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윅 스튜디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상>전 여는 토머스 헤더윅
지난 6월 15일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시작한 <헤더윅 스튜디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상>전에서 26개 주요 프로젝트를 선보이기위해 서울에 온 토머스 헤더윅을 만났다.
2010년 상하이 엑스포 야외 부지에 거대하고 촘촘한 수만 개의 투명 아크릴 막대기가 뿜어져 나오는 건축물이 등장했다. 설치된 6개월간 800만 명의 관객에게 압도적인 경험을 제공한 이 프로젝트는 영국의 파빌리온, 일명 ‘씨앗 대성당’으로 250개 국가관 중 방문객 투표에서 올해의 파빌리온으로 선정되었고, 그제야 총괄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국 정부가 ‘반드시 톱 5에 들라’고 단단히 압박 아닌 압박을 주었기 때문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이 1994년 설립한 헤더윅 스튜디오는 둥글게 말리는 교량, 중동 아부다비 사막의 공원, 영국 봄베이 사파이어 증류소 등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야심 차게 도맡아왔다. 한편, 2012 런던 올림픽 성화대, 런던 2층 버스, 가든 브리지, 재생 에너지 발전소 등자국의 공공 프로젝트도 맡아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일상적인 아이덴티티를 구축해온 크리에이터 집단이기도 하다. 헤더윅에게 순수 예술보다 디자인이 더 매력적으로 와 닿았던 까닭은 누구나 일상적으로 접하는 물건과 공간이야말로 가장 많은 이들에게 폭넓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15일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시작한 <헤더윅 스튜디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상>전에서 26개 주요 프로젝트를 선보이기위해 서울에 온 토머스 헤더윅을 만났다. 글: 김은아 기자, 사진 제공: 디뮤지엄
토머스 헤더윅 1970년생으로 맨체스터 폴리테크닉 대학교에서 3차원 디자인(3-dimensional Design)을 공부한 뒤 영국 왕립예술학교(RCA)에 진학했다. 1994년 런던에서 가구와 제품 디자인, 건축, 도시 계획을 아우르는 헤더윅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다채로운 소재에 대한 실험과 사용성 테스트를 중시하는 그는 아이디어를 직접 구현해볼 수 있는 작업실 중심의 일하는 방식을 고수하며 건축가, 디자이너, 메이커 등으로 이루어진 200명 규모의 스튜디오를 이끈다. www.heatherwick.com
영국의 국민 디자이너로 불리는 거장 테렌스 콘란 경(Sir Terence Conran)은 당신을 가리켜 ‘우리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극찬했다. 기분이 어땠나?
테렌스 콘란은 내게 영감 그 자체다. 영국 근대사회를 매우 예리하게, 이전과는 다르게 바라본 인물이었고 그의 접근법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디자이너이자 기업가인 그의 성취를 지켜보며 나 또 한 전율을 느꼈다. 다빈치라는 코멘트는 물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런 관대한 평을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가이자 디자이너이자 탁월한 엔지니어였다. 헤더윅 스튜디오는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에 대한 이해가 높은 것이 장점이다.
대규모 빌딩을 비롯해 교량, 도로 등 사회 기반 시설은 엔지니어링, 건축, 장인 정신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디자이너가 엔지니어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신의 작업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태도라고 본다. 사실 나에게 엔지니어링이란 이해하고 숙지하는 개념이 아니라 계속 감탄을 주체할 수 없는 매력적인 대상이다. 나는 결과물에 사용된 기술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샅샅이 알고, 제작 과정의 기분 좋은 놀라움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느끼고 싶다. 엔지니어들은 늘 내가 생각지 못한 훌륭한 해결방안을 갖고 온다. 가끔은 엔지니어링에 따른 제약이 오히려 다른 아이디어를 점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200여 명에 달하는 헤더윅 스튜디오의 스태프들은 어떤 가치를 갖고 일하나?
대부분은 건축가들이고 일부는 넓은 영역에서 디자인 교육을 받은 디자이너들, 그리고 또 일부는 기술적 이해를 가진 휼륭한 메이커들이다. 엔지니어링, 조경, 건축 등 모든 것을 다 내부에서 하는 건 아니기에 수많은 외부 팀과 동시다발적으로 협업한다. 특히 건축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반드시 여러 팀 단위의 인력이 필요하다. 굳이 복잡하고 어려운 방식을 택해 도전적인 길을 가려는 우리 스튜디오의 경우 더욱 그렇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놓는 ‘최고의 케이크, 최고의 차’(프로젝트 결과물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는 까다로운 우리 내부 팀의 기준과 성미를 견뎌준 협업자들에게 주어지는 적절한 보상인 셈이다.
