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한 포르마 판타스마 (Forma Fantasma)
포르마 판타스마는 하이엔드 럭셔리 브랜드가 앞다투어 찾는 디자이너지만 최근 이들의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철학과 인류학을 토대로 한 광범위한 연구로 시작해 미술관에서의 전시로 끝을 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만 해도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뮤지엄Rijksmuseum, 필라델피아 아트 뮤지엄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필립 스탁, 재스퍼 모리슨, 마르셀 반더스 등 기존에도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 유명...
포르마 판타스마는 하이엔드 럭셔리 브랜드가 앞다투어 찾는 디자이너지만 최근 이들의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철학과 인류학을 토대로 한 광범위한 연구로 시작해 미술관에서의 전시로 끝을 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만 해도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뮤지엄Rijksmuseum, 필라델피아 아트 뮤지엄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필립 스탁, 재스퍼 모리슨, 마르셀 반더스 등 기존에도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 유명 디자이너들이 많았지만 마치 큐레이터처럼 전시의 기획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디자인사에서 급진적 발전을 이룬 1960년대와 달리 지금은 제품 디자인에서 혁신을 이루기 쉽지 않다. 앉는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왜 새로운 의자를 디자인해야 하는가? 매일 새롭게 등장하는 수많은 제품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나?” 이것이 지금 그들의 고민이다. ‘포르마forma’는 이탈리아어로 ‘형태’를, ‘판타스마fantasma’는 스페인어로 ‘유령, 환영’을 뜻한다. ‘잡히지 않는 환영을 좇는 이들’이라 해석하면 될까. 환영을 좇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날렵한 사냥꾼에 가깝다. 결과물은 언뜻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보이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서늘하게 날이 서 있고 당장의 실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018년 4월 호주 빅토리아 국립 갤러리에서 열린 〈오레 스트림스〉는 포르마 판타스마의 성장을 만방에 알린 전시였다. 금속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전시로, 전자 폐기물의 시간을 추적한 이들은 그 결과물로 사무용 가구 컬렉션을 내놓았다. 전자 폐기물의 70% 이상이 개발 도상국으로 불법 운송되어 열악한 작업 조건에서 분해되는 현실에 주목해 태국의 공장을 오가며 작업했다고. “우리가 만든 오브제들은 트로이의 목마와 같다. 적(대중)을 교란시키기 위해 우리는 일견 매끈해 보이는 사무용 가구를 만들었다. 〈오레 스트림스〉는 ‘지상 위의 채굴’에 대한 문제 제기이자 탐구의 시작이다.” 포르마 판타스마의 작업에는 특정 지역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특정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이들의 주요 이슈 중 하나로, 세계화로 비슷한 취향과 문화를 공유하지만 특정 지역의 역사성은 언제나 새로운 영감의 대상이 된다. 2019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디젝Dzek과의 협업 역시 지역의 역사성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전시에서 시칠리아 에트나Etna산에서 채취한 화산재로 만든 타일을 선보였는데, 이는 포르마 판타스마가 2010년부터 연구한 소재다. 늘 실험적인 소재를 찾고 전통성과 지역 문화 사이의 관계를 탐험하는 포르마 판타스마는 행동하는 디자이너야말로 현대 디자이너의 미덕이라 말한다. “미래에 우리가 꿈꾸는 것은 우리의 아이디어가 기존보다 급진적radical인 방향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20세기 들어 수염을 기르는 행위는 저항의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체 게바라, 카를 마르크스, 반전을 외친 히피족 등이 그랬듯, 포르마 판타스마도 길게 콧수염을 기른다.
2009년 안드레아
트리마르키Andrea Trimarchi(1983년생, 인물 사진 왼쪽)와 시모네 파레신Simone Farresin(1980년생)이 설립한 디자인 스튜디오. 각각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 출신의 두 남자는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에서 석사과정 중 공통의 연구 과제를 진행하며 만났다. 펜디, 막스마라, 에르메스, 렉서스, 플로스 등과 협업했으며 뉴욕 MoMA, 런던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파리 퐁피두 센터 등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formafantasma.com
그곳은 현재 어떤 상황인가?
암스테르담에 취해진 봉쇄 조치는 산책하는 것도 여의치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아진 고요의 시간을 즐겼다. 일하는 방식 또한 재고했다. 여행과 출장에 드는 예산을 줄였고, 이동하지 않음으로써 지구에 오염을 야기하는 비행을 피할 수 있었다. 피해가 큰 도시였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어떤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변화는 결국 서로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총력을 따로 또 같이 기울일 때 가능하다.
가장 최근에 진행한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목재 산업의 거버넌스, 통치 방식을 들여다보는 개인전을 기획했다. ‘캄비오’는 중세 라틴어로 ‘변화, 교환’을 의미한다. 변화하기에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우리는 이내 깨달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디자이너가 무엇을 제시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은 과학자, 정책 결정자, 철학자들과의 대화에서 도출되었다.
비대면 시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이에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어쩌면 팬데믹은 지구라는 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모든 인간에게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우리는 생태와 지속 가능성이라는 용어를 아낀다. 현재 지속 가능성은 마케팅에서 무책임한 생산 공정을 무마하는 데 사용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지속 가능성에서 유토피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글 김만나 기자
〈오레 스트림스Ore Streams〉, 2017~2019
‘오레 스트림스’는 우리말로 ‘광석의 일생’ 정도로 해석된다. 호주 국립 미술관과 밀라노 트리엔날레가 포르마 판타스마에게 전자 폐기물의 재활용 프로젝트를 의뢰했고, 3년간 진행한 결과로 사무용 가구 컬렉션을 선보였다. 쓸모를 다한 휴대폰, 오래된 컴퓨터, 전자레인지 등이 포르마 판타스마의 손을 거쳐 파스텔 톤의 캐비닛, 테이블, 선반, 의자로 환생했다. 7개의 컴퓨터 본체로 쌓아 올린 타워는 캐비닛으로, 노트북 케이스는 기능적인 의자로 변신했는데 매끈하게 코팅된 가구는 독창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선진국의 금속 폐기물 70% 이상이 개발 도상국으로 옮겨가는 현실에 주목한 그들은 2년간 태국의 금속 재활용 공장을 오가며 작업했고, 이 과정 또한 비디오와 애니메이션으로 발표했다.
〈캄비오Cambio〉, 2020
19세기 열강들은 식민지의 산림 채벌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때부터 이어진 목재 산업은 하나의 경제 권력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분별한 벌목으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지만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현상에 주목한 전시다. 포르마 판타스마는 광범위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지구와 인간, 나무에 대한 한 편의 대서사시와 같은 전시를 지난 3월 4일부터 5월 17일까지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선보였다. 1851년에 발견한 희귀 목재 샘플에서부터 2018년 이탈리아 북부의 폭풍우로 쓰러진 나무 조각까지 전 세계에서 수집한 나무 오브제는 그 자체로 지구의 기후변화를 담고 있다. 전시의 중심 공간에서는 포르마 판타스마가 제작한 두 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과학자, 보존학자, 생태학자, 공학자, 정책 결정자, 철학자들과 진행한 인터뷰와 함께 지구상에 원시 식물이 출현한 시점부터 목재 채벌 이후 번영을 이룬 과정을 세밀하게 조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