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꿈꾸고 딸이 가꾸는 모티프원, 20년의 이야기

2005년 아티스트 레지던스로 시작한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의 북스테이 모티프원. 시간과 이야기가 쌓여 더욱 근사해진 이곳은 여전히 예술가와 여행자들에게 영감과 위로가 된다. 모티프원 2대 호스트 이나리에게 20주년을 앞둔 모티프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들었다.

아버지가 꿈꾸고 딸이 가꾸는 모티프원, 20년의 이야기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의 안쪽 깊은 곳,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에 북스테이 ‘모티프원(motif#1)’이 자리한다. 벽을 타고 올라간 넝쿨 사이로 보이는 노란색 문을 두드리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모티프원을 운영하고 있는 호스트 이나리 씨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2005년 그녀의 아버지 이안수 씨가 설립한 모티프원은 전 세계 90여 개 나라에서 4만 명 이상이 다녀간 글로벌한 게스트하우스이다. 아버지 안수 씨가 자리를 지키던 서재에서 나리 씨가 20주년을 바라보는 모티프원과 그녀가 보내는 호스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티프원 호스트 이나리 © Kim Hyewon, Designpress

설립자 이안수 이야기

아버지 안수 씨는 늘 유랑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25년 동안 여행과 음악, 디자인 잡지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퇴사 이후 다른 삶에 대한 고민과 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4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으로 짧은 유학을 떠났다. 1학기를 마친 그가 선택한 것은 120일 간의 북미 대륙 배낭여행.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세계의 예술가와 여행자들이 모이는 아지트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전 세계 여행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게스트하우스를 떠올린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아티스트 레지던스입니다. 예술가들이 머물며 영감을 받고 창작을 하는 공간이죠. 그러므로 방문객들은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 작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티스트를 규정하는 일이 참 애매하고 모순이라는 건의를 받은 거죠. 그 후 그 판단을 우리가 하지 않기로 한 거예요. 이곳에서 영감받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로요.”

_ 모티프원 호스트 이나리

​지금과 같은 활엽수 숲과 단단한 외관의 건물을 지니기 전, 2003년 헤이리에 함께 왔던 고등학생의 나리 씨에게 이곳은 애기똥풀이 무리 지어 핀 한적한 공터였다. 안수 씨는 자신의 꿈을 이뤄줄 건축가로 이제 막 한국에 돌아와 ‘매스스터디스(Mass Studies)’를 설립한 조민석 건축가를 찾았다. “헤이리 예술마을 프로젝트 참여 건축가 명단 중 젊고 실험적이며 한국에 건축물이 많지 않은 건축가를 만나고 싶어 하셨어요. ‘대가’인 분들은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고착된 형태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유사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를 제안하고자 하셨죠.” 그렇게 모든 방마다 계절을 감각할 수 있는 넓을 창을 둔 단 하나뿐인 연한 초록색 이층집, 모티프원이 완성되었다.

motif#1 외관 © 모티프원
Studio White © 모티프원
Studio Mirror © 모티프원
motif#1 현관 © 모티프원

모티프원을 짓는 1년 동안 안수 씨는 손수 잣나무 목재를 켜서 서재와 주방, 각 방에 사용될 가구를 만들었다. “집안에 건강한 자연이 들어오길 원하신 거죠. 잣나무로 가구를 만들어야겠다 결심하고 춘천에 계신 이가락 나무장인(장승·솟대 기능전승자)을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이 집에 들인 모든 나무 작업을 함께 하신 거예요.” 장인과 함께 아버지가 만들고 정성을 다해 가꾼 책장과 선반, 책상에는 나리 씨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모티프원 자체가 저희 삼남매에게는 고향 같은 곳이에요. 어릴 적 일기장과 물건들부터 부모님이 여행에서 모은 오브제들이 고스란히 있어요. 컵 하나와 숟가락 받침 하나에도 우리의 이야기가 있어요.” 1년 전 남긴 방명록, 10년 전 맡기고 간 타임캡슐 같은 편지 등 그동안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의 이야기도 함께 쌓였다. 문을 연 지 20년을 바라보는 모티프원은 여전히 많은 이들이 가고 싶어 하고 궁금해하는 영감과 회복의 장소다. 가족의 추억이 세계 곳곳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특별함으로 발휘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서 가치가 더 커지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고요. 쉽게 소비되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귀했으면 하는 것들로 모티프원을 채우고 있어요.”