건축가 프레드 맨슨(Fred Manson)은 테이트 모던, 밀레니엄 브리지 등 런던을 상징하는 건축물에 관여한 도시 재생 전문가로 2012년 헤더윅 스튜디오에 합류했다. 당신이 쓴 <Thomas Heatherwick: Making>의 ‘감사의 말’부분에 언급한 것을 보면 회사 분위기를 이끄는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더라.
맞다. 대부분의 직원들보다 한 세대 웃어른인 그는 우리의 클라이언트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건물 몇 개를 의뢰했는데, 테이트 모던을 지을 당시 의사 결정권자 중 한 명이었으며 테이트 모던 관장에게 옛 건물을 계속 사용할 것을 권유한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건축가 출신이지만 도시 계획가이자 무엇보다 공공장소에 대한 열정이 매우 큰 사람으로 헤더윅 스튜디오 내 여러 건축 팀과 일하며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도시적 관점에서 다시 돌아보게 한다. 내 아이디어는 물론 사내 모든 팀의 구상을 비틀고 시험하는 그를 두고 우스갯소리로 ‘모두를 성가시게 할 수 있는 특별 권한 자격증의 소유자’라고 부른다. 스튜디오 내에서 구체적인 직함이나 주어진 역할은 없지만 모든 디자이너와 색다른 대화를 나누며 아이디어를 유발하고 발전시키는 사람, 직원들 간의 화학작용을 부추기는 사람이다. 기존 틀에서 벗어나 신선한 사고를 하는 것이 중요한 우리에게 특히 더 감사한 인물이다.
헤더윅 스튜디오는 런던의 버스부터 신문 가판대, 교량 등 공공 디자인 영역에서도 프로젝트를 활발히 진행한다.
나의 변하지 않는 관심사는 ‘다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공공 프로젝트는 당신이 그 과정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아마 가장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부문이라고 본다. 매우 복잡하고 어려워서 많은 이들이 도중에 그만두곤 하지만 그 ‘골칫거리’라고 불리는 어려움이 나에게는 동기부여이자 흥미를 유발했다. 영국에서는 이미 수많은, 훌륭한 이들이 공공 프로젝트에 헌신해왔기에 오늘날 내게도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본다.
공공 프로젝트는 기업 클라이언트의 프로젝트보다 예산, 시간, 의사 소통 면에 서 제약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정부와의 협업을 떠나 그게 현실이다. 세상 그 어떤 프로젝트라도 예산은 늘 부족하다. 디자이너들이 일할 때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군가 충분한 비용을 대주겠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현실은 엔지니어팀과 함께 주어진 자원과 시간 내에서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지 머리를 맞대는 일의 연속이다. 그 과정을 도출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자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제약이 없는 게 오히려 어색할 거다. 내가 한 작업 중에 예산이 남아도는 작업은 없었다.
봄베이 사파이어의 첫 전용 증류소와 방문자 센터. 증류소에서 뻗어 나오는 듯한 형태의 온실에서는 잔열을 활용해 진(gin)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10종의 식물이 자란다. ©Iwan Baan
거리의 작은 벤치 하나도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의뢰하는 영국 정부는 디자인 강국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럼 에도 클라이언트로서 정부를 상대하며 느낀 어려움은 없었나?
원래 누구나 자기 나라 정부는 최악이고 남의 나라 정부는 다 좋아 보이지 않나.(웃음)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고 본다. 정부는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다. 사람들이 긍정적 시선을 공공 프로젝트에 불어넣지 않으면, 디자이너가 정부와 일하는 걸 꺼려하면, 생명체는 곧 죽을 것이다. ‘물론 관료주의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고 갈 길이 멀지만 어쩌면 이야기가 통할지도 몰라’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진행한 공공 프로젝트가 누군가에게 영감을 준다면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정부 또한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시민들에게 공모를 내거는 등 어떠한 방법으로건 소통하며 모두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도시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어떻게 기여한다고 생각하나?
