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는가 엔조 마리 (Enzo Mari)

그의 디자인 세계를 오는 6월 21일까지 DDP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열리는 <엔조 마리 디자인>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미디어 노출을 꺼리는 그를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디자인은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는가 엔조 마리 (Enzo Mari)
1932년생. 밀라노의 브레라 아카데미(Accademia di Brera)에서 문학과 예술을 전공했다. 이후 그래픽 디자인부터 산업 디자인과 건축, 도시 설계까지 점차 디자인 영역을 넓히고 다네제, 알레시, 아르테미데, 아르텍, 카스텔리 등 유명 기업을 통해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자신이 연구한 미학 이론을 어린이용 완구에 접목시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2000년대 전후로 베를린과 일본의 중소기업 및 장인들과 협업하며 그들의 자생적 발전을 끌어내고자 했다. 1976~1979년 이탈리아 산업디자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밀라노 도시 환경 개선 작업을 총괄했다. 동시대를 함께한 부르노 무나리(Bruno Munari), 아킬레 카스틸리오니(Achille Castiglioni), 마르코 자누소(Marco Zanuso) 등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디자인을 재건한 주요 인물로 꼽힌다.

‘디자인’의 의미와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역할은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정의해왔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엔조 마리는 그러한 정의의 모음 한가운데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의 디자인 세계를 오는 6월 21일까지 DDP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열리는 <엔조 마리 디자인>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미디어 노출을 꺼리는 그를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글: 최태혁 매거진 <B> 편집장, 인물 사진: 라우라 판타구치 (Laura Fantacuzzi), 담당: 최누리 기자

서울 전시 개최를 맞아 한마디 부탁 드립니다.

전 한국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게 느껴지네요. 과거의 한국이 도자 기술 측면에서 훌륭한 선생(일본의 도자문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현재는 젊고 현대화된 곳이라는 정도밖에는 모릅니다. ‘나’라는 사람을 당신 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기본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 <엔조 마리 디자인–유토피아를 향한 은유 Design Allegori of Enzo Mari Towards Utopia>에서는 엔조 마리가 주창한 ‘유토피아’의 세계관을 담은 그의 작업을 전시할 예정이다. 이는 2011년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레스 앤 모어_ 디터 람스의 디자인 10계명>에 이어 디자인이가 스퀘어(고문 이상철, 대표 이병혜)가 극도로 소비화된 시대에 ‘윤리를 담은 디자이너의 역할’을 고민하며 기획한 두 번째 전시다. 이번 전시에는 일본 디자이너 나가이 게이지(Keiji Nagai)가 모은 엔조 마리의 디자인 작업물을 선보인다. 엔조 마리는 자신이 태어난 이탈리아 노바라 (Novara) 지역에서 가까운 밀라노에 자택과 작업실을 갖고 있다. 이번 기회를 맞아 한국을 방문 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일정이 취소됐다. 인터뷰 방문 당시에도 자택에서 작업실로 장소가 반복해 변경돼 가까스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잠시 활동을 중단한 이후로 1년 전부터는 그의 스튜디오도 휴무 상태다. 문에는 그의 이름을 손으로 써 붙인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과거의 흔적만이 먼지가 쌓인 채 남아 있었다. 수십년 동안 진행해온 프로젝트가 잘 정리돼 복도를 메우고 있었는데,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집착이 없고 프로모션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의 사무실답게 본인의 디자인 제품은 일부 몇가지만을 발 견할 수 있었다. 건강 때문에 인터뷰에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190cm 가까이 돼 보일 정도의 거구인 그는 나이를 믿기 힘들 만큼 시선의 흔들림 없이 대화에 집중했다.

알고 있는 사실이란 어떤 것인가요?

저는 미래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날 그날 한 조각의 빵을 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하루살이 생활이었죠. 그러나 비록 고등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나름대로 예술 작품을 몇 점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유럽에서 예술가로 알려지지는 않았어요. 당시에도 예술가로 이름을 알리려면 가끔씩 유명 전시회에서 고가의 작품을 선보여야 했으니까요. 제가 20~30대 시절 시장에 나온 물건은 전부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는 물건뿐이었죠. 그런 것을 만든 제작자와 기업가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지금도 예술과 디자인의 세계라는 것은 바보들의 집단이죠.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디자인이라는 것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선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단순히 아름다운 형태를 만드는 법이 아닌, 그것을 생산하는 능력 자체를 키워주고 싶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책 한 권을 읽는다거나 강연을 몇 개 듣는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 필요한 모든 훈련을 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운동선수가 책을 읽고 강연을 듣거나 영화 몇 편을 본다고 우승할수 있나요? 아닙니다. 우승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최대한의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결코 거짓이 통하지 않습니다.

