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리미티드 에디션 이로 기획자
무한한 모순과 역설
지난 1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언리미티드 에디션: 서울아트북페어'가 열렸다. 올해로 16회째 행사를 이끌고 있는 유어마인드 이로 대표를 만났다.
이로 대표는 고민이 많았다. 독립 서점 ‘유어마인드’를 운영하면서 매일같이 독립 출판 창작자와 독자 사이의 불협화음을 목도한 탓이다. 독립 출판 창작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독자들은 이들의 결과물이 불친절하다고 느꼈다. 지나칠 정도로 개인적인 문법과 소통 방식이 낳은 오해였다. 당시 홍대 이웃 주민이었던 프로파간다 김광철 대표를 만나 고민을 털어놨다. 뜻밖에도 그는 5분 만에 명쾌한 답을 내렸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해결해야 하니 페어를 기획하라는 것. 올해로 16회를 맞이한 ‘언리미티드 에디션: 서울아트북페어’(이하 UE)는 그렇게 시작했다. 2009년 900명 남짓한 방문객과 함께 시작한 이 행사는 이제 2만 명 넘게 몰리는 국내 독립 출판의 대표 행사로 자리 잡았다. 지난 1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행사에는 2만 3000여 명이 방문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지만 이 놀라운 성취에도 이로와 UE는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기를 자처한다. 인터뷰를 빌미 삼아 폭발적 성장에도 성장 지상주의에 회의적이고, 안정화된 시스템에 오히려 불안을 느끼는, 모순과 역설의 중심에 서 있는 이 기획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봤다.
무덤덤하게 이끈 16년
UE가 올해로 16회를 맞이했습니다. 소감이 궁금하네요.
글쎄요. 제 장점이자 동시에 약점 중 하나가 무슨 일이든 크게 의미 부여를 하지도, 동요하지도 않는 것이라.(웃음) UE 역시 비즈니스로 몰두하며 접근했다고 보기 어려운 탓인지 특별한 감흥이 있진 않습니다. 애초에 이 행사를 사업으로 바라봤다면 사무국부터 만들고 성장에 몰두했겠죠. 하지만 제게 이 행사는 일종의 ‘사건’에 불과합니다. 다만 언제까지 이 행사를 끌고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있어요.
그런 무덤덤함이 오히려 행사에 지속 가능성을 부여해준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어떤 성취에 대단한 희열을 느끼다가 성장 곡선이 조금만 수그러들면 금세 절망하는 타입이 있잖아요. 그런 성향이 오히려 지속성 면에서 독이 되는 것 같아요. 페어가 성황을 이룬 해에도 우리는 그냥 소소하게 “재미있었어”라고 소회를 나눈 뒤 넘어가거든요. 대단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바로 다음 행사에 착수하는 식이죠.
유어마인드만 봐도 양적 성장에 연연하지 않는 게 느껴져요. 국내 독립 출판의 대표 행사를 운영하는 기획자가 이끄는 공간치곤 소박해 보인다고 할까요?(웃음)
지나치게 세대론에 기대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제가 지나온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일명 IMF 세대인 데다 유어마인드를 시작한 2009년 역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의 여파로 세계경제 위기를 겪은 해였습니다. 성장의 욕구가 없기보다는 성장만이 답은 아니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형성된 것 같습니다. UE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세계적인 하락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발로가 독립 매체로 나타났습니다. 구독률 등 성장을 기치로 내건 레거시 미디어와 사뭇 다르죠. 독립 출판 시장에선 기본적으로 자생과 유지가 곧 성장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성장 욕구가 없는 것치곤 UE의 양적 성장이 상당합니다. 300명 남짓 모이던 행사가 이제 2만 명 넘는 방문객이 운집하는 행사가 되었어요. 이에 따라 계속 넓은 공간으로 이전해야 했고요.
인위적으로 판을 키운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모이면서 더 이상 공간이 사람을 수용할 수 없을 때 행사장을 옮겼어요. 어찌 보면 떠밀리듯 공간을 옮겼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고도 할 수 있어요.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고 2017년부터 줄곧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페어를 진행했습니다. 사실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간을 베뉴로 선정했을 때 다소 의아했어요.
