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감각을 사로잡는 이솝 공간 미학
70%의 절제된 정밀함과 30%의 자유로운 형태
1987년 호주에서 설립된 스킨케어 브랜드 이솝(Aesop)은 지속 가능한 디자인과 매장에서의 경험을 중시하며, 전 세계 약 280개의 스토어와 오피스를 통해 자신들만의 공간적 서사를 구축해왔다. 이솝은 새로운 스토어를 지역과 조화롭게 설계하며, 고객 환대와 편안함을 극대화하는 '공간의 시학' 철학을 바탕으로 고혹적이고 시적인 공간을 선보인다.
1987년 호주에서 설립된 스킨케어 브랜드 이솝(Aesop)은 지난 약 40년 동안 단순히 좋은 제품을 소개하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지속 가능한 디자인에 대한 진정성은 물론, 고객이 제품을 마주하는 매장에서의 경험 역시 이솝이 추구하는 공간 미학 아래 견고하게 설계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에 약 280개가 넘는 스토어와 오피스를 운영 중으로, 브랜드의 건축 환경과 다양한 문화 사이의 상호작용은 이들이 디자인에 어떤 접근법을 취하는지 나타내는 직접적인 지표가 되어왔다. 그 지표는 어느덧 브랜드의 상징이 되어 도시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반드시 들려야 할 디자인 스팟이 되거나, 현지인들의 삶에 미적·예술적 방점을 찍어주는 주요한 이웃 상점으로 자리 잡았는데 이는 자신들만의 공간적 서사를 만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솝은 새로운 스토어 장소를 찾을 때 지역과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 되기 보다, 그 지역의 한 구성원으로 조화롭게 이솝의 가치를 더하는 것이 자신들이 추구한 진정한 의의였다고 말한다. 이는 1987년 이솝 창립자가 문을 연 헤어살롱 이메이스(Emeis)에서의 경험들이 크게 작용했는데 당시 직원들은 고객의 니즈를 예상하고, 어떻게 하면 고객들이 환대를 받고 편안하게 느끼는지 경험했다. 그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조명이 안색에 미치는 영향, 편안한 좌석을 위한 최적의 너비와 높이, 사려 깊은 음향 효과 등 질감과 재료의 조화로 인테리어 친밀감과 진정성을 높이는 방법을 배웠다. 자신들의 공간 철학을 ‘공간의 시학’이라 일컫으며 고혹적이면서도 시적인 공간을 선보여 온 이솝이 오늘날까지 추구해온 공간 철학을 들여다보고, 시그니처 매장 6곳의 공간을 통해 브랜드 이솝이 말하는 공간 미학을 감상해 보자.
지역의 고유성을 담다
이솝은 시그니처 스토어를 ‘소통의 장’이라 정의한다. 전 세계 매장이 그 지역의 고객과 유기적 관계를 맺는 상징적 장소가 되는 것. 공간에 녹여내고자 하는 핵심 키워드는 ‘휴식’ ‘공감’ ‘진정성 있는 소통’. 이솝은 언제나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역사, 건축 양식을 존중하며 독창적인 디자인을 구현해왔다. 매장 주변의 지역적 요소를 활용하거나, 현지 건축가, 디자이너와 협업해 지역의 특성을 고스란히 매장 디자인의 레퍼런스 삼는 것이다. 지역과 이솝의 교집합을 찾아 이를 공간에 심는 일. 의식하지 않아도 이미 자연스레 우리의 일상으로 스며드는 공간을 완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브랜드가 스토어 디자인에 지역성을 부여하고 그 지역 안에 스며든다는 것은 고객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역성을 반영한 스토어는 기본적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친숙함과 소속감을 느끼게 해 고객과의 유대감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공간을 통해 브랜드와 고객 간 관계가 강화된다고 느낄 때 비로소 브랜드 충성도는 올라간다. 무엇보다 일반 매장과는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에 잔상이 오래 남는다는 것 또한 브랜드의 차별화된 전략이 될 수 있다. 결국 브랜드가 공간 디자인에 지역성을 부여했을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는 브랜드 이미지 강화, 문화적 존중과 포용, 지속가능성으로 브랜드의 이미지 강화에 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미니멀리즘과 시각적 풍요로 완성한 공간 미학
이솝은 본사 내부에 ‘스토어 디자인 가이드’를 따로 두어 전 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공간에 대한 미적 철학은 크게 두 가지로, ‘미니멀리즘’과 ‘시각적 풍요’에 의해 매장의 분위기를 결정짓고 있다. 이솝은 종종 새로운 스토어의 기존 토대에 남아 있는 강점과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과도한 시각적 요소를 제거하는 작업을 거치는데, 보다 단순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채택해 제품이 돋보이고 공간의 사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가 이솝 매장에 들어섰을 때 여백과 여운, 그리고 사유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이러한 미니멀리즘 디자인에서 오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질서 있는 반복을 통해 시각적 풍요가 더해진다. 현지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예술 작품을 매장에 녹여내고,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가진 재료를 사용해 시각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제공한다. 나무, 돌, 금속, 유리 등 다양한 재료의 조합이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완성할 뿐 아니라, 섬세한 디테일과 고급스러운 재료 선택으로 세련된 시각적 풍요를 구현하는 중이다.
