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희 디자이너, 구마 겐고를 만나다

지난 5월 29일, 구마 겐고 앤드 어소시에이츠가 한국 지사를 열었다. 2003년 모 매체의 객원 에디터로 구마 겐고와 첫 인연을 맺은 디자이너 임태희가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나 성수동에 사무실을 열게 된 배경부터 최신 근황을 물었다.

임태희 디자이너, 구마 겐고를 만나다

먼저 한국 지사 오픈을 축하합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궁금해해요. 어떤 이유로 서울에 사무실을 열었나요?

개인적으로 한국 그리고 서울을 좋아합니다. 특히 서울은 점점 더 에너지가 넘치고, 재미있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어요. 현대미술 분야만 봐도 그래요. 홍콩이 아시아의 중심이었는데 이제는 한국을 중심으로 현대미술 시장이 펼쳐지고 있지요.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세계적 활약과 영향력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음식 문화도 마찬가지고요. 이 역동적인 에너지 속에서 좋은 영향을 받으며 한국 프로젝트를 잘 진행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 지사를 만들었어요. 성수동 역시 재미있는 지역입니다.

도쿄의 사무실에도 한국 스태프가 많이 있죠?

한국인의 비중과 역할이 꽤 큽니다. 도쿄 사무실 직원이 300명 정도인데 그중 한국인 스태프가 10명 이상입니다. 이들에게 한국 지사를 만드는 일에 관해 자문을 구하니 너무 좋아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줬어요. 그 덕분에 용기를 내기도 했습니다.

한국 지사를 여는 시점에 사운드 뮤지엄 ‘오디움’도 오픈하는 걸로 압니다.

오디오나 스피커처럼 사운드에 관련된 것을 수집해온 클라이언트로부터 의뢰를 받아 시작한 프로젝트예요. 첫 만남 때 그가 갖고 있는 오디오로 음악을 들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훌륭했어요. 오디오에 대한 저의 관점이 크게 바뀔 정도로 충격을 받았어요. 그는 지금의 기술로 만들 수 없는, 과거에 만들어진 오디오의 귀중함을 얘기해줬는데 많은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년 정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기기에 따라 소리와 작동법이 각기 다른 오디오를 경험했어요. 이 과정을 통해 오디오와 사운드가 담기는 공간을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카본 파이버를 사용한 오디움의 지하 라운지. 카본 파이버를 입체적으로 설계해 부드럽게 조성한 공간은 청음 환경에도 좋다. 사진 이남선
수직으로 떨어지는 알루미늄 파이프는 건물 내외부를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요소다. 사진 이경옥
1930년대에 생산한 웨스턴일렉트릭의 16A 혼 시스템이 설치된 오디움 전시실. 사진 이경옥
VI 디자인을 맡은 하라 겐야는 스피커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인 스피커 형태로 오디움의 심벌을 표현했고 이를 조형화해 오디움 정원에 배치했다. 사진 이경옥

하라 겐야가 맡은 그래픽이 건축과 어떤 조화를 이룰지도 궁금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국 문화에 대한 구마 겐고의 섬세한 통찰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데요. 한국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발견한 새로운 점이 있을까요?

최근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한국의 다양성입니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과 안면도 등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덕분에 그동안 잘 몰랐던 한국의 지방을 깊숙이 경험했어요. 지방 도시는 면적에 비해 그 문화가 다양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마도 지방마다 자연환경이 다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해와 서해의 색과 풍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에 놀랐고, 이런 점들은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어요.