사실 관이냐, 민간이냐 같은 구분은 저희에게 무의미했습니다. 다만 미술관이라는 특성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페어가 열리는 행사장은 통상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어요. 코엑스 같은 컨벤션 센터, 전문 이벤트 공간 그리고 미술관이죠. 코엑스 같은 넓은 면적을 채우기에는 예산이나 여력이 부족했고 우리의 결과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결국 전문 이벤트 공간과 미술관이 남는데, 전자에 들어가면 우리의 행위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이벤트 중 하나에 불과해요. 행사의 성격은 다를지언정 기본적인 속성은 유사하죠. 반면 미술관에선 원기능과 완전히 반대로 작동합니다. 기본적으로 작품 감상이라는 태도 저변에는 적절한 거리 두기가 작동한다고 봅니다. 관객과 관객, 작품과 작품, 관객과 작품 사이에 일정한 간극이 존재하죠. 그런데 UE 기간에는 이것이 무너져요. 기존 맥락을 다 부수고 작은 규모의 출판사 부스가 빼곡하게 들어서죠. 여기에 2만 명 이상의 사람이 운집하면서 평소와 완전히 다른 양상이 펼쳐집니다. 미술 감상을 위해 이곳을 찾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짧은 기간에 이 ‘사건’이 공간을 장악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죠.
공간 프로그램에 순응하는 게 아니라 역행하는 쪽을 택했군요.
실제로 페어 방문자 중 그다음 주에 전시를 보기 위해 다시 미술관을 찾았다가 놀랐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아요. 분명 공간이 좁다고 느꼈는데 작품 감상을 위해 재차 방문했을 때는 너무나 넓고 쾌적한 것이죠.(웃음) 파인 아트 전시 고유의 거리감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니에요. 양상이 다르고 이에 따른 시너지가 다른 것뿐이죠. 이런 특징 때문인지 참가 팀들도 더 전투적으로 페어에 임하는 것 같아요. 전시장의 맥락을 바꾸는 일원이 된다고 할까요? 사실 거대하고 깔끔하고 플랫한 공간에서 상행위가 일어나는 만큼 우리보다 미술관이 리스크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요새 많은 글로벌 아트북 페어가 미술관에서 열리는 것을 보면 이런 권위 비틀기를 미술관들이 오히려 흥미롭게 여기고 수용하는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와 기획자의 비밀스러운(?) 회동
전복적이고 변칙적인 성향은 비단 공간 외에도 행사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UE의 고질적이고 고약한 특성 중 하나가 고정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로고도, 포스터도 매년 바뀌고, 심지어 웹사이트는 행사가 끝나면 닫아버리죠. 만약 글로벌 회사의 컨설팅을 받으면 절대 해선 안 될 것들로 꼽을 거예요.(웃음)
왜 그런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죠?
불특정 다수보다 이 모든 것을 납득해주는 소수와 강하게 뭉치자는 생각이 강합니다. ‘나는 이런 방식이 재미있어’, ‘그래서 기대되고 기다려져’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가는 것이죠. 그런 이들은 소셜 미디어 계정을 팔로우하고, 알람 기능까지 설정하며 새 소식을 기다립니다. UE는 이처럼 행사를 집중해서 따라오는 이들이 밀집하는 페어입니다. 제가 예전에 모 북 마켓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하루 종일 들은 질문은 이런 것이었어요.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뭐 하는 사람들이죠?” “이 책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하면 먹고살 만합니까?” “인쇄는 어디서 했습니까?” 나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UE는 접근성에 기반한 절대다수를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 모이고 싶은 사람만 모이는 행사이기를 택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즐거워했죠. 사전 조사 과정을 다 뛰어넘어 열기와 언어와 밀도로 소통합니다. 이미 참가 팀에 관해 많은 걸 알고 있고 계속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지방에서, 해외에서 몰려듭니다.
UE는 운영 방식 역시 독특하다고 들었습니다.
5명의 기획단과 4명의 외부 디자이너 및 개발자가 주축이 되어 매년 행사를 기획합니다. 그래픽 디자이너 박선경, 공간 디자이너 박길종, 서체 디자이너 장우석, 웹 개발자 오예슬이 그들이죠. 박선경 디자이너는 계간 〈그래픽〉 디자이너 시절부터 합을 맞춰 올해로 16회째 함께 하고 있는데 특이한 건 보통 그가 올해의 키워드를 제안한다는 사실입니다. 기획단과 디자이너들이 동의하면 그 키워드를 바탕으로 행사를 꾸려나가죠.
금시초문이네요. UE가 해마다 키워드를 선정하는 것은 몰랐어요.
어디에도 공표하지 않거든요. 관람객은 물론이고, 참가 팀에게도 말이죠. 키워드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내부의 자체적인 변화 요소 정도로 이해하는 게 좋아요. 심지어 그 키워드를 전혀 감지하지 못해도 무방해요. 기획자의 키워드는 은유적으로 묻어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참가 팀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도 공표하지 않을 생각인가요?
네, 알려줄 수 없습니다.(웃음)
그나저나 디자이너가 행사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셈이네요.
