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아트북의 전설, ‘슈타이들’의 모든 것
그라운드시소 서촌 〈슈타이들 북 컬처 | 매직 온 페이퍼〉전
종이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게르하르드 슈타이들과 그의 출판사 슈타이들이 추구하는 책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를 담은 전시가 2025년 2월 23일까지 그라운드시소 서촌에서 열린다.
지난 50여 년간 종이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남자가 있다. “책은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예술 작품”이라고 말하는 게르하르드 슈타이들(Gerhard Steidl)은 타협 없는 완벽주의와 장인정신으로 책을 만드는 독일의 인쇄·출판 분야 마스터이다.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술관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미술관에서부터 샤넬, 펜디 등의 럭셔리 브랜드, 그리고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 칼 러거펠트(Karl Lagerfeld), 짐 다인(Jim Dine), 로니 혼(Roni Horn), 데미안 허스트(Demian Hierst)와 같은 저명한 아티스트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할도르 락스네스(Halldor Laxness)와 귄터 그라스(Gunter Grass) 등이 출판물을 만들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떠올린다.
“슈타이들과 함께 책을 제작하는 것은 아티스트의 커리어가 정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_ 세계사진협회(World Photography Organisation)
게르하르드 슈타이들은 용지와 책 커버에서 레이아웃과 디자인, 교정 및 인쇄에 이르기까지 전 단계를 직접 감독하며, 이 모든 작업 공정은 그가 1968년 독일 괴팅겐에 설립한 출판사 슈타이들(Steidl)의 ‘한 지붕’ 아래에서 일어난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문자 그대로 슈타이들의 모든 책은 그의 손을 거쳐 인쇄소와 제본소가 포함된 슈타이들빌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라운드시소 서촌에서 게르하르드 슈타이들과 그의 출판사 슈타이들이 추구하는 책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를 담은 전시 〈슈타이들 북 컬처 | 매직 온 페이퍼(Steidl Book Culture | Magic on Paper)〉가 열리고 있다.
현재진행형의 역사, 게르하르드 슈타이들과 ‘슈타이들’에 대해
포털 사이트에 ‘게르하르드 슈타이들’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그가 하얀 가운을 입고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연구원처럼 세심하게 종이를 다룬다. 게르하르드 슈타이들은 1950년 독일 괴팅겐에서 태어났다. 18세에 그래픽 아트와 포스터를 위한 출판사이자 실크스크린 인쇄 작업장인 슈타이들을 설립했다. 출판사는 2021년 독일 문화부에서 수여하는 ‘독일 출판상(Deutscher Verlagspreis)’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늘날 슈타이들은 출판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출판사 중 하나로, 슈타이들의 목표는 사진, 예술, 패션, 문학 분야의 예술가와 작가의 꿈을 실현하고, 책 형태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한때 사진작가를 꿈꾸기도 했던 게르하르드 슈타이들은 2020년, 비(非)사진작가 최초로 소니 월드 포토그래피 어워드(Sony World Photography Awards)에서 사진공로상을 받았다. 2023년에는 독일사진협회의 정회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2021년 6월 개관한 쿤스트하우스 괴팅겐(Kunsthaus Göttingen)의 설립자이자 창립 이사이기도 하다. 게르하르드 슈타이들은 큐레이터로서 전 세계에서 사진전을 기획하기도 하며 현재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슈타이들 전시
〈슈타이들 북 컬처 | 매직 온 페이퍼〉는 게르하르드 슈타이들의 디렉팅과 큐레이션을 거친 전시다. 〈베르크(WERK)〉 매거진을 이끌며 다양한 지류와 인쇄 기술을 실험적으로 조합하는 싱가포르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인 테세우스 찬(Theseus Chan)은 전시장 내·외부 드로잉을 포함한 아트 디렉팅으로 참여했다. 이번 전시는 슈타이들 책에 대한 전시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앤디 워홀, 짐 다인, 에드 루샤(Ed Rusha)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아트북 오브제 ‘멀티플(Multiple)*’ 25점 이상을 선보이며, 10년 여의 제작 기간 끝에 완성된 데미안 허스트의 멀티플 〈파머시 런던(Pharmacy London)〉은 세계 최초로 공개된 것이다.
*멀티플은 슈타이들이 아티스트와 기획부터 함께 만드는, 아티스트의 서명이 포함된 한정판 예술품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shamp)이 제작한 소형 에디션 ‘여행 가방 속 상자(Boîte-en-valise)’와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가 종이상자에 여러 아티스트의 오브제를 채워 만든 ‘플럭스 박스(Flux Boxes)’의 전통을 이어 상자, 슬립케이스, 여행가방 등에 담긴 여러 권의 책 형태로 제작된다.
펜디, 돔 페리뇽 등의 브랜드와 함께 만든 ‘팩토리 북’도 전시된다. 브랜드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버켄스탁의 멀티플 〈오래된 공장은 죽지 않는다(Old Mills Never Die)〉 역시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이다.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슈타이들이 제작한 아트북, 문학책, 매거진들 중 엄선된 책, 그리고 책을 예술로 만드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 전시장에 그대로 재현된 슈타이들빌의 가장 상징적 공간인 ‘라이브러리’ 등을 통해 슈타이들의 북 컬처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감으로 경험하는 아트북
게르하르드 슈타이들은 전시를 통해 책을 오감으로 경험하게 한다. 슈타이들빌에 도착한 종이는 인쇄되기 가장 적합한 상태가 될 때까지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는 창고에 보관된다. 게르하르드 슈타이들은 페이지가 조금이라도 울면 잉크를 담기에 적합한 온도에서 종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엄격하게 관리되는 종이를 관람객들은 전시장에서 직접 만지고 넘기고, 여기에 인쇄된 슈타이들 책 특유의 잉크 냄새를 맡는다. “세상 최고의 향은 방금 인쇄한 책에 있다”고 말한 칼 라거펠트의 말에 비로소 공감할 것이다.
“햇살이 좋은 날, 공원이나 테라스에 앉아 잘 만들어진 책이나 신문을 읽는다고 생각해보라.
_ 게르하르드 슈타이들
그것이야말로 진정 럭셔리한 일이다.
종이의 질감, 냄새, 아름다운 폰트, 잘 인쇄된 색상과 이미지가 주는 즐거움 등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채워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성은 디지털이 아무리 발전해도 채워질 수 없다.”
〈슈타이들 북 컬처 | 매직 온 페이퍼〉는 내년 2월 23일까지 그라운드시소 서촌에서 진행된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감상하며 슈타이들이 펼친 종이 위의 마법을 경험해보자. 성큼 온 가을은 이 아름다운 책들을 마주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