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중국의 디자인 기수 네리앤드후(Neri&Hu)

네리앤드후는 이를 불과 10여 년 만에 이뤄내며 중국 건축·디자인계의 기수가 되었고, 우리는 이들을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새로운 중국의 디자인 기수 네리앤드후(Neri&Hu)
로사나 후(왼쪽)과 린든 네리. ⒸZhu Hai
부부이자 동업자인 린든 네리(Lyndon Neri)와 로사나 후(Rossana Hu)는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한 후 네리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과정을, 후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건축 및 도시계획 석사과정을 마쳤다. 2004년 상하이에 네리앤드후 디자인 & 리서치 오피스를 공동 설립했으며 런던에도 지사를 두고 있다. 호텔, 미술관, 영화관, 복합 문화 공간에 이르는 다양한 건축·인테리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스텔라 웍스(Stellar Works)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으며 무이(Moooi), BD 바르셀로나(Barcelona) 등을 통해 가구와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엘르 데코 인터내셔널 디자인 어워드 올해의 디자이너(2017) , 독일 디자인 협회의 아이코닉 어워드 올해의 인테리어 디자이너(2017), 메종 & 오브제 올해의 아시아 디자이너(2015), <월페이퍼> 선정 올해의 디자이너(2014) 등에 이름을 올렸다. www.neriandhu.com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 되어가고 있는 중국은 디자인 또한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서구의 교육을 받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중심축이 되어 오랜 역사와 전통, 문화라는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스타일을 발현하고 있는 것. 그중에서도 네리앤드후(Neri & Hu)는 중국의 전통도 아닌, 그렇다고 서구 스타일도 아닌 그들만의 분명한 정체성을 확립한 건축·디자인 듀오다. 오래된 공간에서 드러나는 모던함, 미니멀한 웅장함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의 대비, 공간에 황동이나 스틸, 돌, 나무 등의 소재를 과감하게 사용하는 믹스매치는 딱히 어떤 스타일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확실한 건 이들의 작품은 동서양의 소스와 문화가 뒤섞인 오늘날의 중국이 그 혼재된 시기를 거쳐 어떻게 정제되어가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네리앤드후는 이를 불과 10여 년 만에 이뤄내며 중국 건축·디자인계의 기수가 되었고, 우리는 이들을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2016). 황금빛 브라스 울타리가 공간 전체로 이어지며 외부의 빛에 따라 드라마틱한 무드를 내뿜는다. ⒸPedro Pegenaute
린든 네리는 필리핀, 로사나 후는 대만 출신이다. 둘 다 미국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중국과 영국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문화와 교육적 배경이 네리앤드후의 작품에 어떻게 투사되고 있다고 생각하나?

네리 로사나의 부친은 상하이, 모친은 타이완 태생이다. 로사나는 중국령인 대만에서 자랐고 나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필리핀 지역에서 자랐다. 두 사람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의 여러 건축 스튜디오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상하이에서 13년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중요한 건 우리만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살았고, 중국에서는 해외에서 교육받은 중국인이라는 묘한 위치에 있다. 아마 이런 점이 디자인에서 새로운 접근이 가능한 이유가 아닐까? 우리는 스타일이나 건축 자체보다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건축이나 공간의 단 한 가지 핵심에 집중한다. 그 핵심을 찾고, 또 어떻게 프로젝트에 구현할지를 생각한다.

네리앤드후 디자인 & 리서치 오피스는 국적이 서로 다른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다. 일부러 의도한 것인가?

후 다국적 직원으로 구성한다는 원칙은 없다. 워낙 많은 나라에서 지원서가 오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다양성은 우리의 엄청난 자산이기도 하다. 다양한 문화적 접근과 이해는 특정한 잣대나 경계 자체를 허물어버린다. 그런 요소가 우리의 프로젝트에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리퍼블릭 디자인 코뮌(2012). 1910년에 지어진 경찰 본부 건물을 레노베이션했다. 커뮤니티·상업 공간. 디자인 갤러리와 카페, 패션과 인테리어 숍 등이 들어서 있다. ⒸPedro Pegenaute
두 사람은 미국에서 같은 학교를 다녔고 마이클 그레이브의 건축 스튜디오에서도 함께 일했다. 정말 오랜 인연이다.

