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나가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활동이므로 이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으면 파트너가 될 수 없다. 같은 이유로 무리하게 점포를 확장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MMMG는 우리가 추구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했고 또 우리를 필요로 했다. MMMG와는 10여 년 전부터 연 1, 2회씩 꾸준히 교류해왔지만 실제로 이들이 매장을 운영하겠다고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서울점 오픈이 매우 기쁘고 뜻깊다.
1964년에 설립한 일본의 가구 회사 가리모쿠가 출시한 K 체어는 나가오카 겐메이가 처음 발견한 롱 라이프 제품이다. 아름다운 형태와 적절한 크기, S 스프링의 뛰어난 내구성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우) 디&디파트먼트 서울 by MMMG가 찾은 서울 셀렉션
MMMG는 이번 서울점 오픈에 맞춰 전국 각지의 숨겨진 롱 라이프 디자인 제품을 발굴했다. 순수 국내 기술로 조립 생산하는 아피스 만년필부터 담양의 장인들이 만든 죽세공 제품까지 다양한 제품을 디&디파트먼트 서울 by MMMG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 더 나아가 한국의 특색을 살린 롱 라이프 디자인 제품을 발견하고 모으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서울은 도쿄 이상으로 변화가 빠르고 유행에 민감하며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도시다. 반면 전통의 보존이나 재활용에 대한 인식은 낮다. 바로 이 점이 MMMG가 서울에 디&디파트먼트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계기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룰을 제시할 뿐, 실제 제품을 찾아다니고 제품을 선택하는 일은 온전히 각 파트너의 몫이다. 이는 서울점도 예외가 아닌데, 이번 서울점 오픈을 준비하면서 오래된 물건을 조사하고 수집하는 초기 단계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괜찮은 물건이다 싶어서 알아보면 전통 계승자가 사라지고 없거나, 이미 제조 회사가 폐업해서 더는 생산하지 않아 물건을 손에 넣을 수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험을 거치며 서울이란 도시가 롱 라이프 디자인의 철학이 반드시 필요한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형태의 아름다움도 아니고 디자이너의 명성도 아니다. 일상에서 오랜 시간 사용해온 물건이 결국 좋은 디자인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서울점에서 가장 인상에 남은 제품은 이태리타월이었다.(웃음) 흰색을 추가로 발주했을 정도로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