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의 동시대성, 이퀼리브리엄구찌의 동시대성,

전 지구적 전염병으로 세상이 멈춘 지난 봄, 우리 모두 너무나 미약하고 취약한 존재라는 점을 실감했다. 그때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몇 달에 걸쳐 적은 일기를 공개했다. 지금까지의 쉼 없는 창작 활동이 자연스럽고 즐거운 것이라고 여겼지만, 너무나 격렬했고 지나치게 교활했다는 깨달음을 담은 기록이었다. 또 우리는 선을 넘었으며, 이제는 각자 역할에 따라 공동체에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패션에 대한...

구찌의 동시대성, 이퀼리브리엄구찌의 동시대성,
〈차임 진Chime Zin〉 0호. 젠더 바이너리를 주제로 작업하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알록 바이드메논Alok Vaid-Menon의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 이우경
〈차임 진〉 1호. 브라질 출신의 예술 치료사이자 여성과 성 소수자 운동을 전개하는 게이브 파사렐리Gabe Passareli. 사진 제공 구찌 / ©Courtesy of Gucci

전 지구적 전염병으로 세상이 멈춘 지난 봄, 우리 모두 너무나 미약하고 취약한 존재라는 점을 실감했다. 그때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몇 달에 걸쳐 적은 일기를 공개했다. 지금까지의 쉼 없는 창작 활동이 자연스럽고 즐거운 것이라고 여겼지만, 너무나 격렬했고 지나치게 교활했다는 깨달음을 담은 기록이었다. 또 우리는 선을 넘었으며, 이제는 각자 역할에 따라 공동체에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패션에 대한 동기를 다시 생각하면서 불필요한 것은 없애고 본질을 정화해야 한다고 썼다. 특히 창조성을 위협할 정도인 마감 시간에서 벗어나 더 나은 패션을 위해 과감한 변화를 감행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크루즈, 프리폴, S/S, F/W 시즌 등을 없애고 더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이 변화는 구찌의 동시대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구찌의 미학 안에 포함된 윤리적 책임과 실천이다. 구찌는 오래전부터 지속 가능한 패션을 모색해왔다. 또 성 평등을 장려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메시지를 꾸준히 강조했다. 그리고 2018년 이러한 활동을 통합적으로 전달할 ‘구찌 이퀄리브리엄’을 론칭했다. 인류와 환경에 대한 목소리를 모으는 구찌의 또 다른 플랫폼으로 브랜드가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고 인권 증진에 기여하는 활동을 모색한다. 지구의 한정적 자원을 아끼고, 지금 전해야 할 이야기에 더 큰 힘을 싣기 위해서다.

구찌는 2015년부터 PVC 사용을 전면 금지했고 재활용 기술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모피 반대 연합에 가입해 퍼 프리fur free를 선언하면서 지속 가능성을 비즈니스의 본질적인 가치로 삼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구찌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 중 환경 손익 분석을 첫 번째로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기업이 환경에 주는 영향과 자연 의존도를 측정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구찌의 10년 지속 가능성 전략을 정량화할 기준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구찌의 10년 지속 가능성 전략은 2015년 환경 손익 분석 기준치를 토대로 오는 2025년까지 성장률 대비(2015년 기준) 직접적인 사업 활동과 전체 공급망에 걸쳐 환경적 피해를 40%, 온실가스 배출량을 50% 줄이는 것이 목표다. 지난 6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2019년을 기준으로 환경적 피해를 39%, 온실가스 배출량을 37% 줄여 유의미한 기록을 남겼다. 구찌는 원료 수급, 제품 생산 공정, 공급 및 판매에서 보다 지속 가능한 대안을 도입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였으며, 연간 탄소 중립 방침을 마련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상쇄해나갔다. 먼저 매장, 사무실, 창고 등의 모든 사업 활동에서 재생 에너지 비중을 확대했다. 가죽 처리에 사용하는 물과 화학물질의 양을 줄이는 ‘스크랩 레스Scrap-Less’ 프로그램을 진행해 제조 과정에서 사용하는 물을 절약하고 폐수를 감소시키며 화학물질 소비를 절감했다. 그런가 하면 가죽 및 섬유 폐기물을 업사이클하는 구찌업Gucciup 프로젝트로 원료의 순환성을 제고했다. 이로써 연간 10톤 이상의 가죽 스트랩을 재사용하고 이산화탄소도 4500톤 감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구찌의 활동은 NGO 및 여성 관련 단체와 협력해 의미를 더하고 있다.

