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레코드 이재민
이재민에게 수집은 삶의 태도다. 느슨하지만 부지런하고, 시시콜콜하면서도 몸과 마음을 울리는 묵직한 힘을 갖고 있다. 그가 매일 레코드를 듣고 정리하는 공간은 값비싼 장비를 갖춘 음악 감상실이 아닌, 일상적 헐렁함이 묻어나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이재민에게 수집은 삶의 태도다. 느슨하지만 부지런하고, 시시콜콜하면서도 몸과 마음을 울리는 묵직한 힘을 갖고 있다. 그가 매일 레코드를 듣고 정리하는 공간은 값비싼 장비를 갖춘 음악 감상실이 아닌, 일상적 헐렁함이 묻어나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1950~1960년대 재즈를 들으며 당시 제작자가 의도한 사운드와 디자인을 가늠해보고, 스스로 디자인하고 있는 것들이 몇십 년 뒤 어떻게 될 것인지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한다. 사물에 대한 그의 애정 어린 기록은 일과 삶을 관통해 그의 레코드와 함께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이재민
그래픽 디자이너. 서울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했다. 2006년에 설립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fnt를 기반으로 여러 분야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극단의 문화 행사나 공연을 위한 작업을 했으며 타이포잔치 2021: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거북이와 두루미〉의 총감독을 맡았다. 〈성불사의 밤〉(맹원식과 그의 째즈 오케스트라), 〈의례〉(김성배), 〈시티 브리즈〉(박재범/기린), 〈지니〉(이재민) 등의 음반 커버 아트워크를 디자인했다. 서울레코드페어의 그래픽을 총괄하며, 재즈를 즐겨 듣는 세 고양이의 아빠이기도 하다.
아카이브의 기본은 정리다. 이재민의 정리법이 궁금하다.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많이 활용한다. 너무 자주 들여다봐서 내가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물건이 있는 한편, 여러 버전을 이미 갖고 있는데 또 구입하는 물건도 있다. 갖고 있는 것과 갖고 싶은 것,앞으로 갖게 될 것을 머릿속에 줄줄이 꿰고 있을 수 없으니 나름의 인덱스를 갖춰놓는다. 집요하게 모으는 특정 뮤지션에 별도의 색인을 표시하고, 블루노트 같은 레이블은 따로 시트를 정리하기도 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눈에 담으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는 반드시 사진을 찍는 편이다. 사진을 색인으로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갈 수 있으니까. 꼭 구글 스프레드시트가 아니더라도, 모바일로 접근 가능한 각자만의 색인과 검색 방법을 갖추면 전 세계 어디에서든 물건을 구입할 때 편리하다. 참고로 개인이 운영하는 숍에서 시세를 검색해보는 행위는 레코드를 함부로 만지는 것 못지않게 비매너다.
디지털 음원으로 음악을 들으면서도 레코드를 사고 모으는 문화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물리적으로 음반을 소장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레코드를 굳이 사는 이유는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이 탄생한 바로 그 시대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창작자와 제작자가 만든 결과물에는 늘 의도가 담겨 있다. 만약 내가 2023년에 디자인한 포스터를 50년 뒤 어느 책에서 소개하는데 나의 의도와 거리가 먼 크기, 색상, 재질의 리프린트가 게재된다면 어떨까. 이 책의 독자는 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바이닐도 마찬가지다. 디자이너가 12인치 LP를 처음 만들었을 땐 이것을 축소한 CD나 재발매한 바이닐이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오리지널 판을 무조건 고집하진 않지만 뭐든 원작자의 의도에 가까울수록 좋다. 그 원형을 찾아가는 과정도 즐겁고. 뮤지션이 활동을 중단하고, 프로듀서가 죽고, 이렇게 시대가 흘러간 뒤 복각한 앨범은 매체환경의변화로인해어쩔수없이원작자의 의도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피겨나 신발을 모으는 사람들이 수집품의 진본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관용과 장식용을 각각 구입하는 것도 이런 맥락 아닐까? 물론 실질적인 효용을 따져봐도 음반 소장은 가치가 있다. 스트리밍으로 들은음악은곡도,트랙순서도잘기억나지 않는다. 서비스에 지불한 것이지 앨범에 돈을 쓴 게 아니기에 더 그렇다.어떤 트랙이 A면 혹은 B면에 속해 있는지 확인하고, 바늘을 올리고, 판을 뒤집는 행위는 음악의 소화력을 길러준다. ‘내 것’으로 확실히 인증한 느낌이 든달까? 나는 음악에도 공간성이 있다고 믿는다.
레코드의 속성을 시각화한 서울레코드페어 아이덴티티 디자인. 매년 동그란 형태를 변주하지만 정체성은 일관된 톤으로 이어진다.
컬렉터로서 원칙과 노하우가 있다면?