도시 자체가 하나 디자인이다. 넓었던 강 폭이 좁아지기도 하고 공원 부지가 새로 조성되기도하고, 결국 모두 통제하고 재단하고 디자인한 거다. 나는 도시란 매우 복잡한 층위의 디자인이 녹아든 산물이라고 본다. 내 작업으로 우리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간다는 게 즐겁다. 그 환경은 시민들이 서로 관계 맺을 수 있도록 해주지 않나. 내게 언제나 큰 영감이 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삶을 더 풍부하게, 낫게 만들수 있다’는 믿음이다. 어차피 국가에 도로가 필요하다면, 보행 도로와 광장이 필요하다면, 보건소와 양로원이 필요하다면 조금 더 정성과 꼼꼼함 과 영혼을 담아서 제대로 하면 어떻겠는가?
런던 중심부 패딩턴 유역에 설치한 작은 보행자용 다리로 둥글게 말려 있던 형태가 천천히 약 3분 만에 완벽하게 열린다. ©Steve Speller
런던을 포함해 디자인적으로 흥미를 유 발하는 도시는 어디인가?
사실 오늘이 내가 처음 서울에 온지 4일째인데 이 곳도 엄청난 자원이 모인 곳이라 놀랐다.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큰 강이 있고 이렇게 가까이 산이 있다니, 상하이나 베이징 같은 아시아의 대도시가 너무 부러워할 만한 조건 아닌가. 너무 근사하다. 런던에도 산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서울을 둘러보면 세계의 여느 대도시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층 건물이 잠식해 있는 것이 아쉽다. 세상 어디에 가져다 놔도 어색할 것 같지 않은 특색 없는 빌딩 말이다. 한국이 앞으로 이 곳에만 있을 법한 빌딩을 만들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다. 전통에 뿌리를 둔 어떤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할지 궁금해진다. 아, 그런데 오늘 내가 입은 바지의 문양을 ‘한국적 패턴’이라고 할 수 있나? (그는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구매했다는 진한 남색의 개량 한복을 입고 나왔다. 편안하게 몸에 착 감기면서 전통 매듭 단추로 잘록한 바짓단을 마무리해 배기한 실루엣이 마음에 들었다고.)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코리아 아이덴티티’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와 닿지 않는다. 내가 만약 한국에 서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면 그게 한옥이 되었건 또 다른 어떤 가치가 되었건 여기 이 토양에서 자란 무엇인가를 담은 디자인을 하고 싶다. 며칠 전 한국가구박물관에 가서 한국 가구의 역사를 보고 고유의 장인 정신과 소재의 감촉에 감탄했다. 그런데 여기서 창가로 보이는 고급 빌라촌은 심지어 한글도 전혀 없어 지금 어느 나라 도시에 와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 몇 개를 소개 한다면?
뉴욕 링컨 센터의 데이비드 게펜 홀(David Geffen Hall)을 리디자인하는데, 콘서트홀에 경험이 많은 캐나다 건축팀 다이아몬드 슈미츠(Diamond Schmitt)와 함께 6년 후에 완공할 장기 프로젝트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는 아프리카 최초의 현대미술관인 자이츠 아프리카 현대미술관(Zeitz MOCCA)이 공사 중이다. 원래 있던 원통 모양의 거대한 곡물 저장 탱크를 개조해 내부에 수십 개의 다른 갤러리를 배치한 구조로 내년에 문을 연다. 영국에서는 런던 풀햄(Fulham) 풋볼 클럽의 경기장과 요크셔의 매기스 암 치료 센터(Maggie’s Cancer Care Centre) 를 작업 중이다.
헤더윅 스튜디오가 지난 21년간 세계 곳곳에서 선보인 작품 중 26개의 주요 프로젝트를 엄선해 드로잉, 프로토타입, 테스트 모형, 1:1 사이즈 구조물, 사진과 영상을 전시한다. ©디뮤지엄 제공
지난 22년간 정말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혹시 아직 시도하지 않은 것 중 욕심나는 일이 있나?
물론이다. 우리 스튜디오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나는 학교와 감옥도 꼭 짓고 싶다. 요즘 들어 영국에서는 죄에 따른 ‘벌’에 대한 논란으로 시끄러운데 교화, 즉 교육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아마도 당신과 내가 받은 교육과 훈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이 야말로 그들이 다시 세상에 나가 어울릴 수 있도록 교육받을 기회를 주는 마지막 공간이라고 본다. 그들이 출소하면 내가 탄 버스 옆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있지 않나.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고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 이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내 방식대로 표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