_ 모티프원 호스트 이나리

호스트 이나리 이야기

배우로 활동하는 나리 씨는 1994년 아역배우로 데뷔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 그녀는 더 거침없이 도전하는 아이였다. 고등학생 때 더 큰 세계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난 것도, 지금 모티프원의 호스트로 있는 것도 ‘한번 해보지’ 하는 탐험가의 마음이 발동한 일이다. “아버지가 어머니 은퇴 후 함께 10년간의 세계 순례를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몇 년 전부터 하셨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정년퇴직하자 정말 떠나시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 보고 여기 들어와서 공부해 볼 생각 없냐고 물으셨어요. 이곳이 ‘글로벌 인생학교’라고요. (웃음)”

갤러리에서 나리 씨. 왼편으로 보이는 그림 두 점은 어머니 강민지 씨와 아버지 이안수 씨이다. © Kim Hyewon, Designpress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06학번 이나리에게 북스테이 모티프원은 방학 때 오는 곳, 또는 여행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지키는 곳이었다. “저 역시 여행과 사람을 좋아하고, 세상과 사람 공부가 필요한 배우이기 때문에 호스트가 저와 잘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다만 물리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고민이 있었죠.” 배우, 번역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바리스타. 여러 정체성으로 살아가던 그녀는 2020년부터 아버지와 번갈아 모티프원을 운영하는 시범 기간을 거쳤다. 2023년 부모님이 다른 문화와 예술을 탐험하기 위해 10년의 노매드 생활(안수 씨는 이를 ‘출가’라고 표현했는데, 그의 여행 이야기는 인스타그램에서 볼 수 있다.)을 떠나고, 그녀의 직업에는 모티프원 호스트가 추가되었다.

나리 씨는 여행을 떠나기 전 아버지가 “10년 후에 봅시다”하며 악수를 건네던 순간을 기억한다. “당부하신 말은, ‘모티프원에 발을 들이는 모든 분은 너의 스승이다’였어요. 한마디 더 덧붙였죠. ‘지금을 살아라’ 라고. 과거와 미래를 핑계 삼지 말라는 거죠. 지금 부모님이 그러하듯 ‘지금’을 충실히 살다 보면 남이 아닌 ‘고유한 나’가 되겠죠. 손님을 대할 때 또한 ‘현재’만을 보라고 하셨어요. 학벌과 재산과 지위는 지금의 그 사람을 바로 보는데 방해되는 ‘과거의 그’라는 것이죠.”

Gallery L © 모티프원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직업인으로서 나리 씨는 자신의 지닌 동시대적 고민과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모티프원과 연결하고 있다. 제로 웨이스트를 시도하거나 소수자성, 기후위기, 미술 등에 관한 책들을 서가에 더하는 식이다. “저는 제가 모티프원을 운영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서 참 좋아요.” 그녀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그런 고민과 행동할 수 있는 부분들을 나누려고 노력한다.

“아버지가 계셨을 때, 그리고 제가 있는 지금, 그 과정들을 보고 경험한 분들은 이 공간이 어떤 식으로 비슷하면서도 다를 수 있는지를 발견해 내는 것을 좋아하고 재밌어하세요.”

_ 모티프원 호스트 이나리

​모티프원의 호스트로 있으며 나리 씨는 그동안 아버지가 말했던 모티프원의 역할과 효용 – 이곳이 사람들한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사람들과 소통하며 아버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 새롭게 느끼는 바가 많다. “아버지의 20년을 거의 몰랐잖아요. 아버지가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떻게 지금의 아버지가 되셨는지요. 그 과정을 제가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예요. 저는 지금 아버지가 만든 기반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이 많이 받아요. 이곳이 아버지가 일구고 정체성이었던 모티프원이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아버지가 헤이리 마을의 촌장님이셨고, ‘평온마을’이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구역의 이름도 지으셨죠. 중년 이후 선택한 인생의 뿌리가 여기인 거예요. 제가 지금 그 뿌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모티프원은 5년, 10년, 다시 방문하는 게스트들이 많다. 그들은 나리 씨에게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는지 이야기한다. 과거 모티프원과 아버지 안수 씨와 맺은 인연이 나리 씨에게서 다시 이어진다.

Studio Blue © 모티프원
Library O © 모티프원
Suite Black © 모티프원

함께 써 내려가는 모티프원 이야기

아버지 안수 씨의 꿈에서 시작된 모티프원은 나리 씨의 손길을 거쳐 새롭게 나아가고 있다. 나리 씨는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자신만의 색깔을 더해 모티프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손님의 것이 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위안과 용기를 준다. 모든 만남과 경험은 모티프원의 미래를 써 내려가는 중요한 순간들로 남을 것이다.

“앞으로 조금 기대돼요. 그동안 저도 많이 달라졌어요. 모티프원과 ‘헤이리’라는 공동체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되었거든요. (웃음) 오시는 분들이 변화를 알아채 주세요. 그때 그 변화를 좋게 느낀다면, 저라는 사람의 변화와 함께 모티프원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어요.

​공간으로서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위안이 되는 곳이길 바라요. 저는 공간이 줄 수 있는 경험 중 정말 어렵고 의미 있는 것이 위안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곧 상실이나 상처의 회복이고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용기이잖아요. 그래서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어요. 위안과 나를 마주하는 용기가 함께 가는 공간, 그리고 누구나 발 담글 수 있는 바다처럼 편하게 올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_ 모티프원 호스트 이나리

모티프원
주소
경기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38-26​
웹사이트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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