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재단 ‘라 베리에흐’의 〈엠퍼샌드〉전

‘그리고’라는 연결, 지속, 단합의 예술

에르메스 재단이 운영하는 벨기에 브뤼셀의 전시공간 라 베리에흐(La Verrière)는 큐레이터 조엘 리프(Joël Riff)에 의해 3개월마다 ‘증강된 솔로(solos augmentés)’라는 테마에 맞춘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에르메스 재단 ‘라 베리에흐’의 〈엠퍼샌드〉전

한 명의 주인공과 주인공을 서포트하는 조연들로 짜인 연극의 구성처럼 메인 아티스트 한 명과 그와 연계성을 가진 외부 아티스트들이 초청되는 것이 ‘증강된 솔로’의 특징. 이번 여섯 번째 전시의 주인공은 프랑스 아티스트 엘렌 베르탱(Hélène Bertin)이다. 로마의 빌라 메디치(Villa Medici)에서 보낸 1년간의 레지던스 작업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전시장의 모습은 관객을 새로운 차원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빌라 메디치에서 작업 중인 엘렌 베르탱, 2024 courtesy de l’artiste © Daniele Molajoli
빌라 메디치 레시던스 전경, 2024 courtesy de l’artiste © Giulia Gaibisso

개념 미술가 엘렌 베르탱의 예술적 접근은 집단성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학문적 독해보다 자발적인 행동으로 관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작업을 발전시키며 타자성의 개념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특징인데, 2023년 9월부터 2024년 7월까지 사계절을 넘나들며 1년간 빌라 메디치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또한 이에 기반을 두고 로마라는 지역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며 수집가의 태도로 정보를 수집했다.

스스로 ‘야생’의 수집가라고 설명하는 그녀의 수집 방식은 좀 특별하다. 사물이 자라는 땅과 사물이 지향하는 하늘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행위들을 관찰하고 실용주의적 범위 내에서 조각품을 만든다. 그렇게 빌라 메디치에서의 시간은 로마 외곽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행동과 그 지역의 전통 춤인 탐무리아타(Tammurriata)의 춤 선을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자연 속 오브제들을 채집해 전시에 놓일 조각품을 위한 재료로 사용했다. 즉시 이용 가능한 천연 자원의 수확이라 함은 현재 우리들의 삶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구식의 생활 방식으로 인식되지만 엘렌에게 이 시도란 진보에 대한 끈질긴 저항이자 제스처의 해방으로 여겨진다. 이는 또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무정부적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전시 제목 ‘엠퍼샌드(Esperluette)’는 이런 수집과 협력이라는 작가의 방향성을 함축해 말해주는 듯하다. 하나가 아닌 여럿의 생각과 행동이 합체되면서 발생하는 강렬한 시너지. 개인의 정체성에 충실했던 단수의 무언가가 복수형이 되는 과정은 하나의 레이어에 여러 개의 레이어가 겹쳐져 수십 겹의 단단하고 풍성한 결과물로 완성되는 것이다. ‘증강된 솔로’ 전시의 목적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고도 할 수 있다. 큐레이터 조엘 리프는 이런 이유로 엘렌 베르탱을 처음부터 라 베리에흐의 전시 작가로 염두에 두었다고 귀띔했다.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빌라 메디치 레지던시 활동의 연장선이 된 전시 〈엠퍼샌드〉가 열리는 라 베리에흐는 로마에서 실천해 온 관찰과 수집의 집결지가 됐다. 마을의 광장처럼 변신한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중앙에 설치된 커다란 나무 기둥이다. 이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늘어진 패브릭과 그중 네 개의 끈에 연결된 도자기 네 점은 이 주변에 어떤 숭고한 집단적 행위가 벌어질 것 같은 상상을 하게 한다. 도자기의 형태는 시대적 배경을 예상하기 어려운 원시적인 형태와 질감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런 결과물을 위해 모든 세라믹 작업은 프랑스의 오래된 도자기 마을로 알려진 라 보른(La Borne)에서 나무를 장작으로 사용하는 가마를 통해 전통 방식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일반 전기 가마가 아닌 전통 가마를 선택했다는 것은 조엘 리프가 ‘증강된 솔로’ 기획에 가장 집중하는 ‘제스쳐’와 ‘마티에르’라는 키워드가 엘렌 베르탱의 예술적 연구에도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그리고 벽에는 수집한 나무 조각을 사용해 일종의 부호처럼 보이도록 완성된 작품들이 채워졌다. 의사소통의 목적을 가진 시각적 표현의 작품들은 마치 고대 동굴 벽에 그려진 인류의 첫 번째 표현 중 하나인 벽화를 연상시킨다. 작가가 연구한 전통 농민 춤인 ‘탐무리아타’에서 본 댄서들의 파종하고 수확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모습은 이들이 춤과 모임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의미에 감동받은 작가의 표현이다.