글로벌 리테일 디자인 책임자 마리안 라르디유(Marianne Lardilleux)은 럭셔리 브랜드 LVMH 출신으로 이솝에 합류한 이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스킨케어를 뛰어넘어 웰빙(Well-being)의 감각을 추구하는 라르딜룩은 43명의 팀원들과 함께 이솝의 공간 철학을 바탕으로 전 세계 곳곳에 이솝스러운 평화의 안식처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200개가 넘는 시그니처 매장(2023년 12월 기준)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다. 단순하고 깔끔한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통해 제품이 돋보이도록 하되,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요소를 가미해 차분하고 명상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곳. 길을 지나다 언제 들어서도 늘 오던 곳처럼 친근한 곳. 감각의 환대가 기다리는 곳이 바로 이솝 매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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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솝에 합류하기 전부터 저의 공간에는 이솝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게 주로 태도에 관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죠.
사람들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물병에 레몬을 넣고, 동네 꽃집에서 꽃을 구매해 꽃병에 꽂아두는 등….
간단하게 들리지만, 이러한 것들이 모여 이솝이 추구하는 철학을 만듭니다.
글로벌 리테일 디자인 책임자 마리안 라르디유 <Wallpaper>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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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성과 공간 미학을 녹여낸 시그니처 매장 6
로마, 이솝 비아 델 코르소 (Aesop Via Del Corso)
Theme | 로마에 대한 송가 (Ode a Roma)
Keyword | 고대 로마 건축 / 고대 신화
건축가 제이콥 스프링거(Jakob Sprenger)와 함께 디자인한 로마의 두 번째 매장. 고대 로마의 건축 원리와 기하학적 질서에 대한 찬사를 공간에 담았다. 활기 넘치는 거리 비아 델 코르소(Via del Corso)의 모퉁이 건물 2개 층에 개발된 이 매장은 영원한 도시 로마의 건물과 길의 우아함을 담았다. 내부는 따뜻하고 흙빛 톤과 질감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장엄한 계단을 중심으로 공간을 분리했다. 도시의 고고학 유적지에 있는 고대 기둥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길쭉한 모양의 맞춤형 샹들리에를 설치했다.
높은 천장으로 인해 1층은 계단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방으로 나뉘는데 호두나무, 황동, 로마 석회화, 장인이 만든 석회 회반죽, 번트 오렌지 래커로 구성된 객실은 미묘한 따뜻함을 자아낸다. 공간 한가운데 걸린 펠리체 토렐리(Felice Torelli)의 18세기 걸작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버리다(Theseus Abandons Ariadne)”가 가게 중앙에 걸려 있어 방문객들에게 고대 신화의 슬픔을 상기시키도록 했다.
밀라노, 이솝 밀라노(Aesop Milano)
Theme |지하 풍경(Scenografia del sottosuolo)
Keyword |도시 최초 지하철 노선 / 인체공학적
코르두시오(Cordusio) 지하철역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솝 밀라노는 1964년 밀라노에서 처음으로 개통된 지하 고속철도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솝 디자인팀은 고속철도 레드 라인(Line) 지하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고무, 석재, 금속 배관과 같은 내구성이 뛰어난 재료를 사용해 미래지향적이고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의 요소를 구성했다. 대리석 마블 타일 바닥과 녹색 칸막이벽에 홀로 눈에 띄는 빨간색 핸드레일은 다양한 높이로 플랫폼을 감싸며 승객들에게 물리적 지지력을 제공했는데 이를 이솝의 언어 체계로 변환해 공간으로 표현했다. 100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 내에 자리한 밀라노 스토어는 무대 세트처럼 설계된 탓에 모듈식으로 공간을 변형할 수 있게끔 설계했다.
파리, 이솝 상티에(Aesop Sentier)
Theme |돌, 나무, 강철에 대한 연구 (A study in stone, wood and steel )
Keyword |18세기 건물 / 석회암 / 공동 야외 세면대
파리 몽마르트르 거리에 위치한 이 시그니처 매장은 18세기 중반에 지어진 건물에 자리해 휴고 하스 스튜디오(Hugo Haas Studio)의 설계 아래 섬세하게 디자인되었다. 토대가 되는 기존 공간을 조심히 발굴해 한때 정육점이었던 건물의 특징을 발견했고, 그런 다음 숙련된 장인들로 구성된 팀을 투입해 가능한 한 공간의 기존 요소를 최대한 유지하며 필요한 부분만 새롭게 추가해 완성했다. 이 공간의 모든 자재는 파리의 전통 자재를 사용했으며, 대부분 100킬로미터 이내에서 조달되었다.
