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들의 구루 네빌 브로디 Neville Brody
월간 <디자인>이 디자인 세미나 연사로 참여하는 이들을 미리 만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네빌 브로디다.
올해 12월 7일부터 11일까지 5일간 코엑스에서 개최되는 서울디자인페스티벌(SDF)에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들이 모인다. 네빌 브로디(Neville Brody), 파트리샤 우르키올라(Patricia Urquiola), 사토 다쿠(Satoh Daku), 조 나가사카(Jo Nagasaka) 등 이 시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디자인 세미나를 통해 만나게 되는 것. 월간 <디자인>이 디자인 세미나 연사로 참여하는 이들을 미리 만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네빌 브로디다. designfestival.co.kr
월간 <디자인>과는 세 번째 인터뷰다. 물론 당신의 근황이나 활동은 더 많이 소개되었다. 2001년 한국에 처음 온 이후 LG나 삼성, CJ제일제당 등과의 프로젝트, 타이포잔치 조직 위원, 최근의 국립한글박물관 ‘세종의 혁신과 타이포그래피’ 연사 참여 등을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어왔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에 대한 인상이 어떻게 변했나?
한국은 지금까지 약 40차례 방문한 것 같다. 일본과는 1990년부터 일했지만 한국과의 인연은 2001년 ‘제1회 타이포잔치: 서울타이포그라피 비엔날레’를 방문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와 친구인데, 그의 초대로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은 무척 흥미로운 나라다. 한국의 건축가들도 훌륭하고 제품 또한 우수하다. K-팝도 있지 않은가. 일본과 발전 방향이 비슷한 것 같지만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빠르다. 특히 기술 발달 측면에서 그렇다.
한국 기업과 많은 작업을 하며 느낀 점은 무엇인가?
한국 기업은 대부분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 기업과의 협업은 2004년 한국타이어 리브랜딩 프로젝트가 시작이었다. 글로벌 브랜드로 나아가기 위해 브랜딩을 새롭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가 제안한 시안에 굉장히 충격을 받더라.(웃음) 오렌지 컬러나 비상하는 날개의 비주얼이 그들이 생각한 전통적인 회사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삼성이나 LG, CJ 등과 프로젝트를 하며 느낀 건 한국만큼 기업이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미국 기업보다 더 디자인에 비중을 두는 것 같다. 현재 엄청난 동력으로 성장 중인 중국은 디자인의 중요성을 이제 이해하기 시작하는 단계다. 한국의 대기업은 대부분 디자인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눌 가능성이 더 많다는 의미다.
영국의 경우는 어떤가?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디자인 산업, 특히 교육계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영국의 디자인 회사나 학교에 다양한 인재가 유입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문화와 교육 환경이 변해간다는 사실이 매우 우울하다. 브렉시트는 일종의 흑백 논리 같다. 하지만 세상을 흑백으로만 나누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가 많다. 지금은 뭔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2011년부터 영국 왕립예술학교 커뮤니케이션 아트 학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전에 한 인터뷰에서 ‘디자인에서도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라고 말한 바 있다. 디자인은 결국 소통의 방법이다. 이를 위한 디자인 교육은 어떤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누가 가르치는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실패할 가능성을 충분히 만들어주어야 한다. 학생 스스로 그 과정을 경험하고 진로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 학생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나도 그랬으니까.(웃음) 원래 교육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벗어날 수 없다. 학생은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RCA 역시 이런 환경을 위한 토대를 만들고자 하며 한국에서는 안상수가 만든 대안 디자인 학교 파티(PaTI)를 통해서도 이런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느꼈다.
파티의 어떤 교육 방식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나?
파티에서는 디자인하는 환경과 방법을 고민한다. 디자인을 하는 데 도구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도구를 동원할 수도 있다. RCA와 파티가 1년에 한 번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제를 던져주고 아이디어 도출부터 제품 개발, 프레젠테이션까지 하게 되어 있다. 일주일 정도 진행하는데, 그래픽 디자이너가 영상을 만들기도 하고 사운드 디자인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프레젠테이션은 주제나 디자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 앞에서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정보까지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고 속임수를 쓸 수도 없으니까.
한국의 디자이너나 디자인 스튜디오가 해외로 진출하거나 좀 더 글로벌화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뭘까?
사실 잘 모르겠다. 한국의 디자이너들이나 학생들은 수줍은 것 같으면서도 무척 실험적이고 과감한 성향을 보인다. RCA 출신인 디자이너 권준호(일상의 실천)와 같은 훌륭한 인재가 많다. 결국 문화가 중요한 것 아닐까? 디자이너들이 뿌리를 잘 내리고 자랄 수 있게 하는 토양 말이다.
당신은 애플의 매킨토시를 사용한 초창기 디자이너이고, 데스크톱으로 실험적 시도를 하기도 했다. 현재는 그보다 더 다양하고 또 새로운 도구가 생겼고, 그 때문에 디자이너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이제 전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이론을 공부하고 연습하면 어느 정도 전문 수준을 갖출 수 있었지만 이제 디자인을 위한 수단이 많아졌고 코딩, 사운드 등 디자이너가 고려해야 할 환경과 조건이 더욱 다양해졌다. 그래픽 디자인도 이전에는 인쇄 매체가 전부가 아니었나. 그래픽 디자인은 마치 건축이나 순수 예술 같기도 하다. 그래픽 디자인을 기반으로 서비스 디자인이나 제품 디자인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우리는 동시다발적으로 복잡한 디자인을 수행해야 한다.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다. 다들 비슷한 교육을 받고, 같은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우리에게는 복잡성, 혼동, 지역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가 단순하고 평범해질 것이다. 자연은 다양성 속에서 성장하는 거니까. 나를 포함해 디자이너들은 이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인쇄 매체인 잡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당신도 <더 페이스>를 통해 그래픽 디자인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이제 잡지는 디지털로 그 전달 수단이 변화하고 있고 이에 따라 디자인 방식도 많이 바뀌고 있다.
