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미술문화공간 서울, 복합문화공간이 된 박서보 화백의 성산동 작업실
박서보 화백의 예술적 유산을 잇는 서보미술문화공간 서울이 이향미 작가의 회고전 〈색의 무게, 불가항력에 맞서는〉의 시작과 함께 지난 9월 27일 문을 열었다. 박서보 화백의 작업실을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선보이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박승조 서보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로변에서 한 블록 들어간 성산동 한적한 골목, 노출 콘크리트와 목재를 사용한 건물이 존재감을 내뿜는다. 툭 튀어나온 중심 매스는 창문도 없이 검은색으로 칠한 목재로 마감되었다. 최소한의 구성 요소로 완성된 듯한 이 건물은 누군가의 작품을 건축으로 구현한 것 같다. 이곳은 지난해 타계한 단색화의 거장 故 박서보 화백이 1997년부터 2019년까지 사용하던 작업 공간이다.
박서보 화백의 작품 세계의 중심인 묘법 시리즈를 완성하고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킨 작업실이 지난 9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박서보 화백이 사용하던 의자가 놓인 전시장이 펼쳐진다. ‘서보미술문화공간 서울’은 박서보 화백의 예술적 유산과 그가 남긴 창작의 흔적을 보존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창작을 지원하기 위해 서보미술문화재단이 운영한다.
Interview
박승조 서보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지난 7월 ‘서보미술문화공간 제주’를 먼저 선보였습니다.
서보미술문화공간 제주(제주시 저지14길 23-4)는 화백님이 생전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사용했던 저지문화예술인마을 내 ‘화가박서보의 집’ 맞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2층에는 찻집 ‘비원’이 있어 큰 창을 통해 울창한 숲 풍경을 바라보며 차 한잔을 할 수 있지요. 전시 공간에서는 박서보 화백의 일대기를 탐구할 수 있는 아카이빙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서보미술문화공간 서울’은 어떻게 구성되었나요?
서보미술문화공간 서울은 예술 창작과 지역 사회와의 소통을 위한 플랫폼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동관에서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전시와 공연 등을 통해 창작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팝업 스토어를 비롯한 여러 행사와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주민들에게 풍부한 문화 경험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동관은 2019년까지 박서보 화백의 작업실로 쓰였던 곳이라고요.
박서보 화백은 1994년 서보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본인의 작업실로 사용할 목적으로 이 공간을 건축하셨어요. 2019년 연희동 저택으로 옮기시기 전까지 1997년부터 22년 동안 이곳에서 중요한 묘법 시리즈, 특히 검은색 중심의 묘법과 2000년대의 색묘법 시리즈를 완성하셨지요. 이 공간은 단순한 작업실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박서보 화백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 깃든 장소로서, 이러한 가치를 보존하고자 복합문화공간으로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작업실 모습도 궁금한데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복층이 원래는 수장고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작업실은 온전히 화백님의 창작 활동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1층은 층고가 매우 높아 대작을 맘껏 그릴 수 있는 작업 공간이었어요. 작품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지하 수장고 외에도 작품을 보관할 공간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1층 중앙부 공간은 천장까지 열린 채로 두고, 벽을 따라서 복층으로 둘렀지요. 중앙부를 그대로 살린 이유는 채광을 받기 위함인데, 이는 화백이 작업에서 의도한 색을 정확하게 구현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복도형 복층 수장고가 만들어졌습니다. 기존 2층에는 주거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어요. 화백의 하루는 작품 창작을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곳은 작품 창작에 몰두한 그의 삶이 고스란히 반영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업실을 서보미술문화공간으로 리뉴얼하며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요?
리뉴얼 과정에서 중점을 둔 것은 박서보 화백의 예술혼이 담긴 공간을 가능한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산동 작업실은 화백님의 역사가 깃든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에 작업 중 바닥에 흘린 페인트 자국이나 화백님이 좋아하던 문구가 적힌 메모들, 그리고 페인트가 잔뜩 묻은 의자까지 모두 그대로 보존해 설치했습니다. 또한 2층 주거 공간도 원형을 최대한 살려 작가 레지던스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쓰임을 더하며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요?
작업실 원형 보존을 목표로 삼았지만 전시와 공연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수용하기에는 보완이 필요했지요. 전시를 위한 제반 시설 확충과 공연을 위한 음향 설계에 집중했으며 천장에는 대형 디스플레이를 설치해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관람객들의 편의를 고려해 한 개 층을 증축해 엘리베이터와 휴게 공간, 옥상 정원 같은 부대시설을 마련했고요. 또 리모델링 전에는 담으로 막혀 있던 외부 공간을 도로변 건물과의 협의를 통해 담을 제거했어요. 이 지름길은 ‘예술길’로 명하여 지역 주민들의 교통 편의를 높이고 공공의 목적을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천장에 설치된 디스플레이 패널은 어떻게 활용되나요?
대형 패널은 공간 전체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며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비추는 빛 역할로 설계했습니다. 단순히, 직관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변화에 대응하며 공간의 분위기를 조절할 수 있는 빛의 수단으로 LED 패널을 선택한 것이지요. 천장에서 바닥을 향해 설치해 마치 천장에 커다란 창을 낸 느낌을 주도록 의도되었습니다. 또한 상하로 이동할 수 있어서 공연이나 행사 시 다양한 방식의 연출이 가능합니다.
조경 디자인에도 특별히 신경을 쓰셨다고요.
서보미술문화공간 서울 앞에 자리한 성미산에는 봄이면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합니다. 차경 개념을 도입해 성미산의 봄날 풍경,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공간 내부로 끌어들였습니다. 정원에는 화백님의 예술적 열정을 상징하는 수종을 선택했어요. 강직한 집념을 상징하는 대나무와 소나무, 겉과 속이 같은 배롱나무를 심어 화백님의 예술혼을 조경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현재 이향미 작가(b. 1948~2007)의 회고전이 개관전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며 당시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서보 화백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죠.
이향미 작가님은 1970~80년대에 ‘색의 오브제성’을 깊게 연구하고 추상과 실험 미술을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전개하셨어요. 이번 회고전에서는 미공개 작품을 포함한 50여 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예술 세계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특히 작가님의 대표 작품인 ‘색 자체’는 다채로운 색감이 인상적이에요. 작가의 물리적 개입을 최소화한 ‘흘림’의 행위가 화면 위에 남긴 흔적을 직접 눈으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과거 작업실이었기 때문인지 동관 전시장은 일반 전시장과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전형적인 갤러리의 화이트 큐브식 폐쇄된 백색 전시 공간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외부로 확장되는 개방성, 한 덩어리로 인지되는 복층 공간과 중앙홀 공간의 유기적 통합성, 관람객들의 아이컨택을 의도적으로 유도한 각 공간의 심리적 시각적 연결성, 전시실 안에서도 길 건너편 성산의 푸른 숲을 볼 수 있도록 시선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시각적 개방성 등이 디자인의 주요 컨셉입니다.
동관 3층에 찻집을 준비 중이라고요. 앞으로 서보미술문화공간 서울은 어떻게 운영되나요?
네, 3층에 찻집 ‘비원’을 준비 중입니다. 서관 1층에 위치한 카페 ‘시츠프로브’와 함께 방문객들에게 휴식과 함께 미각을 즐겁게 할 특별한 음료와 다과를 제공할 예정이에요. 앞으로 서보미술문화공간 서울은 박서보 화백의 예술적 유산을 기리며, 마포구 성산동의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합니다. 다가오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소의 역할을 하며, 다양한 문화 예술 분야가 서로 소통하고 충돌하며 새로운 영감을 주고받는 장소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