네리 로사나가 1학년일 때 내가 4학년이었다. 1년 정도 함께 다닌 셈이다. 로사나가 프린스턴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이클 그레이브 건축 스튜디오에 입사했는데 한 번도 같은 팀이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둘 다 언젠가 함께 일할 것임을 예상했다. 사실 많은 건축가가 부부가 되어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아마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함께 일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웃음) 나는 일과 개인 생활을 항상 공유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여행을 가더라도 우리는 항상 일에 영감을 줄 수 있는 대상만 찾아다닌다. 디자인 그리고 일과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오간다.

구체적으로 두 사람의 성향이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하다. 한 인터뷰에서 ‘린든은 시각적이고 로사나는 이론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후 린든은 콘셉트 도출에 능하고 클라이언트의 다양한 성향을 잘 조율한다. 나는 콘셉트를 바탕으로 실제를 구현하는 과정에 좀 더 특화되어 있고, 이를 스케치보다는 단어나 생각을 통해 구체화하는 편이다. 서로를 잘 보완해준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둘 다 보는 관점이 비슷해서 프로젝트의 주제나 콘셉트 도출 과정에서 의견이 잘 맞는다.

국내에서 ‘네리앤드후’라는 이름은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를 통해 더욱 알려졌다. ‘랜턴(Lantern)’이라는 콘셉트가 건축과 공간에 일관되게 구현되었다.

후 아시아 문화에서는 ‘등불’이 문학적, 신화적인 의미가 있다. 등불은 어둠 속에서 이정표가 되며 길이 되기도 한다. 설화수가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뷰티 브랜드로서 적절한 콘셉트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시아 문화와 전통을 연결해보고 싶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설화수의 철학과 아시아인의 지혜를 발견하기를 바랐다.

황금빛 브라스나 나무, 돌 같은 소재를 많이 사용하는 네리앤드후의 특성이 잘 드러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여러 요소가 압도적인 동시에 마치 다채로운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듯한 풍성한 공간감이 인상적이었다.

네리 황동이 공간 전체의 핵심적인 요소였고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공간을 유영하도록 길잡이가 되어준다. 공간은 딱 세 가지, ‘정체성’, ‘여행’, ‘기억’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출발했다. 공간에 들어서기 전, 문 앞에서부터 문 밖으로 나온 이후에도 이 세 가지 감정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그 때문에 지속적으로 황동 구조물을 공간에 노출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드라마틱한 대비가 느껴지는 공간에서 제품이 공간과 자연스럽게 뒤섞여 조화를 이뤘다.

네리 그 점이 우리의 일관된 콘셉트였다. 동시에 방문객들은 각 층마다 서로 다른 무드의 공간을 만나게 된다. 외관은 물론 내부의 지하에서 옥탑에 이르기까지 건물은 두 가지 대비로 이어진다. 닫힘과 열림, 어두움과 밝음, 세밀함과 거대함과 같은 요소가 주는 드라마틱한 감정이 있다. 어두운 벽돌과 회색빛 스톤, 따뜻한 우드 바닥을 설치한 지하의 스파 공간은 친밀감을 주는 동시에 휴식처와 같은 편안함을 준다.

네리앤드후의 건축물에서는 건물이 가진 특정한 물성을 최대한 살리려는 경향이 보인다. 한 소재만 강조하고 다른 요소는 최소화하는 느낌도 있다. 이는 마치 갤러리 혹은 그림 속의 한 풍경 같다는 생각도 든다. 꼼꼼히 살펴보면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공간임에도 여백과 여유,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런 결과는 어떤 프로세스를 통해 나오는지 궁금하다.

후 건축이 세워질 환경과 공간, 소재, 이를 적용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연구를 한다. 우리 스튜디오 이름에 ‘리서치’가 들어간 것은 이런 이유다. 학제 · 문화 간 다방면의 연구 또한 디자인 프로세스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외형이나 구조 자체보다 그것에 어떤 의미를 담아낼지에 주목하면서 일한다. 마치 장인의 손을 거친 재료가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작품으로 탄생하듯,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이 걸러지고 가장 중요한 에센스만 남는다.

