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문승지
그동안 서로를 응원했다는 두 산업 디자이너는 단순한 인터뷰 자리를 넘어 각자의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공감의 장을 만들었다.
이석우 SWNA 대표는 2011년 월간 〈디자인〉 400호 특집 ‘선배 디자이너+후배 디자이너’ 인터뷰에 후배 디자이너로 참여한 바 있다. 당시 갓 디자인 스튜디오를 시작했던 그는 국내 모던 가구산업의 1세대 디자이너인 고 양영원 선생과 한국 가구 시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이석우 대표는 한국 산업 디자인계를 책임지는 중견 디자이너가 됐다. 후배 디자이너 자리는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문승지 작가가 채웠다. 코스COS와의 협업으로 처음 디자인계에 이름을 알린 문승지는 2017년 동료 디자이너들과 아티스트 레이블 ‘팀 바이럴스’를 결성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디자인 영역을 확장해왔으며 간송문화재단, 코오롱, 블루보틀, 까르띠에 등 다양한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다. 그동안 서로를 응원했다는 두 산업 디자이너는 단순한 인터뷰 자리를 넘어 각자의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공감의 장을 만들었다.
이석우
1978년생.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모바일사업부 제품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미국에서 퓨즈 프로젝트를 거쳐 티그 디자인에서 IT 기기와 비행기 인테리어 프로덕트 디자인을 담당했다. 2008년부터는 모토로라 글로벌 제품의 크리에이티브 리드를 맡았으며, 2011년 독립해 SWBK(현 SWNA)를 설립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메달 디자인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올해 4월에는 SWNA 10주년을 되돌아보는 전시를 성수동 코사이어티에서 진행했다.
“1995년 2월호.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구입해서 본 월간 〈디자인〉이다. 디자인을 접할 수 있는 매체가 전무하던 시절, 막연하게 디자인을 하고 싶었던 학생인 나의 눈에 들어온 첫 잡지가 월간 〈디자인〉이었다. 당시 읽은 특집 기사 내용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문승지
1991년생. 계원예술대학교 감성경험제품디자인(현 리빙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패션 브랜드 코스와의 협업을 통해 선보인 ‘포 브라더스’ 컬렉션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국내외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며 자신만의 관점을 가진 디자인을 선보였다. 2017년에는 동료 디자이너들과 함께 아티스트 레이블 ‘팀 바이럴스’를 만들어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 조직을 이끌고 있다. 올해 7월에는 블루보틀 제주 매장 디자인을, 9월에는 까르띠에 전시 〈클래쉬 드 까르띠에 팝업〉의 살롱 디자인을 선보였다.
“2017년 7월호. 한창 힘들었던 당시 인터뷰해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디자인은 정말 하고 싶었지만, 현실 앞에 좌절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던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인터뷰다.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순간을 느낄 수 있는 기사가 담겨 있는 잡지다.”
산업 디자이너, 함께 일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이석우 매장 전체를 디자인했던 블루보틀 제주가 7월에 오픈했고, 전시 쇼룸 디자인에 참여했던 까르띠에 전시가 9월에 공개됐죠? 블루보틀 제주는 직접 가봤는데 기존 블루보틀과 잘 어울리면서도 제주도만의 특징이 잘 살아 있더군요. 까르띠에 전시 쇼룸도 대단히 좋았고요. 두 공간이 전혀 다른 분위기라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한 명의 디자이너가 여러 가지 작업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 결과물들에 유사한 느낌이 나기 마련인데, 블루보틀 제주와 까르띠에 전시 쇼룸은 그렇지 않았어요. 디자인 작업의 비결이 무엇인가요?
문승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우선 제가 팀으로 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소속된 팀 바이럴스는 클라이언트 의견을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그 의견을 저희 방식대로 풀어나가요. 블루보틀과 까르띠에 모두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처음부터 명확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디자인 과정에서 명확한 브랜드 스토리를 저희 방식대로 정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봐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석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문승지 작가는 예전부터 꼭 만나고 싶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이렇게 보게 됐네요.
문승지 저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올해 4월에 SWNA의 10년을 되돌아보는 전시를 성수동 코사이어티에서 진행하셨죠? 팬데믹이 잠시 진정된 덕분인지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던 것으로 압니다. 어떻게 디자인한 결과물과 디자인 프로세스까지 모두 공개하는 전시를 기획하게 됐나요?
이석우 그동안 디자인하면서 나온 결과물은 물론, 다양한 실험을 통해 나온 디자인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어요. 여기에 SWNA 디자이너 한 명 한 명이 디자인한 의자까지 모아 전시를 구성했죠. 사실 의자 디자인 프로젝트는 연례행사처럼 방문했던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못 가게 된 것에 대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제안한 작업이었어요. SWNA 디자이너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의자를 디자인하고, 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을 맡았죠.
