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디자이너 정병규를 위한 오마주, 〈정병규 사진 책〉
한국 1세대 북 디자이너. 바로 정병규를 일컫는 말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그는 1970년대 중반 출판계에 입문해 출판과 편집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북 디자인에 입문했다.
한국 1세대 북 디자이너. 바로 정병규를 일컫는 말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그는 1970년대 중반 출판계에 입문해 출판과 편집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북 디자인에 입문했다. 그 후 1982년 파리 에콜 에스티엔École Estienne에서 정식으로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고 1984년 ‘정병규출판디자인’을 열었다. 이는 편집자에서 북 디자이너로의 전향을 알리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현장에서 왕성하게 작업하고 있는 정병규는 지금까지 무려 3000여 권의 책을 디자인했다. 2009년 미진사에서 펴낸 빅터 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 개정판 표지도 그의 작품이다. 검은 마스킹 테이프를 찢어서 이어 붙인 일명 ‘테이프 타이포그래피’를 적용한 표지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의 북 디자인의 진수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진책이다.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되는 사진책은 단순히 사진가의 작품을 모은 사진집과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디자인 저술가 전가경과 북 디자이너이자 영남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정재완이 운영하는 사진책 출판사 ‘사월의눈’은 지난 8월 〈정병규 사진 책〉을 펴내 화제가 됐다. 정병규의 대표 사진책 31권과 함께 그의 북 디자인 세계를 탐구하는 이번 책에 관해 정병규(사진 왼쪽)와 전가경에게 물었다.
이번 책을 오랜 시간 공들여 기획했다고 들었다.
정병규 전가경 대표와 이야기하면서 사진집 도판 위주의 도감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전 대표를 포함한 여러 필자들의 글을 실었으면 했는데 그런 의견을 반영해 사월의눈에서 책이 나오게 됐다.
전가경 2013년 기획 당시만 해도 이듬해 스승의 날에 맞춰 출간할 수 있을 거라고 오판했다.(웃음) 2015년까지 정병규 선생을 모시고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다섯 번에 걸쳐 사진책에 관한 대담을 했다. 이후 출판 관련 기금을 받으려고 몇몇 출판 지원 사업에 지원했으나 쉽지 않았다. 사진책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아예 없어 지원 대상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예산 문제에 부딪혀 좌초될 뻔했다가 정재완 디자이너가 2019년 어느 북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했고 그 상금을 바탕으로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책에서 다룬 31권의 사진책은 어떻게 선정했나?
전가경 정병규 선생은 책 선정을 전적으로 나에게 맡겼다. 〈경주남산〉 〈생각의 바다〉 같은 대표작을 우선순위에 넣었다. 선생께 요청드려 전달받은 〈우리江山〉 같은 책도 있지만 갖고 계시지 않은 사진책도 우리 리스트에 있었다. 이를 찾으러 무작정 부산 보수동 헌책방 사진책 코너를 뒤지다 보물처럼 발견한 책이 〈환희와 우정: 미소 스포츠 사진전〉이다. 〈광복 40년〉 〈사진 고대학생운동사〉도 그런 식으로 찾았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 모았더니 상대적으로 1980년대에 작업하신 사진책의 비중이 높더라.
완성된 책을 받아본 소감이 궁금하다.
정병규 눈에 익숙한 각각의 사진책이 〈정병규 사진 책〉이라는 한 권의 책 속에 들어오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편집의 힘이다. 1980년대에 작업했던 사진책이 삽입된 첫 페이지를 펼쳐 보는 순간 당시의 고뇌와 정리되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면서 나 자신과 대화하느라 상당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나온 정병규 선생의 사진책을 보면 유독 한국적인 소재가 많다.
정병규 당시 한국적인 소재를 다룬 기록 영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진계도 소재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소재주의란 소재 자체가 가진 아우라에 지나치게 기대는 현상을 말한다. 나는 그러한 트렌드를 좇는 흐름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 수준을 넘어선 사진가들이 있었는데 김수남, 강운구, 구본창 같은 이들이다. 이들의 사진은 한국적인 것에 앞서 ‘사진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진적이기에 비로소 한국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전가경 이 책을 위한 자료를 모으다가 이중한 선생의 글을 접하게 됐는데 1980년대 우리나라 출판의 큰 성과 중 하나로 한국학 도서를 꼽은 점이 흥미로웠다. 정병규 선생이 방금 지적한 대로 1980년대 출판된 〈경주남산〉 등의 사진책들은 민족적 자긍심을 찾는 움직임과는 구분되는 맥락에서 새로운 영상 화법으로 시도한 사진의 대담한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
정병규 선생이 사진책에 과감하게 도입한 사진 크로핑 기법은 당시만 해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고 책에서 언급했다.
정병규 북 디자이너가 사진의 작품성을 열어젖히는 일을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진보적인 사진가들을 만났기에 가능했다. 북 디자이너의 일은 저자가 주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그대로 지면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 속에서 드러나는 카메라 앵글 간의 거리가 만들어내는 공간의 힘을 느끼고, 지면의 앞장과 뒷장 간의 연결에 따른 비주얼 플롯을 고려해 디자인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각 사진의 특성을 살리기 위한 디자인적 구조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사진책을 자주 건축에 비유한다. 파리에서 디자인을 공부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가르침이 ‘Why(왜)’를 의미하는 ‘Pourquoi’다. 디자인은 감성적으로 해야 하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왜 자꾸 이유를 찾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라는 건지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알겠더라. 책의 페이지마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배치할 때, 정보를 구조적으로 파악해 비주얼 플롯을 만드는 일이 북 디자이너의 역할인 것이다.
사월의눈에서 펴내는 사진책의 북 디자인에 정병규 선생이 어떤 영향을 끼쳤나?
전가경 사월의눈이 사진책 출판사라는 이름을 내건 이유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기존 사진집이나 문자 위주의 책에 대한 인식을 교란시키고 싶은 것이다. 〈정병규 사진 책〉에 선생의 강의록을 수록한 이유는 존경의 표시라고 보면 된다. 정재완 디자이너는 정병규출판디자인에서 일한 오랜 제자이고 나는 제도권 밖에서 이루어진 북 디자인 강좌와 워크숍을 통해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선생을 통해 롤랑 바르트, 수전 손태그, 그리고 빌리 플렉하우스를 접하며 사진과 디자인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사월의눈이 지향하는 사진책은 선생께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보는 독자들이 얻어갔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전가경 책 중간 마다 그라데이션 바탕색을 적용한 끼어드는 페이지가 있다. 여기에는 선생의 구술에 기초해 정병규 선생의 북 디자인을 한국 시각 디자인사의 큰 흐름 속에서 조망하는 글을 실었다. 납활자에서 사진식자, 디지털 기술의 도입으로 인쇄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변화한 북 디자인을 물질문화사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책이 정병규 선생의 사진책 31권을 경유해 한국 시각 디자인사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책으로 읽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