풍경이 다른 곳은 식문화도 다르지요.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은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고 그 사이에서 문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건축과 닮았습니다. 안면도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가장 우선시한 것은 그곳의 자연을 이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웹사이트나 책을 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현장에 꼭 가봅니다. 직접 풍경을 보고 음식을 먹고 지역 사람들을 만나 함께 경험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서 〈자연스러운 건축〉이 떠오르네요. 자연과 건축의 관계에 대한 개념을 그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 책은 한국에서 특히 많은 관심과 공감을 받기도 했어요.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시기를 지나며 구마 겐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일본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대도시에서 탈피해 지방 소도시로 옮겨가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저 또한 홋카이도에 사무실을 냈습니다.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가 훌륭해 음식이 맛있고, 온천도 있습니다. 물이 맑아서 아직도 지하수를 사용하는 곳이 많은데 미네랄이 매우 풍부해요.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요즘 같은 시대에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방식으로 풍부한 미네랄을 섭취한다는 게 흥미로운 것 같아요. 얼마 전에는 렘 콜하스가 사무실에 놀러 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팬데믹 시기를 지나며 방 안에 갇혀 지내는 생활이 인간의 몸과 정신에 좋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되었어요. 덕분에 밖에서 생활하는 것의 장점을 발견했습니다.

한국도 팬데믹 이전에는 문을 닫고 에어컨을 트는 것을 좋아했지만 요즘에는 오픈 에어링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듯해요. 카페나 레스토랑의 테라스를 즐기는 것은 물론 더위를 조금 견디더라도 바깥 공기를 선택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또 다른 오피스인 오키나와 사무실의 환경은 어떤가요?

오키나와 사무실은 마을 안에 있어요. 오키나와에서는 바다가 보이는 곳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마을에 있는 시장 바로 앞에 사무실을 마련했어요. 건물은 허름하지만 테라스에 나가면 기분이 좋아져요. 지방에 작은 사무실을 여러 개 만든 가장 큰 계기 또한 코로나19였어요. 해외로 나가는 것이 봉쇄되면서 지방을 많이 다녔는데 그 지역의 자연,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것이 너무 좋은 거예요. 지역마다 장인이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로웠고요. 건축과 관계없는 사람을 만나 듣는 이야기들이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일과 상관없이 사람을 만난다는 게 도시에서는 드문 일이지요. 지방에 있는 우리 사무실 중 하나는 의자가 20개 정도 있는데 5명의 스태프와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 지역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만석이 되곤 해요. 양봉을 하는 사람의 꿀 이야기, 물건을 제조하는 중소기업 사업가, 공예가 등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공부를 합니다. 도쿄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도 팬데믹이 가져다준 선물이지요. 팬데믹 이전의 우리가 도시를 더 크게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구마 겐고가 안면도에서 전개 중인 프로젝트. 사진 Kengo Kuma & Associates
홋카이도 히가시카와에 위치한 ‘구마 모바일오피스’. 홋카이도의 조례에 따라 목재를 사용하고 눈이 많이 오는 현지 환경을 고려해 경사진 지붕을 올렸다. 사진 Imada Photo Service
구마 모바일 오피스 내부. 이 사무실에서는 지역의 가구 산업 육성에도 기여를 하고 있다. 사진 Imada Photo Service
오키나와 사무실은 한적한 마을의 시장 입구에 위치한다. 1층에는 바가 있다. 사진 Kaoru Yamada

점점 규모가 커지고 유명해지는 구마 겐고 앤드 어소시에이츠는 종종 ‘국민 건축가’라는 타이틀로 회자됩니다. 아틀리에 성향이 강한 구마 겐고 입장에서 이런 편견에 대한 반격으로 사무실을 분리해 또 다른 실험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웃음) 사무실 규모가 크면 아주 작은 프로젝트는 진행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지요. 아틀리에보다는 샐러리맨이 다니는 큰 기업처럼 변하기도 합니다. 저는 작은 프로젝트 또한 의미와 역할이 크다고 생각하고, 아틀리에다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도쿄와 지방의 사무실로 일을 나누는 것을 넘어 어떤 프로젝트는 도쿄와 홋카이도 팀이 함께 작업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작은 단위의 아틀리에가 모여 큰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방식으로요.

당신은 연구자에 버금갈 정도의 학문적 지식과 통찰력을 갖고 있는 한편, 작업은 매우 순수한 방식으로 진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설과 작품 사이의 갭은 제가 구마 겐고를 좋아하는 포인트입니다.

