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즈의 격을 높이다, 중세 미술품 갤러리 ‘레 정뤼미뉘르’

유럽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필사본과 역사적 주얼리를 전문으로 하는 갤러리 레 정뤼미뉘르는 올해 프리즈 서울 세 번째 참가를 알렸다. 작품의 다양성과 품질로 높은 신뢰를 얻어 시카고와 뉴욕까지 확장했으며, 특히 '프리즈 마스터스' 섹션에서 프리즈의 격을 한 차원 높인 주인공 산드라 하인드만을 만났다.

프리즈의 격을 높이다, 중세 미술품 갤러리 ‘레 정뤼미뉘르’

유럽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필사본, 세밀화, 역사적인 주얼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갤러리 레 정뤼미뉘르(Les Enluminures)는 제 1회 프리즈 서울(Frieze Seoul)부터 참여해 올해로 세 번째 참가를 알렸다. 산드라 하인드만(Sandra Hindman) 회장이 30년 전 프랑스 파리에 처음 설립한 갤러리 레 정뤼미뉘르는 작품의 다양성, 높은 품질 및 출처 보증까지 컬렉터들의 두터운 신뢰도를 쌓으며 시카고, 뉴욕까지 지점을 확장했다. 프리즈에서 컬렉터뿐 아니라 일반 관람객들도 백미로 꼽는 섹션은 바로 ‘프리즈 마스터스’. 3년 연속 프리즈 마스터스에 참여하는 레 정뤼미뉘르는 말 그대로 걸작들만 모아놓는 전시품들 사이에서 프리즈의 격을 한 차원 높이고 있다. 어린아이가 난생처음 동화책과 사랑에 빠지듯, 중세 출판물을 처음 마주한 순간을 황홀함이라 표현하는 산드라 하인드만 회장을 만나 인터뷰를 나누었다.

Interview with

산드라 하인드만 레 정뤼미뉘르 갤러리 회장

산드라 하인드만은 유럽 중세 및 르네상스 채색 필사본과 주얼리 분야의 전문가다. 노스웨스턴 대학교 미술사학과 명예교수이자 전 세계에 지점을 둔 레 정뤼미뉘르 창립자 및 회장. 채색 필사본과 중세 반지에 관한 수많은 논문은 물론 십여 권의 학술 서적을 저술 및 편집한 바 있다. 2018년에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그녀를 기리는 전시회 ‘손끝에서 만나는 중세 세계 : 산드라 하인드만의 채색 필사본 컬렉션’을 개최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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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라 하인드만 회장
작년에 이어 올해도 프리즈 서울에 참여합니다. 한국과는 이전부터 인연이 있으셨다고요.

몇 년 전 인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개관을 준비하다는 소식을 듣고 긴밀히 소통한 적이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제가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 중 세계 최초의 시간경 기도서를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영구 소장하게 되었고요. 박물관이 소장한 기도서는 중세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불리는 아주 중요한 기도서 중 한 권이었는데요. 제가 알기로 한국에서 이러한 중세 필사본을 소장한 곳은 이곳이 처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때의 인연으로 저는 ‘한국이 어느 나라보다도 새로운 것을 빠르게 습득하고, 자신들만의 전통 유산뿐 아니라 전 세계 문화유산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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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기욤 2세 몰레의 시간경 기도서 (트루아), 라틴어, 양피지에 채색 및 필사, 프랑스, 리옹, 1480-1490년경
(오) 기욤 2세 몰레의 시간경 기도서, 프랑스, 리옹, 1480년 – 1490년 경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관련된 장면 ©Les Enlumin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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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기도서 모습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재작년과 작년에는 프리즈 참가로 한국에 들어왔다가 서울 여러 미술관 투어를 했는데 그중 간송 미술관과 리움 미술관 보존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조선시대 고문서에 사용된 안료와 중세 시대 유럽에서 사용했던 안료가 비슷한 특징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었죠. 물리적 거리는 멀지라도 문화적 연관성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던 기억이 나요. 시간이 조금 걸릴지라도 향후 한국의 기관 및 박물관들과 협업을 적극적으로 이어나갈 계획이에요.

지난 두 번의 프리즈 서울은 회장님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나요?

프리즈 현장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기 때문에 관람객이 최대한 쾌적하게 볼 수 있게끔 전시를 해두지만, 현장 특성상 가까이서 보거나 질감을 만져볼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해요. 그래서 페어 기간 동안 유독 더 흥미를 보이셨던 일반인 분들이나 컬렉터가 있으면 다음 봄 시즌에 한 번 더 들어와 프라이빗하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몇 번 가지기도 했죠. 그 과정에서 느낀 건 유럽이나 미국 고객들 보다 아시아 고객들은 더 인간관계에 대한 신뢰를 쌓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였어요. 특정 컬렉터의 이름을 언급할 순 없지만 제가 한국에서 만난 모든 컬렉터는 모두 다 인상적인 분들이었고요.