내부는 주변 거리 풍경을 닮은 모래 빛 석회암을 활용했고, 특히 내구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거대한 바위를 직접 조각해 세면대로 만들었다. 이러한 형태와 기능은 한때 도시 전역의 아파트 건물 1층에서 흔히 보이던 야외 공동 세면대를 연상시킨다. 물과 함께 이웃 간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흐르던 공간을 매장에 넣은 것. 석회암의 밝은 색을 닮은 스테인리스 스틸과 물푸레나무 목재도 곳곳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실용적이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 선반이 인상적이다.
브리즈번, 이솝 제임스 스트릿(Aesop James Street)
Theme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와 물결치는 형태 (Evocative material and undulating form)
Keyword |호주 해안가, 아니쉬 카푸어, 보트
브리즈번의 활기찬 동네 포티튜드 밸리에 위치한 제임스 스트리트는 호주 멜버른의 디자인 스튜디오 March Studio와 협업해 탄생했다. 호주 해안선을 따라 나른하게 보내는 여름에서 영감받아 내부 전체를 유리 섬유로 둘러싸는 구조로 완성했는데, 이는 예술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유려한 선과 뒤집힌 유리 섬유 수영장의 흥미로운 이미지에 영감받아 디자인되었다. 유리 섬유의 반투명함은 공간을 따뜻하게 만들고, 격자 모양의 프레임워크는 보트의 내부 구조를 연상시킨다.
서울, 이솝 서촌 (Aesop Seochon)
Theme |다양한 감각을 위한 여유
Keyword |정자 / 한옥 툇마루 / 한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중 하나인 서촌에 자리한 이솝 서촌은 사무소 효자동과 협업을 통해 한국의 전통적인 구조물인 정자에서 영감을 받아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사라지는 디자인으로 완성했다. 스토어의 전면부는 폴딩 도어를 완전히 개방했을 때 외부와 내부의 경계는 사라지고, 스토어 내부의 아로마가 외부로 퍼져 나가 매장을 지나던 행인을 자연스럽게 거리에서 매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했다.
폴딩 도어가 닫혔을 때에는 반투명한 메탈 패브릭 사이로 가지런히 진열된 갈색 병의 흐릿한 실루엣을 엿볼 수 있는 여운 짙은 공간으로 완성했다. 공간 곳곳에는 자연에서 영감받은 재료를 사용해 배치했는데, 거친 가장자리를 살린 석재는 화강암 바닥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한국의 전통 한지 벽지로 우수 짙은 한국의 미를 표현했다. 싱크와 선반을 비롯해 이솝의 프래그런스를 만나볼 수 있는 프래그런스 아르무아는 목재와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구리로 마감했고, 한국 전통 가옥 양식에서 유래한 툇마루는 재활용 목재를 사용해 한국의 전통성을 곳곳에 스며들도록 완성했다.
베이징, 이솝 WF 센트럴 하우스 19(Aesop WF CENTRAL House 19)
Theme |비단과 돌로 이루어진 안식처
Keyword |청나라 / 전통 가옥 / 고가구
왕실의 저택으로 알려진 베이징 왕푸징 지역에 자리한 이솝 왕푸 중환 하우스 19는 베이징에서 처음 선보인 이솝 스토어다. 중국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 사합원 내 자리한 아틀리에 수아수아(atelier suasusa)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곳은, 한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Puyi)의 사촌이 소유했던 레지던시를 재현한 ‘하우스 19’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며 디자인되었다. 스토어 내부는 고가구와 현대적인 요소가 어우러져 있으며, 외부는 더위를 피할 수 있기 위한 조상의 지혜에서 힌트를 얻어 디자인되었습니다.
웅장한 문을 지나면 넓은 안뜰로 입장하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고전적인 차양막에 영감받아 방수 캔버스와 크림슨 레드로 염색된 향운사 실크로 이루어진 접이식 구조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외부와 내부를 이어주는 이 공간은 그림자와 바람이 고요히 상호작용한다. 바로 앞 안채는 채광을 받아들이고 공기 순환에 최적화된 사합원 건축 양식의 높은 천장과 나무 서까래가 특징으로, 방문객들은 전통 양식인 계단식 침실에 영감받은 구조물로 디스플레이된 이솝의 비전형적인 다양한 레인지들을 탐색할 수 있다. 역사적, 건축학적 의미가 담긴 공간에서 안락함과 평온함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