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디자이너로 활동한 여성,에이프릴 그레이먼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선구자

"1970년대 중반 나는 스스로 ‘여성 디자이너’라는 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가장 집중하고 염두에 둔 것은 좋은 프로젝트를 의뢰받아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30년 넘게 디자이너로 활동한 여성,에이프릴 그레이먼
1970년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여성 디자이너에게 기회가 많았나?

나는 원래 뉴욕 출신으로 그곳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여러 디자인 회사에서 일했다. 당시 나는 디자인계에서 일하는 ‘여성’이라는 점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보게 될지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디자이너’로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나는 1970년대 후반 LA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미국 서부의 클라이언트들은 나를 궁금해했다.

젊은 시절 디자이너로서 용기를 낸 경험이 있다면 알려달라.

캔자스시티 아트 인스티튜트(Kansas City Art Institute)에서 학부를 마치고 스위스 바젤로 떠난 여행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밀어붙인 일종의 맹신이었다. 하지만 학부 때 시작한 ‘디자인의 기본’, 특히 ‘타이포그래피’를 완벽히 체득하고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위해 나의 지식을 심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그녀는 스위스 바젤 디자인 학교에서 볼프강 바인가르트에게서 디자인을 배웠다). 1970년대 중반 나는 스스로 ‘여성 디자이너’라는 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가장 집중하고 염두에 둔 것은 좋은 프로젝트를 의뢰받아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만일 좋은 포트폴리오와 작업을 수행할 에너지만 있다면, 남성이 대부분인 세계에 서도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용기를 내려고 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디자인을 새롭게 시도하는 것에 열광한다.

‘유리 천장’이란 용어는 1970년대에 나왔다. 1970년대부터 활동해온 당신은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유리 천장’을 느낀 적이 있나?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결코 유리 천장을 경험한 적이 없다. 내가 한 일을 사랑한다면, 일과 기회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찾아올 것이라고 지금까지 쭉 믿으며 살았다. LA에서 남성 고객은 여성인 나에게 일을 맡기는 이유를 말해주곤 했다. 여자와 일하는 것이 신선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남성 직장 동료나 남성 경쟁자들이 나보다 더 높은 보수를 받는다는 걸 알았다. 금전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는 없었다. 남성 디자이너보다 적은 보수를 받게 된 것은 단순히 내 성별이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협상에 뛰어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자인업계에 성별에 따라 보수가 다른 심각한 불평등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건 사실이다.

디자인을 전공한 학생 중에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현장에서 여성 디자이너 리더를 찾기 어렵다. 그들이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틀릴지 모르겠지만 미국과 아시아는 상황이 좀 다르다. 나는 미국에서 상당히 많은 젊은여성 디자이너를 봤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도 있고,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간 단계 경력의 현역도 있다. 디자이너 일을 중도에 그만두는 여성이 아시아만큼 많지 않다. 개인적으로 아시아 여성은 미국 여성보다 결혼, 육아 등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따르는 문화가 강한 듯싶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대부분의 여성이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계속해서 전진한다. 하지만 직장에서 만족스러운 경력을 쌓으면서 가사와 양육도 포기하지 않는 ‘모든 것을 갖고자 하는’ 여성에게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탄력적인 근무 시간, 출산 휴가 같은 실질적인 도움 말이다. 게다가 전업주부의 전통이 이어지지 않도록 문화적인 지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에이프릴 그레이먼은 1986년 잡지 <디자인 쿼터리Design Quatery>에서 ‘말이 되는 걸까?(Does It Make Sense)’라는 포스터를 발표했다. 본인의 나체 사진을 이용해 디지털 콜라주 이미지를 선보인 이 작업을 두고 스티븐 헬러(Steven Heller)는 ‘그래픽 디자인을 통해 자기 표현적인 내용을 담아낸 시금석 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디자이너로 성장한 에이프릴 그레이먼은 유리 천장을 부인했다. 그녀가 유리 천장을 부순 디자이너이기 때문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디자인업계에 만연한 남녀의 보수 차이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1948년생인 그녀는 그래픽 디자인의 범주를 넘어 최근에는 건축, 공간, 사진, 동영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431호(2014.05)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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