특별히 런던에 지사를 설립한 이유가 있나?

후 런던에서 열린 경쟁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선정되었는데, 여기에는 런던에 사무실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후 몇 년간 유럽에서도 많은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왔다. 동양과 서양에 모두 사무실이 있다는 점은 특히 아시아 프로젝트를 계획하는 서구의 클라이언트들에게도 문화적, 지역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델 라 에스파다, 무이, 클래시콘, 스텔라 웍스, BD 바르셀로나 등 여러 해외 브랜드와 협업하며 가구와 제품을 출시했다. 이 외에도 그래픽과 편집 디자인 등 다양한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건축가에게 이런 확장은 어떤 의미가 있나?

네리 앞서 말했듯 우리가 자라온 배경도 그렇거니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모든 프로젝트가 서로 얽히고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우리는 디자인을 큰 기둥으로 삼는다. 이는 프로젝트를 위한 모든 개념과 관념, 아이디어를 말한다. 물론 건축은 우리가 진행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근간이 되고 그래서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디자인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가구나 그래픽, 편집과 같은 여러 영역이 결코 다른 범주가 아니다. 이런 다양한 영역의 프로젝트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풍성한 문화적 번영처럼 우리에게 다양한 디자인 소스로 영향을 준다.

아르네 야콥센의 7체어를 재해석한 투게더 체어(Together Chair, 프리츠 한센). 사진제공: 네리앤드후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서 두 사람을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후 그 부분은 우리 둘이 무척 다른데, 내 생각에 린든은 건축가로 태어난 것 같다. 그에 비해 나는 10대 시절부터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왔다. 물론 오래지 않아 내가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웠고 부모님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부모님은 늘 나에게 “뭐 먹고살래?”라는 질문을 했으니까. 나는 아카데믹하고 연구자적인 성향이 강해서 사실 법학이나 엔지니어링을 배울 생각도 했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이었던 것 같다. 네리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듣고 걷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고 다녔다. 그래서 건축과 디자인을 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자연스럽다. 다른 길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전형적인 아시아계 집안이다. 내가 자란 환경 역시 예술 하는 자녀를 달가워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공부하러 혼자 미국에 갔을 때 사실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내 꿈을 말할 용기가 없었다. 대학을 다니던 첫 2년 동안 순수 예술을 전공했다는 사실조차 숨겼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미국에 직접 와서 내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시겠다고 하는 거다. 결국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곧 인정해주셨다. 그 당시(1980년대의 미국)가 한창 부동산 붐이 일어날 때였는데 아버지는 건축을 부동산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마 아들이 건축을 공부하면 돈을 많이 벌 거라고 기대하셨는지도 모르겠다.(웃음)

교회, 호텔,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작은 음식점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앞으로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다면?

후 학교 건축과 공간을 맡아보고 싶다. 학교는 한 사람의 세계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뉴 상하이 극장(2016). 내부는 돌의 물성과 벽면의 브론즈가 대비를 이룬다. 벽체의 구멍은 빛을 통해 공간의 무드를 다양하게 만든다. ⒸPedro Pegenaute
이번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세미나에는 린든만 방문할 것이라고 들었다.

네리 한국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고, 때문에 스케줄이 가능한 한 사람이라도 참석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결정했다. 같은 아시아 지역의 건축가, 디자이너 선후배들과 통하는 점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서양 중심인 디자인 세계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디자이너로서 한국의 디자이너와 느끼는 비슷한 감정이 있을 것 같다. 아시아 디자이너의 입지나 방향성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도 궁금하다.

후 이제는 아시아가 지닌 다변적인 매력이 드러날 차례라고 생각한다. 많이들 하는 이야기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의 전통적 문화와 스타일에 서양의 교육과 문화를 흡수해왔고, 이를 통해 다른 크리에이티브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는 중국이라는 나라 혹은 중국인에 대한 편견을 고스란히 겪기도 했다. 지금이 과도기가 아닐까 싶다. 그것이 우리가 더욱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473호(2017.11)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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