구찌 아트랩. 수공예 산업을 위한 실험실이자 미래 혁신 센터다. 모든 가죽 제품과 신발에 대한 샘플링과 제작 작업이 이곳에서 이뤄진다. 그뿐 아니라 신소재, 금속 제품 연구, 환경 영향 평가와 물리적·화학적 테스트를 진행한다. 제품의 기술과 노하우에 집중하고 생산 체계를 통합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생산 시스템은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 처음 시도하는 사례다. 사진 제공 구찌 / ©Courtesy of Gucci

지난 6월에는 ‘구찌 서큘러 라인’의 첫 번째 컬렉션 ‘오프 더 그리드Off the Grid’를 선보였다. 솔벤트 프리, 재활용 폴리에스터, 재생 나일론, 그리고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섬유 조각으로 만든 에코닐 등 지속 가능한 소재로 제작하는 라인이다. 젠더리스 가방, 액세서리, 신발, 의류로 구성한 이번 컬렉션은 환경을 보호하고 탄소 발자국을 줄여나가는 실천이다. 캠페인에는 배우이자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는 제인 폰다와 환경운동가 데이비드 드 로스차일드, 래퍼 릴 나스 엑스 등이 참여했다. 제인 폰다는 평생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인물로 1960년대에는 시민권 운동에 참여했고 1970년대에는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벌이다 다섯 번이나 체포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벌인 ‘파이어 드릴 프라이데이Fire Drill Fridays’에 매주 참여했고, 올해 열린 오스카 시상식에서는 6년 전에 입었던 드레스를 다시 입고 나와 다시는 쇼핑을 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 제인 폰다를 모델로 기용한 구찌의 의지는 메시지에 힘을 싣는다.

한편 2013년부터 구찌가 진행해온 성 평등 캠페인 ‘차임 포 체인지Chime for Change’도 주목할 만하다. 여성을 위한 글로벌 펀드를 모금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활동이 주다. 특히 지난해부터 발행한 성 평등과 자기 표현을 지지하고자 만든 〈차임 진〉이 인상적이다. 박력 있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레이아웃이 특징으로, 세계 각지의 활동가와 예술가, 작가들이 쓴 여성, 성 정체성, 평등에 대한 글을 싣는다. 특히 매호 소개하는 작가들의 이야기와 작품이 흥미롭다. 0호에서는 젠더 바이너리를 주제로 작업하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알록 바이드메논이 트렌스젠더의 인권을 주제로 남자, 여자로 구분하지 않고 성별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 말했다. 1호는 베이루트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겸 영화감독 모하마드 압도우니Mohamad Abdouni의 사진을 표지에 사용해 시선을 끌었다.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아랍인 여성 보디빌더를 찍은 사진으로 1980년대 핀업 걸의 인상을 차용해 ‘여성스러움’의 상대적인 개념을 제고하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차임 진〉은 매호 하나의 나라를 선정, 각 나라의 성 평등 이슈를 다루는 섹션도 마련해 글로벌한 시각을 담고 있다. 1호에서는 브라질, 최근 발행한 2호에서는 일본을 조명했으며 누구나 확인할 수 있도록 웹페이지(chime.gucci.com)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게 했다. 또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 전하고 있다. 〈차임 진〉의 목소리는 그저 타고난 모습, 자신이 원하는 모습, 다양성을 존중하고 규정된 범주를 따르지 않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가치관과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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