문승지 SWNA 10년의 역사를 보여주면서도 소속 디자이너 개개인의 이야기도 들려주는 전시였던 셈이네요.
이석우 맞아요.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완성되지도, 정제되지도 않은 결과물에 관람객들이 반응하고 즐거워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전시한 의자와 디자인 결과물에서 사람들이 영감을 받는다는 점도 흥미로웠고요.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게 저희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문승지 작가가 만든 팀 바이럴스에 관한 이야기도 궁금해요.
문승지 저를 비롯한 3명이 같이 창업한 디자인 회사예요. 가구와 오브제 디자인을 담당하는 저와 공간 디자이너, 회사 전체의 운영을 맡는 멤버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죠. 디자인 회사이면서 매니지먼트 회사 성격도 있죠. 처음 디자이너로 활동할 때 홍보부터 마케팅, 영업, 세무 등 각종 일 처리를 혼자 하느라 정작 디자인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 이후로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할 수 있는 팀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매니징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며 온전히 디자인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앞으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목표점 없이 팀을 시작했는데, 눈덩이가 구르며 커지듯 5년이 지나고 보니 자연스레 팀원이 모이고 저희 나름의 색깔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이석우 SWNA와는 시스템이 다르네요. 저희 역시 분업화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생긴 고충이 있습니다. 10명이 넘는 직원들의 디자인을 봐주다가 제 디자인을 해야 할 때도 있고, 클라이언트 미팅을 준비하다가 어느 순간 견적서를 써야 할 일도 있거든요. 디자이너와 대표 사이를 오가며 그때그때 일종의 모드 전환을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반면 팀 바이럴스는 아트 신이나 뮤지션들의 매니지먼트 팀 형식을 차용한 셈이죠. 선배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오피스 운영 방식을 차용한 저희 세대보다 확실히 유연성과 융통성이 높아진 것 같아요.
문승지 하지만 고민도 많아요. 구성원들이 디자인에만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팀원들이 일에 너무 깊숙이 빠지다 보니 제가 팀원들의 일과 삶의 경계를 흔드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SWNA는 직원들이 야근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나요?
이석우 예전엔 저희도 밤샘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번아웃이 온 직원들이 금세 회사를 떠나더군요. 굵고 짧게 일하고 떠날 회사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현재 위치한 SWNA 사옥으로 이사한 뒤로는 일종의 자율 출근제 같은 규칙을 정했어요. 일찍 출근하면 일찍 퇴근하는 것으로요. 그러자 9시 30분 이전에 출근하는 직원이 많아졌어요. 일단 저부터 5시 30분에 퇴근하니 직원들 퇴근 시간도 빨라졌죠. 그 대신 정해진 시간 내에 일을 마치려고 업무 효율을 높이는 여러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어느새 SWNA 문화로 자리 잡은 것 같아요.
문승지 동료들과 오래 일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셨기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특유의 스타일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석우 클라이언트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수술용 로봇을 디자인할 때는 저희만의 색깔을 고집할 수 없어요. 철저히 효율성과 기능성에 기반해 디자인해야 하죠. 반면 SWNA만의 스타일을 적용할 여유가 있는 클라이언트라면, 저희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많이 반영하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외부 요청을 받아 일하는 산업 디자이너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야 해요.
문승지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팀 바이럴스만의 스타일을 완벽히 구축하는 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일부러 색깔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은 없지만, 조금씩 저희만의 디자인을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클라이언트에 따라 꼼꼼한 디자인 가이드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가이드에 따라 일을 해도 결국 디자인하는 사람은 우리이니, 조금씩이나마 저희만의 스타일이 반영된다고 봐요.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면 저희만의 색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겠죠. 그렇게 믿고 계속 일하는 중이에요.
이석우 멋있네요. 그에 비하면 저희 세대는 샌님 같아요.(웃음) 옛날에는 대학교 졸업해서 인턴하고, 인턴 끝나면 취업하는 삶의 과정을 당연하게 여겼어요. 지금 세대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자신만의 스토리도 확고하고요. 디자인 팀을 조직하는 방식도 새롭습니다.
문승지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요, 산업 디자인이 갈수록 미니멀해지는 상황에서 산업 디자이너의 역량 역시 달라지는 것 같거든요. UX·UI 디자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기도 했고요. 앞으로 산업디자이너는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요?
이석우 다양한 맥락을 꿰뚫어보는 안목이 중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옛날 휴대폰은 물리적 경험을 디자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감각적 경험의 결정체로 접근해야 하죠. 제품 디자인을 넘어 통합적으로 접근해서 디자인해야 합니다. 여러 레이어를 조율하고 균형을 잡아 하나의 방향으로 만들어내는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능력, 통찰력이 중요해요.
문승지 공감합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사용자 관점에서 디자인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글 박종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