나는 여전히 종이 잡지를 사랑한다. 종이 잡지나 책 등 인쇄 출판물이라 하는 모든 것은 소비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마치 내가 원하는 오브제를 사는 것과 같다. 종이가 지닌 물성을 느끼는 것만큼 소중한 경험은 없다. 이는 우리를 집중하게 만들고 생각과 마음에 지속적인 숲을 만들어준다. 넘길 수 있고 돌돌 말 수 있으며 또 가지고 다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해 온라인 매거진은 속도감은 있을지 몰라도 깊이를 느낄 수가 없다. 일단 온라인에서 사람들은 길이가 긴 기사를 읽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최근 영국 사람들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고무적이다. 한때 태블릿이나 모바일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출판이 시장을 전부 차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하지만 우리가 모바일이나 온라인이라는 수단을 외면할 수는 없다. 디지털이나 모바일 시장은 분명히 상당 부분 종이 책 시장을 넘어서고 있고 소비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잡지 디자인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사실 20년 전만 해도 디지털 경험은 마치 우리 생활을 완전히 바꿀 대단한 혁신과 진화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보면 디지털이나 온라인은 우리 삶을 바꾸는 문화가 아니다. 도구 혹은 서비스에 그친다. 나 역시 휴대전화로 뉴스를 본다. 하지만 단편적인 정보의 역할일 뿐이다.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는 디자인도 사실 디자인이라기보다는 단편적인 구조물 같다. 쇼핑 카탈로그 같기도 하고 매우 지루하다. 지금의 상황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
우리의 책임은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를 만들고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디자인 자체가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 어떤 경험이나 콘텐츠를 제공할 것인가라는 의미다. AR, VR을 이용할 수도 있고 목소리나 오디오를 이용할 수도 있다. 목소리나 오디오에 대해 말하자면, 몇몇 글로벌 회사는 스크린 시대가 끝나고 목소리와 제스처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미 다양한 보이스 테크놀로지가 개발 중에 있다.
최근 삼성 전용 서체인 삼성원(SamsungOne)을 개발했다. 삼성 계열사, 온·오프라인에 사용하는 모든 서체를 통일하는 큰 프로젝트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제품, 프린트를 비롯해 스크린, 명함에 이르기까지 그 적용 범위도 방대했다. 삼성은 계열사가 굉장히 많고 각자가 각기 다른 분야에서 다른 규모로 움직인다. 이전에는 계열사마다 다른 서체를 사용했다. 각자가 독립적으로 강력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삼성이라는 브랜드 측면에서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 힘들었다. ‘원(One)’은 하나로 통합된 삼성의 이미지와 경험 언어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삼성은 모바일부터 TV, 가전제품, 영상물에서 인쇄물, 옥외광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과 플랫폼에서 동일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크기였다. 대형 스크린부터 명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이즈에서 명확하고 그 정체성이 드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라틴어 버전 서체와 디자인 특성을 분리한 후 전문가들과 협력해 이러한 스타일의 단서를 결합한 현지화된 스크립트를 만들었다. ‘삼성원’은 26개 표기 체계, 400개 이상의 언어, 2만 5000개 이상의 글자로 구성된 글로벌 서체라 할 수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일이야말로 성공의 열쇠이자 시작이다. 이를 위한 서체나 브랜딩에는 무엇이 담겨 있어야 할까?
문화가 이렇게 단편적인 세상에서는 늘 어려운 과제다.(웃음) 하지만 이전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라면 하나의 서체나 브랜딩에는 DNA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폰트를 만드는 건 하나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감성적인 동시에 기능적이어야 한다. 사실 이전에는 컬러나 아이콘, 외형 등 물리적 요소만 생각하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많은 브랜드들이 스토리텔링에 집중하고 있다. 잡지도 그렇지 않은가. 종이에 글과 이미지로 이야기를 담는 것이다. 도구는 달라지겠지만 개성, 가치, 목소리 이런 가치를 담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서체나 브랜딩이 더욱 중요해진다.
당신은 인쇄 매체에서 디지털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시대 변화를 거치며 여전히 굳건한 그래픽 디자이너로 자리하고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 어디로 가고 싶은가?
1920년대 초반의 시대로 가보고 싶다. 러시아 미술가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 엘 리시츠키(El Lissitsky)를 비롯해 다다이스트(Dadaists)와 미래파의 하나로 소용돌이로 그림을 구성하는 소용돌이파들(Vorticists)을 만나보고 싶다.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2017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세미나의 큰 주제는 오리지낼리티다. 그 안에서 당신이 들려줄 이야기를 살짝 언급해줄 수 있나?
오리지낼리티는 상황이나 문화에 대한 독립적인 생각이다. 이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 반복적인 학습과 수정을 거치며 기본을 단단히 쌓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모두 결국 자신의 오리지낼리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