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 아이덴티티 디자인 프로젝트
하이트진로가 테라에 이어 4년 만에 신제품 켈리를 선보였다. 다년간 호흡을 맞춘 브랜드 컨설팅 전문회사 인피니트 그룹과 협업해 다시 한번 국내 맥주 시장을 뒤흔들 수 있을지 기대된다.
라거의 맛을 비주얼로 구현하기까지
최근 몇 년 동안 수제 맥주 브랜드들이 반짝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국내 레귤러 맥주 시장에서 신제품을 출시하는 것은 사실 꽤 드문 일이다. 인간의 오감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감각이 미각이라는 말이 있듯이 기존 맛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력이 들기 때문이다. 소리 없는 각축전이 이어지는 시장에서 기성 브랜드의 아성을 뚫고 신제품이 성공하려면 맛뿐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한 브랜드 전략이 필요하다. 하이트진로의 야심작, 켈리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켈리는 탄산감이 강렬한 라거이지만, 부드러운 거품까지 구현해낸 점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눈은 언제나 혀보다 자각하는 속도가 빠른 법. 아무리 훌륭한 맛이라도 이를 적절히 시각화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맛을 비주얼로 구현해야 하는 디자이너에게 어려운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하지만 인피니트그룹(이하 인피니트)은 지난 30년간 하이트진로와 쌓은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3년에 걸쳐 진행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피니트 이정아 부사장은 면밀한 사전 리서치가 오랜 협업 관계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기존 맥주 브랜드들의 사례 조사는 물론, 켈리와 맛이 유사한 맥주들의 비율과 특징을 모조리 수치화해 정리했다. 이러한 치밀함에 클라이언트는 신뢰로 답했고, 그 결과 디자이너의 자율성을 보장받고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었다.
인피니트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부드러움과 강렬함을 모두 표현하기 위해 국내 레귤러 맥주 최초로 앰버amber 컬러 유리를 구현하는 한편, 병 어깨 부분에 곡선적 헤리티지heritage 타입을 적용하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직선적으로 좁아지는 테이퍼드tapered 타입을 조합했다. 또한 장인이 정성껏 깎아낸 듯한 시그너처 캐릭터 라인을 개발하여 병 어깨에 적용했다. 사실 인피니트의 이런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하이트진로의 지난 히트작 청정 라거 테라에서도 특유의 휘몰아치는 듯한 토네이도 라인과 선명한 초록색, 세련된 로고타이프 디자인으로 테라의 성공에 일조했다. 한 차례 거둔 성공의 경험 역시 클라이언트의 믿음을 사는 데 일조하며 또 다른 실험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일반 맥주와 다른 독특한 형상의 라벨도 주목할 만하다. 보통 맥주 라벨은 별다른 특징 없이 병을 감싸거나 원형 혹은 타원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켈리의 다각형 라벨은 병의 형상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서로의 특징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또한 테라 디자인과 비교하면 더욱 흥미롭다. 테라에서는 역삼각형의 명쾌한 라벨과 반듯한 서체로 청량감을 직관적으로 표현했다면 켈리는 다각형의 직선적 라벨을 통해 부드럽고 안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정아 부사장 또한 곡선과 직선을 조화시켜 상반된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 켈리 디자인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 단순한 문장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험이 따라야 한다. 시각은 순식간에 정보를 받아들이므로 이질적 특성을 조화시키려면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상반된 특성을 성공적으로 표현하지 못해 디자인보다 문구가 앞서곤 하는데, 켈리는 이 두 가지를 고르게 구현해냈다.
물론 이제 갓 출시 2개월에 접어든 켈리의 성패를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일지 모른다. 다만 출시 이후 켈리의 판매량이 벌써 4년 전 테라를 앞질렀다는 보도가 심상치 않다. 과연 테라가 그러했듯이 켈리가 시장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생명력을 얻은 브랜드가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프로젝트 리더 이정아 부사장
디자인 오기환 대표, 채창규 실장, 곽정성 수석, 박주영 수석, 유희량 책임, 하진하 책임, 김영혁 선임
기획 송하현 수석, 정다은 선임
“시간을 들여 브랜드 경험을 일관적으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피니트그룹 부사장
이정아
“브랜딩은 마라톤처럼 호흡이 긴 여정이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브랜드 경험을 일관적으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이트진로에서 테라 이후 4년 만의 주류 브랜딩이다. 부담은 없었나?
어떤 프로젝트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적은 없었다. 전작 테라가 워낙 시장에서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클라이언트의 기대가 컸고 그만큼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가 단순한 라벨 디자인을 넘어 전반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제법 오랜 기간의 작업이다 보니 작업에 참여한 디자이너들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부담감이 긴장감을 형성하며 프로젝트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무엇인가?
부드러움과 강렬함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어떻게 조화롭게 표현할지 고심했다. 더불어 대중이 인식하는 ‘맥주다움’이라는 전형성과 새로운 제품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하고자 했다. 요즘은 급속도로 디자인 트렌드가 변하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대중에게 너무 낯설지 않으며 새로운 디자인을 전개하는 것이다.
하이트진로와 오랜 파트너십을 유지해왔다. 긴 기간 호흡을 맞춘 관계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하는 일은 수학 공식처럼 입력에 따라 명확한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없으면 클라이언트에게 불안함을 유발하고 이는 곧 디자이너를 재촉하거나 중간 과정을 점검하는 일로 이어진다. 디자이너는 압박을 느끼고 창작의 제약을 느낄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오랜 기간 파트너십을 이어오며 신뢰 관계를 구축했고, 디테일과 완성도에 대한 클라이언트의 기준이 높아서 발상의 자율성을 보장받은 상태에서 작업해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다.
‘타임리스 브랜딩Timeless Branding’을 중요 가치로 내걸고 있다. 이를 브랜딩과 디자인으로 풀어내는 구체적 방식이 궁금하다.
브랜딩은 마라톤처럼 호흡이 긴 여정이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브랜드 경험을 일관적으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먼저 브랜드가 가진 모든 스토리를 시처럼 정제된 시각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우리는 여러 차례 리뷰를 통해 덜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순서를 거치기에 인피니트가 세상에 선보인 결과물이 소비자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다고 믿는다. 우리가 택한 의사 결정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이제 F&B 시장에서 브랜딩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오랜 시간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감지한 변화와 동향이 있을 것 같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브랜딩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다고 생각하나?
사실 F&B만큼 소비자와 긴밀하게 대화하는 카테고리도 없다. 소비자의 요구를 반영하며 자연스럽게 브랜딩의 위상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덕분에 흥미로운 프로젝트 사례가 많아지며, 다양한 디자인 접근법과 해석이 쏟아져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긴 호흡의 브랜딩 사례가 이전보다 많이 줄어든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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