엔조 마리는 그의 업적에 비해 국내에 알려진 바가 적다. 젊어서부터 글로벌한 명성을 얻지도 못했고, 기념 사업 등을 통해 업적을 기리는 작업 또한 활발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다네세 (Danese) 등 유명 업체들에서 꾸준히 그가 디자인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긴 하지만 대중에게는 여전히 생소할 뿐이다. 이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세계적 디자인 대가들과 사뭇 대비되는 부분이다. 나가이 게이지는 엔조 마리의 대중적 인지도가 적은 데 대해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홍보나 집착이 적고, 그보다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성향을 가진 점이 한몫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엔조 마리가 추구하는 디자인 세계는 일반적인 ‘디자이너’의 역할을 넘어 ‘사상가’로 평가받을 만큼 넓고 깊다.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인상으로 알려진 황금 콤파스상(Compasso d’Oro)을 수차례 수상한 것은 그의 작은 경력일 뿐이다.

그는 1932년 이탈리아 노바라에서 태어났다. 노바라는 북부 피에몬테 주에 속한 곳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유럽에서는 드물게 쌀 재배가 활발해 전쟁 시 이곳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심화된 지역이 다. 공부와 생계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진학한 대 학에서는 문학과 예술을 전공했다. 디자인을 학 교 정규 과정이나 스승에게 배운 적은 없다. 그는 인간이 어떤 대상을 느끼고 파악하는 방식에 대한 ‘시각 인지’ 분야를 오랫 동안 연구해 이를 작업에 반영해왔는데, 이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디자인한 교육용 제품에서 더욱 그 가치가 발휘됐다.

한편 그래픽 디자인은 물론 산업 디자인, 건축, 도시 환경까지 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일에 매 진했다. 정확한 양을 산출할 수는 없으나 2000 여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엔조 마리는 시대적 사명을 반영해 물건의 고유한 원형을 발견하고자 했으며, 빈부 격차에 상관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쓸 수 있는 좋은 물건을 만들고자 했다. 특히 그의 다양한 사상은 ‘유토피아’라는 특별한 가치를 지향했다. 그는 기업가, 디자이너, 노동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을 구축하는 것, 그것을 ‘유토피아’라 했다. 언제나 ‘물건을 만드는 과정’과 ‘이를 만드는 사람들’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는데, 이는 그의 철학적 본질에 접근하는 핵심적 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만들어진 결과만이 아닌 그 과정을 개선하고 디자인함으로써 인간 삶의 본질에 진정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1974년 발표한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 Autoprogettazione>는 이를 집약한 것으로 테이블, 의자, 침대 등 19가지의 기본 가구를 개인이 만들 수 있도록 도면과 완성 사진을 묶어 책으로 발간한 프로젝트였다. 저작권 걱정 없이 누구나 가정에서 스스로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는 이에 대해 “프 로젝트의 품질이라는 것은 창조력의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데, 창조력이란 행동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성은 손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서울 전시에서도 주요하게 선보일 이 프로젝트는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2010 년 핀란드 회사 아르텍(Artek)은 그중 의자를 실제로 구현해 판매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네덜란드의 디자인 그룹 드로흐(Droog)가 이 개념을 온라인으로 옮겨 ‘디자인 포 다운로드(Design for Download)’를 선보이기도 했다.

유토피아와 관련한 그의 사상이 반영된 비교적 최근 작업은 지역 문화와 관련돼 있다. 독일 왕립 자기 제도소(KPM)와 공동 개발한 ‘베를린 시리즈’(1995)는 그저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게 아닌, 장인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개발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프로젝트였다. 또한 전통적인 도자기 생산지인 이탈리아 남부의 비에트리나 일본 나가사키 현의 하사미에서도 장인들과 함께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성장을 자발적으로 가능케 하고자 했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목가구 제조 회사 중 하나인 히다 산업과의 협업 또한 지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엔조 마리는 지역 장인과 함께 한 프로젝트에 대해 “전통을 어떻게 계승해 갈지를 작업자 스스로가 모색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나가이 게이지는 이와 같은 엔조 마리의 활동을 “물건을 디자인했다기보다 ‘작업 방식’을 디자인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기계를 쓰더라도 더 아름답고 더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시스템 자체를 만들고자 한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말씀을 부탁 드립니다.