벽에는 나무 조각품 외에도 식물로 제작된 오브제, 말린 꽃으로 구성된 대형 리스, 식물 패턴이 그려진 패브릭 등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자연에서 온 자연의 색을 담고 있는 오브제들은 그것이 발췌된 지역의 단순함과 풍요로움, 겸손함과 고귀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를 최대한 조화롭고 예술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엘렌 베르탱은 다섯 명의 아티스트 및 공예가들과 협업을 제안했다. 목수 안느 블라네(Anne Blanès), 도예가 캐롤린 뉘스바우머(Caroline Nussbaumer), 식물 재배가 알린 카도(Aline Cado), 작곡가 마리옹 쿠쟁(Marion Cousin), 천연 염색 전문가 롤라 베르스트레펜(Lola Verstrepen) 으로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 이유에서인가 전시장에서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 Isabelle_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 Isabelle_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 Isabelle_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지금까지 다섯 번의 ‘증강된 솔로’ 전시를 거치면서 조엘 리프는 메인 아티스트 외에 그와 연계성을 가진 외부 아티스트들 또한 직접 선택해왔다. 하지만 이번 〈엠퍼샌드〉전에는 엘렌 베르탱에게 모든 선택권을 넘겼다. 전권 위임이라는 까르트 블랑쉬(carte blanche) 형식을 취한 이유는 이미 협업이 그녀의 작업의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다섯 명의 협업자들은 이미 엘렌과 작업을 지속해오면서 오랜 우정을 쌓아온 이들이다. 이 작지만 단단한 공동 예술 커뮤니티를 통해 한 아티스트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작업물이 네트워크를 통해 한곳에 모여 개체가 분리되고 또 조립되면서 그 자체가 가시화되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전시 오프닝에서 작곡가이자 뮤지션인 마리옹 쿠쟁이 롤라 베르스트레펜이 천연 염색으로 제작한 스커트를 입고 중앙의 나무 기둥을 돌며 북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남부 작은 시골 마을의 춤 추고 수집하는 사람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곳의 땅이 연상되면서 그 땅에서 자란 감초, 레몬 나무, 올리브나무, 검정 소나무가 걸린 벽면의 작품들은 현장을 느끼게 해준다. 그곳의 바람과 태양, 향기가 상상으로 전달된다. 작가가 공유한 경험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흡입되는 순간이다.

타이틀 ‘앰퍼샌드’는 ‘커뮤니티 안에서 공유한 경험’이라는 실험적 리서치에 집중한 십 년이 넘는 시간을 함축하고 있음과 동시에 예술가와 큐레이터 사이에 구축된 신뢰의 관계도 설명한다. 앰퍼샌드 ‘&’는 등위 접속사 ‘and’를 두 문자를 병합, 증폭시키는 인쇄 문자다. 합자를 통해 두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연결을 입증하는 시각적, 어휘적 환상을 이끌어내는 이 문자는 결합과 조화를 설명한다. 한쪽에 기울지 않으면서 각각의 중심을 지키고, 결합된 두 용어를 동일시하는 역할.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실체는 미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완벽해 보인다.

엠퍼샌드 Esperluette
기간 2024년 9월 13일 – 11월 30일
장소 라 베리에흐(50, boulevard de Waterloo 1000 Brussels Belgium)
큐레이터 조엘 리프
웹사이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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