근면함이다. 늘 위시 리스트가 있다. 디스콕스 같은 데일리 북마크도 있다. 양치하고 출근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웹사이트를 들여다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니까. 굉장히 바쁘다. 해외여행 다닐 땐 그야말로 체력전이다. 물건을 많이 사는 사람을 독특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 세상에는 눈에 불을 켜고 물건을 사는 사람이 정말 많다. 수집의 세계에는 내가 지금 이것을 안 사면 다른 사람이 바로 가져가는, 어떤 냉엄함이 있다. 결단성이 중요하다. 살면서 언젠가 구입할 물건이라면 오늘이 제일 싸다. 이 법칙을 생각하며 스스로 질문한다. 내 인생에 이게 없어도 괜찮을까? 이걸 내가 꼭 사야 하나? 만약 사야 한다면 지금이 가장 적시 아닐까? 그나마 요즘엔 웹사이트에서 물건을 사고파는데 그 옛날 할아버지들은 대체 어떻게 많은 물건을 모았는지, 정말 대단하다.
서울레코드페어 그래픽 총괄, 음반 가이드북 〈도쿄 레코드 100〉 디자인, 9와 숫자들 음반 디자인, 그 외 다수의 음반 및 공연 포스터 디자인까지. 이재민은 한국 인디 음악 신에서 꼭 필요한 디자이너다.
서울레코드페어와 이재민은 사실상 같이 커왔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LP에 대한 저변이 지금처럼 넓지 않았을 때, 서울레코드페어는 맨땅에 헤딩하듯 흙밭의 돌멩이를 하나하나 걸러가면서 밭을 일궜다. 이런 결연함을 지켜보며 서울레코드페어의 아이덴티티가 한목소리로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글에 서울레코드페어를 검색하면 일관된 톤의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레코드의 동그란 형태를 매년 변주했는데 궁극적으로는 ‘모던 디자인의 재현’을 의도했다. 여기에 약간의 동시대성을 더했달까? 레코드라는 매체의 속성도 그렇지 않나.이제는 나이를 꽤 먹은,역사가 있는 저장 매체인데, 다 죽을 뻔했다가 동시대성을 확보하면서 사람들이 향유하는 문화가 되었다. 음악과 관련된 일은 나에게 친정집 같은 존재다. 힙노시스의 앨범 아트워크를 보며 대중문화에서 아름다운 존재감을 발견하던 게 나에게는 시각 디자인의 시작이었으니까. 음악 관련 작업을 많이 하는 것은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넋업샨의 정규 1집 〈Not Really Now Not Anymore〉 음반 아트워크 디자인.(좌)
스튜디오360 경음악단과 시몬스의 협업 앨범 〈Midnite Relaxation〉 아트워크 디자인.(우)
이재민에게 수집이란?
사랑의 징표다. 수집을 남다른 취향에서 비롯된 무언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겐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화 과정이다. 다른 창작자들이 그렇듯 디자이너도 관찰하고 배우고 흡수하는 과정을 거치며 무언가를 만든다. 인풋 없이 아웃풋을 산출하기 힘들다. 너무나 당연하게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수집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디자인을 추구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그때마다 ‘누군가의 서랍 속에 보관될 물건을 만들고 싶다’고 답하곤 한다. 나의 수집도 이 대답과 맞닿아 있다.다만 직업이 디자이너인 만큼 미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수집품을 선호한다. 살짝 거창하게 접근하자면 수집은 역사를 손에 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1950~1960년대의 재즈 음반도 결국 하나의 모던 문화유산 아닌가. 누군가 알아봐주면 좋고, 함께 향유할 때 소중함을 느낀다. 나에게 수집은 무언가를 공들여 만든 과정과 결과물에 대한 존중이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기에 어떤 쓸모나 목적보다 태도가 중요하다.
“내게 수집은 사랑의 징표다. 무언가를 공들여 만든 과정과 결과물에 대한 존중이다. 사물의 본질은 의외로 시시콜콜함에 담겨 있다.”
이재민
음반과 관련한 기록 50여 편을 모은 책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
그래서일까. 아주 오래된 레코드 컬렉터임에도 수집가보다 애호가의 면모가 돋보인다.
인간이 수집에 함몰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건을 소유하는 개인의 자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상태의 수집은 선호하지 않는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집 이야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좁은 땅에서 무언가를 사고 모은다는 것은 지극히 한정적인 일이다. 수집은 결국 큐레이션으로 귀결된다. 고르지 않고 다 사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가볍게 즐기더라도 개인의 기호와 취향이 반영된 컬렉션이 좋다.
2018년에는 워크룸 프레스에서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이라는 책을 냈다. 단순히 수집하는 것과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분명 큰 차이가 있을 테다. 지금껏 모아온 레코드를 또 어떻게 체계화하고 기록할 계획인가?
어느 날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이라는 해시태그로 음반 사진과 짤막한 감상, 소개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다. 1~2주에 한 번씩 업로드한 게시물을 본 워크룸 프레스의 김형진 실장이 단행본을 제안해 출간까지 이어졌다. 글쓰기가 본업이 아니다 보니 마감에 맞춰 각 잡고 무언가를 쓰는 것은 힘들지만 조금씩 오랫동안 써온 글을 추려서 책을 만들면 부담도 없고, 더 의미가 있다. 앞으로도 이 정도의 여지를 가볍게 열어두고 싶다. 개인적으로 오랜 기록을 글로 엮은 책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잡지의 한 꼭지를 몇 년간 맡은 사람의 글을 모으고 추려서 출간한 단행본 같은 거. 오랜 기간 일정 시간을 꾸준히 할애해 무언가를 모은 결과물은 대체로 늘 좋았다. 나의 수집도 그렇다. 사물의 본질은 의외로 시시콜콜함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