독일이 일으킨 전쟁에서 유대인만 희생된 게 아닙니다.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희생자의 30배가 넘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이탈리아 군인이 죽었고, 수많은 건물이 폭격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마지막 전쟁이 끝났을 때 저는 14세였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밀라노와 토리노를 잇는 다리를 폭격하기 위해 하늘을 덮은, 4개의 엔진을 단 미국 폭격기들을요. 이로 인해 이탈리아 전국이 폭격을 당했습니다. 나치들이 이탈리아에서 나라를 지키려던 젊은 애국자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아십니까? 저는 고작 13~14 세인 제 동료들에게 일어나는 비극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제 동료들을 철사 줄로 목을 두 번 감아서 손에 쥔 뒤 발로 가슴을 밀고 철사 줄을 힘껏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전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기억해야 할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전쟁은 1945 년에 끝이 났지만 전국에서 작은 마을의 교회와 역사적인 건물까지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밀라노의 건물 70% 이상이 사라져 버렸죠.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은 너무도 비참했습니다. 저 역시 그들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당시 제가 어떤 옷 차림이었는지 아십니까? 신발 밑창이 떨어져 철사 줄로 묶어서 신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전쟁이 이 나라를 휩쓸고 간 후 남은 생존자들은 그나마 피해가 적은 두 도시 토리노와 밀라노로 모여들었습니다. 토리노에는 피아트라는 역사가 긴 자동차 회사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피아트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죠. 반면에 밀라노에 도착한 생존자들은 피아트 같은 대형 회사는 물론 가정용 소비 제품을 만드는 공장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공장을 지으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그럴 만한 여유를 가진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거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값이 싼 물건들만 유통되었습니다. 그대신 숙련된 장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공방이 남아 있었습니다. 밀라노로 모여든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그런 곳에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중 엔조 마리의 과거에 대한 회상 부분이 길어지자, 짧은 시간에 인터뷰를 마쳐야 하는 상황을 걱정한 개인 어시스턴트가 그의 허락 없이 잠시 이야기를 끊고 엔조 마리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를 정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엔조 마리는 크게 화를 내며 지금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재차 강조했다. “내가 지금 나의 유토피아 세계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난 엉뚱한 이 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분명 디자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어떻게 해서 디자인이 탄생했는지를 말하고 있단 말이야. 오랫 동안 같이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조용히 듣고 있든지, 여기서 나가!”

괜찮습니다. 이어서 말씀해주세요.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역사 공부를 시키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 디자인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어서 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작은 공방의 노동자들은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학교를 다녔다고 할지라도 낮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 뿐이지만 매우 휼륭한 기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작은 공방에서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쓸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밀라노는 물론 이탈리아에 변변한 공장이나 회사가 드물었던 만큼 국내는 물론 일부 유럽에서 발주되는 샘플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샘플은 무역 박람회로 보내졌죠. 그 시대의 이탈리아는 지금의 중국과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요? 그들은 정말 휼륭한 공예가였지만 인건비는 유럽에서 가장 낮았습니다. 그들이 만든 물건은 독일 제품처럼 정해진 규칙이 있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만든 것도 아니었지만 무언가 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탈리아의 ‘근대 디자인’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근대 디자인의 중심지는 밀라노의 무역 박람회였습니다. 이 디자인은 독일이나 영국의 디자인과 다를뿐더러 어떤 학술적인 전통 규칙에서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탈리아 디자인’입니다. 디자인은 예술가라든지 건축가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수공업자’가 만든 것입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실제 있었던 이런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창조성이란 이런 것입니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있죠. 저는 저만의 엉뚱한 생각이 아닌 실제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바른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그 바른 사고란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모두의 목표가 될 수 있는 사고를 말합니다. 전 항상 본인이 예술가나 디자이너라고 외치는 바보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디자이너’라고 하는 이들은 머릿속이 비뚤어진 범죄자가 대부분입니다.