그렇죠. 그래픽 디자이너가 구상한 메인 이미지가 기점이 되고, 공간 디자이너와 웹 디자이너, 서체 디자이너가 이를 해석하는 방식이 행동의 시작점이 됩니다. 결코 디자인이 전부인 행사는 아니지만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기획 주체뿐 아니라 참가 팀 중에도 디자인 스튜디오의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요. 그것이 UE의 정체성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치는 듯합니다.
작업실유령, 프로파간다 시네마 그래픽스, 프레스룸, 코우너스…. 오랜 기간 꾸준히 참가하고 있는 팀들이죠. 통념상 디자인 스튜디오는 전면에 드러나기보다 기능적 솔루션을 제공하고, 무언가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강한데 UE에서만큼은 자기 색깔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똑같은 부스도 이들이 해석하는 공간은 남다르죠. 방문객의 호응도 마찬가지고. 그 자체로 굉장히 의미 있다고 느낍니다. 유명 소설가의 글을 아름답게 디자인한 책이 현장에서 호응을 얻는 것도 물론 유의미하지만 통상 기능을 담당하던 디자이너가 전면에 나서 새로움을 제안하는 것에 더 큰 희열을 느낍니다.
위기를 기회로
해마다 승승장구한 듯하지만, 사실 UE도 위기를 겪습니다. 팬데믹이 기승을 부린 두 해가 대표적이죠. 행사를 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을 것 같아요.
팬데믹 상황 속에서 독립 출판이라는 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살피고자 했어요. 그래서 2020년에는 온라인으로, 이듬해에는 전시 형태로 행사를 풀었죠. 대안 모색이 가능한 행사라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국제도서전을 온라인 마켓으로 진행했다면 여타 온라인 서점과 충돌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립 출판은 기본적으로 제한적이고 구체적이죠. 온라인 유통이 없진 않지만, 오프라인의 경험을 압도할 수 있는 매개는 부재합니다. 따라서 특정 기간에만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이 온라인으로 옮겨갔다는 것 자체에서 희소성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온라인으로 진행한 UE@HOME는 보여지는 방식도 남달랐어요.
당시 내부에서 합의했던 것은 오프라인의 무언가를 온라인상에서 재현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이를테면 가상의 부스나 VR 체험 같은 것이죠. 그런 것은 온라인 공간의 가능성이 아닌, 무엇을 상기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온라인에서 할 거면 온라인의 성질에 완전히 몰입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온라인 쇼핑몰의 문법을 차용하기로 했어요. 시각적 연출보다 중요한 것은 ‘이걸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대면 상황으로 집으로 배송시키세요”라는 메시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죠. 다만 일상에서 보아오던 온라인 쇼핑몰과 다른 양상을 보여줘야 했기에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설계했습니다. 기존 온라인 몰에서 절대 하지 않는 우연성을 부여하는 것이죠. 일반적인 온라인 쇼핑몰에선 내가 찾는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나열해 효율적인 구매가 이뤄지는 데 주력합니다. 반면 UE@HOME에선 사이트상에서 책 이미지도, 인덱스 페이지도 랜덤하게 펼쳐지는 게 포인트였어요. 메뉴 접근 방식 면에서도 “제목만으로 브라우징해보세요”라든지 “참가 팀이 제출한 키워드만으로 브라우징해보세요”라든지 하는 요소를 설계했죠. 표지, 제목, 작가명, 본문 요약, 가격 등은 최대한 덜어내고 산발적으로 노출했고요. 굉장히 불친절한 방식인데 이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다 보면 예상치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듬해 전시 방식을 차용해 풀어낸 UE 100도 화제가 됐습니다.
정말 많은 관심을 받은 해였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무척 힘들었어요. 주최사가 조닝을 하면 참가 팀이 채우고 방문객이 화룡점정이 되는 이전 행사와 달리 전시를 필두로 주최사가 모든 것을 관장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10여 년간 쌓은 노하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없더군요.(웃음) 감당할 수 있는 폭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 참가 팀을 100팀으로 줄였고, 참가 팀이 제출할 책도 한 종으로 제한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 100권으로 전시장을 채우려고 보니 공간이 너무 넓었습니다. 이전 페어 규모만 생각하고 충분히 공간을 채울 수 있다고 오판한 것이죠. 이때 떠올린 자구책이 100권을 네 번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전 해에 온라인 메뉴를 다르게 짰던 경험을 차용한 것이죠. 방마다 각기 다른 4개의 입력 값을 넣는다고 상정하고 이에 따라 상이한 출력 값이 나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이 4개의 메뉴를 경험한 방문객이 최종 선택하는 책이 무엇일지 보여주자는 콘셉트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행사 모두 우리에게 매우 극단적인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다음 행사를 준비하는 데 큰 자산이 됐습니다.