건축물을 만드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 같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즉각적이기에 순발력을 갖고 대처해야 합니다. 반면 학문과 이론 정립에는 긴 호흡과 시간이 필요하지요. 두 장르는 분명 성격이 다르지만 저는 두 세계를 오가야 해요. 그래서 그 갭이 저에게도 중요한 것은 물론 일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갭이 있고 모순된 것이 있어야 그 사이에서 새로운 생각과 발전된 무언가를 창출하고 다음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구마 겐고 건축의 특징으로 소재에 대한 관심과 몰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물론 자연과 건축 환경을 고려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순수하고 순진한 접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최근에 새롭게 주목하고 있는 소재가 있나요?

부드러운 소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요. 옷에 가까울 정도로 부드러운 소재를 건축물에 적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19세기만 해도 이렇게까지 콘크리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20세기는 콘크리트의 시대가 되었어요. 큰 건물을 빨리 짓기 위해 이만한 소재가 없었고 이제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이 넘쳐납니다. 저는 부드러운 소재로의 회귀를 생각합니다. 이제는 부드러움으로도 인간을 보호할 기술력을 갖추었기에 부드러운 건축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디움에도 종이와 비슷한 매우 부드러운 소재를 적용했고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처음 선보인 Breath/ng. 특수 제작한 카본 파이버로 유해 입자를 걸러낸 프로젝트다. 사진 Dassault Systems
후쿠오카현 최대 규모 공원인 지쿠고 지방 공원에 투명한 오두막 숲을 지었다. 역시나 카본 파이버를 사용해 부드러운 모자 형태로 디자인했다. 사진 Kobayashi Kenji Photograph Office
고마쓰 세이렌의 기술을 전시하는 박물관. 카본 파이버를 이용해 내진성을 강화하고 내부를 개조했다. 사진 Takumi Ota
건축을 통한 실험으로 성장해가는 것 또한 구마 겐고의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전통 장난감에서 착안한 ‘치도리’를 밀라노에서 파빌리온으로 선보인 이후 스타벅스의 인테리어나 서니힐스의 건축으로 확장했듯이요.

맞습니다. 생각이 자라나는 것, 성장하는 것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건축화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나 아이디어를 매우 작은 스케일에서 시작해 보완하며 결국 건축으로 구현하는 것, 구마 겐고 앤드 어소시에이츠의 장점입니다. 최근에는 카본 파이버를 많이 사용합니다. 리움미술관의 설치물로 선보였고, 오디움의 인테리어 요소로도 사용했습니다. 이 또한 언젠가 건축물로 확장될 것입니다.

요즘 저의 고민 중 하나는 일하는 방식입니다. 6명의 직원이 일하는 작은 규모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는데 항상 시간이 부족합니다. 구마 겐고 앤드 어소시에이츠에서 300여 명의 직원과 어떻게 소통하고 시간을 조율하나요?

한 가지 비결을 말씀드리자면 미팅 시간을 단축하는 것입니다. 팀원들과의 미팅이건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이건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핵심보다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많은 건축가가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자랑하는 데 시간을 많이 씁니다. 핵심만 짚을 줄 알면 시간이 단축됩니다. 또 한 가지는 대기업처럼 수직적 구조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수직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면 실장급 직원 아래의 가장 젊은 직원, 혹은 프로젝트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직원과 대화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라도 직원들의 위계를 구분하지 않고 여러 직원과 소통하고자 합니다.

2007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치도리는 일본 전통 짜맞춤 기법을 활용해 못을 사용하지 않고 구조를 조립한 파빌리온이다. 사진 Kengo Kuma & Associates
치도리에서 발전시킨 목재 구조를 자석으로 결합해 하나의 단위를 만들고 이를 확장하여 이동식 주택 ‘호조안’을 지었다. 사진 Kengo Kuma & Associates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53호(2024.07)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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