과거와 크게 변한 요즘의 세상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저도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느낍니다. 그중 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탈리아의 현실입 니다. 소름이 끼칠 지경이죠. 조금이나마 예절과 도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현실을 자각할 것입 니다. 좋은 디자이너가 되는 길은 결코 여행을 많이 하거나 책을 많이 읽거나 전시회를 많이 관람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 제게는 그리스 철학자였던 플라톤의 사고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죠.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정신적인 선생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포모사(Formosa), 1963, 다네세 숫자와 문자가 적힌 판을 바꿔가며 날짜와 요일을 표시할 수 있다. 엔조 마리는 제품의 생산 과정을 단순화시키는 것처럼 그래픽 작업 역시 불필요한 모든 요소를 배제시키려고 했다. ⓒ Kudaka Ryoji
지금까지 디자이너로 살아오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평등이란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요? 소수의 인원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10만 명 이상이 모인다면 혹시 조그마한 법률을 바꿀 수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내 이후로 열 세대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겁니다. 참 된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등이란 원칙과 희망일 뿐입니다. 물론 개인은 평등해질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요.

평생에 걸쳐 이룩하고자 한 유토피아는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사람들에게 작더라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긴 적은 없습니다. 저 역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동안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점차 이해하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봅니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날 거 라고 생각하죠. 저는 평생 이런 문제들을 이해하고 개선시키려 노력했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 들을 동참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 왔습니다. 당연히 혼자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할 정도로 콧대가 높지도 않고 정신이 이상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제 노력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프-소프(Sof-Sof), 1971, 쟈노타(Zanotta) 제작 원가를 줄일 수 있도록 강철 튜브를 엮어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패브릭 쿠션을 한 번에 얹을 수 있게 디자인했다. 델피나의 경우 패브릭에 지퍼를 사용해 기본 뼈대와 결합시켰는데, 당시 보기 드문 새로운 시도였다. ⓒ Kudaka Ryoji

인터뷰 말미에 자신이 평생 주창하고 걸어온 길의 결과에 대해 비관적 입장을 표했지만, 그는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그 누구보다 긍정적인 자세로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며 작업에 매진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디자인이가스퀘어의 이상철 고문은 이렇게 말한다. “일상적 삶에서 출발해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할 디자인이 매우 피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에 나올 수 있는 디자인은 이미 다 존재하고 있습니다. 조금 다르게 만들었을 뿐인 물건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디자인은 단지 돈을 버는 도구로 그 역할을 강요받고 있음에도, 진정으로 사고 싶은 양질의 물건은 과거에 비해 점차 줄어 들고 있음을 느낍니다.” 엔조 마리 역시 클라이언트는 항상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하지만 수천 년에 걸친 물건의 진화에 의해 원형이 결정되는 만큼 고대부터 이어진 인간의 도구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라는 것을 제안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일반적인 디자인 학교에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유가 색다른 결과를 얻기 위함일 뿐, 그 과정의 이면에 의식이나 사고가 없는 점을 강하게 질책해왔다. 이상철 고문은 이번 서울 전시에 대해 “오늘날 디자인이란 것이 경제 논리에 의해 맹목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많은 디자이너가 디자이너로서 이 사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보다 돈 버는 것에만 몰입해 있는 것이죠. 엔조 마리의 디자인에 담긴 철학은 오늘날 일상에서 너무나 멀어져버린 ‘디자인 본연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지금의 한국 디자인 현실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그 의미를 밝혔다.

여건상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다. 현학적이고 반복적인 그의 어법상 지문에는 매우 생략된 내용만이 남았다. 그러나 엔조 마리는 그동안 필자가 만났던 디자이너와 예술가 그리고 기업인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이는 실제로 마주 앉았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인물의 거대함 같은 것이었다. 비평가인 훌리 카페야 (Juli Capella)는 “그는 떼를 짓는 것에 대해 신용하지 않는다. 어떠한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분파를 피하며, 유행을 싫어하고, 합리주의자나 포 스트 모더니스트로부터도 거리를 둔다. 어디까지나 단지 한 사람으로서 사명을 다하는 일을 계속한다”라고 그를 평한 적이 있다.

그는 인터뷰 시간 대부분을 자신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증언하는 데 할애함으로써 평생에 걸쳐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그가 말하는 노동의 즐거움은 예술과 디자인 그리고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느 특별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말하고자 한 메시지를 이번 서울 전시에서 스스로 발견하길 바란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431호(2014.05)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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