두 행사의 경험이 실제로 팬데믹 종식 후 치른 행사에서 녹아든 지점이 있었나요?
3년 전부터 진행한 ‘모두의 프로그램’을 들 수 있습니다. 미술관 2층 프로그램 룸에서 진행하는데 9팀 정도의 참가 팀을 프로그램화하는 것이 ‘공식 프로그램’의 골자라면, ‘모두의 프로그램’은 모든 참가 팀이 작은 영역을 제공받아 공간을 꾸미는 것입니다. 참가 팀에게 1시간 정도 시간을 주고 기획자들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죠. 2020년 웹사이트를 통해 무작위로 보여준 인덱스 페이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이곳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참가 팀의 자유에 맡깁니다. 관람객에게는 참가 팀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UE는 독립 출판사의 기본적인 불친절함을 해소하고자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소통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행사이지만 때로는 그 소통이 부담되기도 하더군요. 실제로 2020년 온라인 페어 당시 소위 ‘의리 구매’를 하지 않아서 좋다는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모두의 프로그램’은 소통의 부담에서 한발 떨어질 수 있는 공간인 것이죠.
독립 출판, 어디까지 왔나?
디자인 박선경(EMC) 개발 오예슬
건국대학교 오창섭 교수는 2016년 한국디자인학회에 ‘언리미티드 에디션 활성화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이 행사가 우리 사회의 문화 형성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방증 아닐까요?
기본적으로 UE는 행사가 가진 맥락이나 기여를 자평하는 것을 지양하고 있어요.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규정하면 거기에 종속된다고 생각하고 외부 평가만이 진정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아트북 페어라는 것 자체에 나름대로 의미 부여는 합니다. 예전에는 개인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선 어떤 권위에 탑승해야 했잖아요. 문학을 예로 들면 거대 신문사의 심사위원단이라는 허들을 통과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야 했죠. 지금도 물론 권위가 존재하지만, 그 외에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게 중요합니다. 즉 권위에 기대지 않고 순수하게 개인으로 발화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말도 안 되는 비유일 수 있지만, 저는 UE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같다고 생각해요. 자발적이고 에너제틱하지만 동시에 모든 책임을 개인이 감당한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퀄리티에 대한 판단이나 검열을 오롯이 개인에게 맡기죠. 독립 출판과 아트북은 결국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납니다. 소수의 인원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고, 이게 페어 형태로 성장하면서 호응과 소비가 이뤄진다는 것 자체에 공동체적 감동이 있습니다. UE의 특징 중 하나가 주최 측과 참가 팀, 방문객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탈권위적이고 자발적인 플랫폼이 출판 세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상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대의 흐름 덕분인지 요즘 대형 서점에서도 독립 출판 서적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몸집이 커지면서 생기는 문제도 있을 것 같습니다.
UE가 지나온 15년을 대략 삼등분할 수 있습니다. 처음 5년은 일종의 정착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독립 출판 자체를 인지조차 하지 못한 시기였죠. 소수의 인원이 천천히 독자를 확보하는 개척기였습니다. 중간 5년은 폭발적인 성장기였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화를 자각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흥미로운 시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요. 이후 5년은 다소 산만해진 시기입니다. 이제 독립 출판이라는 말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써야 할지 모르는 시대가 됐어요. 기준이 불분명하니까 독립 출판의 문법만 차용하는 대자본의 수상한 유입도 눈에 보이고요. 앞서 말했듯 UE는 개개인이 권위를 나눠 가진 시대를 등에 업고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기존에 권위를 갖고 있던 브랜드나 기업이 마케팅 키워드로 이 시장을 활용하는 것이 혹 핵심 팬들을 떠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까 우려가 됩니다. 아까 ‘탈권위’를 언급했는데 UE가 양적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혹시나 또 다른 권위가 생기지는 않을까 경계하고 있기도 하고요.
확실히 요즘 독립 출판 시장을 보면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긴 합니다.
이 산업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이죠. 누군가는 시장이 크고 있다고 하고, 누군가는 저물고 있다고 평합니다. 그런데 저는 늘 밝은 면만 보려고 하는 기획자입니다.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특정 분야의 수준을 깡그리 무시하는 발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양적 성장이 이뤄질 때 좋은 작가도, 작품도 필터링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슬아 작가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해요. 10년 전에는 ‘독립 출판계의 스타’라는 수식어 자체가 성립이 안 되었죠. 개인이 이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불분명할지언정 다수가 움직일 때 비로소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는 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