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 하디드, 영면에 들다 ‘남자판’ 건축계의 여제

지난 3월 31일, 가장 주목받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가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자하 하디드, 영면에 들다 ‘남자판’ 건축계의 여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포트레이트.

지난 3월 31일, 가장 주목받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가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언제나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등등한 인물이었기에 그녀의 부음은 한동안 믿기지 않았다. 1990년대에 건축을 공부한 세대는 일본에서 발행한 GA 시리즈로 안도 다다오, 노먼 포스터, 장 누벨과 같은 대가들을 접했다. 자하 하디드는 그중 유일한 여성이었고, 심지어 가장 젊었다. 이제 막 비트라 소방서로 데뷔한 후라 완공작은 두 개밖에 없지만 책에서 소개한 모든 계획안이 비범했다. 어리숙한 학생의 눈으로 보기에도 감히 다음 시대를 전파하는 예언서 같았다. 그녀의 드로잉은 전통적인 재현 방식과 달랐다. 2차원 평면을 탈주한 입체파나 미래파 같기도 했다. 런던 AA 스쿨 재학 시절 스승이었던 엘리아 젱겔리스(Elia Zenghelis)와 렘 콜하스로부터 받은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파편화된 대지는 서로 중첩되며 가상 현실 속 풍경을 연상시키고, 과장된 원근법으로 더욱 날렵해진 건물 형태는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질 듯 속도를 냈다. 곡선과 사선이 종횡무진하는 공간은 짓기 어려워 번번이 계획이 틀어졌다. 그나마 삿포로에 레스토랑 인테리어를 실현했을 뿐 거품 경제기의 일본 건축주에게도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스타일을 굽히지 않았다. 건물을 지을 수 없을 때는 캔버스를 대지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드로잉을 페이퍼 아키텍트의 자유로운 상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게는 잠재적 현실이었다.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다이어그램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기는 건축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서울에 남긴 DDP 전경 ©박해욱.

자동차나 선박을 설계하는 데 쓰는 컴퓨터 툴의 발전은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이제는 유기적인 형태를 마음껏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중력에 대한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3차원 곡면을 구사하였다. 질주 혹은 상승하듯 역동적으로 그렸던 구조체들은 녹아내려 하나의 매끈한 공간으로 통합되었다. 바닥, 벽, 천장으로 분류되던 오랜 문법을 타파한 것이다. 이는 장식이 제거되고 순수하게 유클리드 기하학만을 추구한 모더니즘 건축에 속도와 운동성을 부여했다. 움직이는 관찰자가 고정된 하나의 초점에서 벗어나자 시각에 지배당하던 나머지 신체 감각이 활성화되었다. 건축은 이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듯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비트라 소방서 이후로 인스브루크에 위치한 베르기셀 스키 점프대로 다시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데 8년이나 걸렸다. 1994년 1등으로 당선된 카디프 베이 오페라 하우스가 무산된 후, 무려 2013년이 되어서야 서펀타인 새클러 갤러리로 영국에 첫 건물을 남겼다. 중동에서 온 여성이 아니었다면 사정이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런던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좀처럼 영국에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2004년 신시내티 박물관으로 여성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여기에는 미국에서 여성이 설계한 최초의 뮤지엄이라는 영예도 더해졌다. 서울에는 DDP를 남겼다. 이세이 미야케의 옷을 입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처럼 짧은 망토를 즐기는 만큼 패션계와도 친분이 깊었다. 루이비통 백을 디자인하고, 전 세계를 순회하는 샤넬의 파빌리온을 제작했다. 도쿄의 닐 바렛 매장 인테리어는 일본의 정서가 형태적으로 잘 반영된 역작이다. 디자인과 관계된 어떤 분야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인 그녀는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조지 젠슨의 의뢰로 주얼리 디자인을 발표하기도 했다.

<샤넬 모바일 아트>(2008)가 열린 파빌리온.

65세는 건축가로서 한창 왕성한 활동을 펼칠 때이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오랜 싸움으로 지쳐가 있을 나이였다. 중국 제일의 부동산 기업 소호건물은 다른 중국 건축가가 노골적으로 복제했다. 심지어 복제품이 원작보다 먼저 완공되는 웃지 못할 사건을 겪었다. 카타르 월드컵을 위해 설계한 알 와크라 스타디움은 여성의 성기를 닮았다는 저열한 얘기가 오갔다 또한 공사장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외국 노동자 1200명이 사망했다며 인권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건축가가 현장 감독관이 아님에도 비난의 화살을 맞아야 했다. 특히나 최근의 도쿄올림픽 경기장 당선안이 동료 건축가들의 보이코트로 무산되고, 재도전 기회가 일본 건축가에게만 유리하게 주어진 까닭에 결국 자포자기하게 된 일로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독재자 후세인 때문에 도망쳐 온 고향 바그다드에 의회를 설계하거나, 아부다비 공연장과 같이 그녀의 생에서 보상받아야 할 영광의 순간이 아직 많이 남았기에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 음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인생 최고의 작업은 언제나 다음의 것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누구보다도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서구사에서 시선은 남성적이며 눈은 사악하다고 일컬어왔다. 바라본다는 행위는 무엇인가를 대상화시키고, 그로 인해 설정된 간격은 대상을 차지하려는 욕망의 크기이기도 하다. 미국의 건축가 존 헤이덕(John Hejduk)은 “건축의 여성 시대가 왔다”라는 선언을 통해 이러한 남성 지배적인 건축을 구원할 수 있는 원천으로 여성성을 줄곧 옹호해왔다.

건물을 지을 때 벽 안에 아름다운 여성을 넣고 밖에서 메워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민담은 중앙아시아를 비롯하여 전 유럽에 걸쳐 공유된다. 기둥을 여성의 모습으로 조각한 아크로폴리스의 에렉테이온 신전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여성이 건축과 남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길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여성을 재료로 치부하는 데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축의 라틴어 어원인 아르키텍투라(arch tectura)는 여성 명사이지만 정작 건축을 만들어내는, 혹은 창조주의 뜻을 지닌 아르키텍투스(arch tectus)는 남성 명사이다. 여성은 창작의 영감을 불어넣는 위대한 존재라는 뮤즈의 개념 안에 내포된 수동성은 이렇듯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녀가 일관되게 추구하던 공간은 끊임없이 연속된 생체미학이었다. 단지 곡선을 잘 다루는 건축가로 묘사될 것이 아니라, 사진과 같이 정지된 시각을 거부하고, 공감각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몸의 세계관이었다. 이것이 존 헤이덕이 바라마지 않던 건축에서의 여성성일지 모른다. 자하 하디드는 하나의 지배적인 시선이 아니라 사방을 둘러보며 변화하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축을 구현함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가디안>지와의 인터뷰에서 자하 하디드가 한 유명한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송사를 마친다. “우리는 360도로 된 세상에 살잖아요. 그런데 왜 한 각도로만 바라보나요?(There are 360 degrees, so why stick to one?)”

글: 배윤경 건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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