지금 한국에 중세 시대 미술품, 예술품을 소장하는 컬렉터가 있냐고 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하지만 지난 두 차례의 프리즈 서울을 통해 한국 사람들의 중세 미술품, 예술품에 대한 관심도가 엄청난 속도로 상승했다는 걸 느끼고 있고,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한국 안에서도 이 시장이 금방 성장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국 시장을 계속해서 기대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또한 국립 세계문자 박물관이 기도서를 소장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우리 갤러리가 신뢰를 얻고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정말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미술 시장에서 중세 시대 미술품에 관한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유럽에서도 중세 시대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에요. 훈련과 교육이 필요한 종류의 수집인 만큼 매우 소수의 사람들이 취급하는 품목이죠. 한국에서도 이러한 수집 활동이 왕성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봐요. 제가 작년에 서울대학교 특별 강연을 진행한 적 있어요. ‘중세 필사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었는데 그 강연을 들었던 한 학생이 이번에 미국으로 유학을 오면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중세 시대 필사본을 전공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면서요. 이렇듯 중세 시대 유물 혹은 예술에 대한 관심이 오로지 수집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닌, 교육이나 연구자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 또한 시장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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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정뤼미뉘르 뉴욕 갤러리 ©Les Enlumin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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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Master of Raphaël de Mercatellis Group (active Ghent and Bruges, 1470–1510) $18,000.00
(오) Book of Hours (use of Paris) $110,000.00 ©Les Enluminures
30년 전 중세 미술품 갤러리를 오픈한 계기가 기억나시나요?

20대 초반 중세 미술을 전공하면서 자연스레 중세 미술품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어요. 중세 필사본의 마법 같은 면에 매료되었달까요?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강의를 진행하면서 이 필사본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는 일이 좋았어요. 그렇게 자연스레 딜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 같아요. 필사본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의미 있는 일이거든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필사본 안의 그림들이 중세 시대 사람들에겐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그림일 수도 있거든요. 애초에 그림이 들어간 책 자체가 드물었으니까요. 여기 들어간 파란색 안료는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라는 청금석을 갈아 만드는 건데 그래서 보석처럼 반짝거려요. 이런 디테일 하나하나에 매료되어 이걸 다루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예술은 인간의 경험과 연결되고, 유물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이들의 중요한 역할인데 우리는 오감을 통해 경험하기에 더욱 중요한 부분이고요. 이번에 한국에 조금 일찍 들어와 아름지기 재단 전시에도 다녀왔어요. 그들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이야기를 하듯 제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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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Enluminures
레 정뤼미뉘르를 찾는 주 고객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이 중세 유물들을 과시용으로 수집하는 분들은 극히 드물어요. 진짜 이 작품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이를 소장하고자 하는 거죠. 그래서 어떤 컬렉터 만났는데 오래되어 보이는 반지를 무심하게 끼고 있어요. 그래서 물어보면 15세기 반지를 끼고 있는 거죠. 이런 식으로 모셔놓고 과시하는 용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함께 하는 장신구이자 작품으로 여긴다는 거죠. 필사본을 구매한 사람들도 유리 케이지에 전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서재 어딘가에 무심하게 꽂아 놓는 거죠. 값어치를 따지기 보다 경험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가치를 알아보는 분들이 많이 찾아와요. 어떻게 보면 혼자 즐기는 게 더 즐거운 수집품이죠.

컬렉션을 수집할 때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고 소장하나요?

가장 중요한 건 굿 컨디션(Good Condition), 그리고 아티스틱 퀄리티(Artisrtic Quality). 당연히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야 하죠. 중세 시대 페인팅 작품들은 손상을 입어 수리가 필요한 경우가 많아요. 대개는 수리나 복원이 안된 경우가 잦아서 작품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는 편이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프로비넌스(Provenance)인데요. 업계 전문 용어로 쉽게 말해 소장 이력을 뜻해요. 이 작품을 누가 마지막으로 소장했었는지 이력을 추적할 수가 있거든요. 이력이 깨끗하게 추적되는 작품만 소장하죠. 장물이나 도난 물품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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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dant with The Annunciation miniatures by Valerio Marucelli (1563-1626)
메디치 가문이 유럽 전역의 가톨릭 중심지에서 고위 인사들에게 수여하기 위해 특별히 50개 한정으로 제작되었던 선물. 구리 표면 위 섬세한 붓질과 기름 물감으로 정교한 작업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85,000.00 ©Les Enlumin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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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llaume de Lorris and Jean de Meun, with interpolations of Gui de Mori, Roman de la Rose ©Les Enlumin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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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of Hours (use of Rome) 라틴어로 쓰인 양피지 필사본.
14개의 전체 페이지 미니어처와 전체 테두리, 그리고 ‘Beady Eyes 마스터’들의 스타일로 그려진 11개의 작은 미니어처. 1460-1470년경 남부 네덜란드, 헨트 또는 브뤼헤. $135,000.00 ©Les Enluminures
마지막으로, 올해 프리즈 서울에 출품한 신작 일부를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장 세몽(Jean Semont)에 의해 제작된 3개의 채색 삽화와 모든 페이지에 테두리 장식이 들어간 <로망 드 라 로즈(La Roman de la Rose)>는 프랑스 문학책이에요. 1203년 기욤 드 로리스(Guillaume de Lorris)에 의해 고대 프랑스어로 처음 쓰인 책이고 장미를 찾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은유가 들어간 로맨스 소설이에요. 여기에 들어간 삽화를 제가 정말 좋아해요.(웃음) 로맨티스트가 침대 위에 누워있고, 그 위로 사랑을 의미하는 중세 시대 문양이 들어가 있죠.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그림 속 의미들을 발견하는 게 너무 즐거워요.

그리고 <Book of Hours>는 시간경 기도서라고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써 놓았던 책인데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책이었어요. 쉽게 말하면 중세 시대의 베스트셀러였달까요. 얼마나 중요했냐면 결혼을 할 때 혼수품으로 가져가거나, 엄마가 딸에게 물려주거나 하는 집안의 가보와도 같은 책이었죠. 그래서 집집마다 이 책 한 권쯤은 다 가지고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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