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에서 만나는 거장의 작품들
시간 정보와 더불어 패션 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손목 시계는 일상의 아이템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이제, 시계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예술의 경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시계 브랜드들은 미술·건축·디자인 사조에 영감을 얻은 디자인을 선보이며, 아티스트, 디자이너와 함께 협업하기도 한다. 손목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어디까지 이루어질 수 있는지 앞다투어 노력을 거듭한 가운데,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시계 작품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있는 중이다.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과 협업을 진행한 피아제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피아제는 하이엔드 주얼리 및 시계를 생산하는 제조사이다. 정교한 시계 무브먼트와 더불어 세계 최초 세상에서 가장 얇은 시계를 만들어내며 기술력으로 완벽함을 뽐냈던 피아제는 1950년 대부터 시계 제조에 귀금속만 사용하며 디자인에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피아제를 대표하는 그물 세공 스트랩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이런 이들의 노력이 빛을 발했던 때는 스톤 장식 다이얼 시계 및 다채로운 색채를 가진 ’21세기 컬렉션’을 선보였던 1963년이었다. 피아제의 화려한 주얼리 세팅, 대담한 디자인은 그 시대의 패셔니스타로 꼽히던 재키 케네디 Jackie Kennedy, 엘리자베스 테일러 Elizabeth Taylor 등에게 사랑을 받았다. 끊임없이 시계의 예술성을 추구하던 피아제는 1967년 살바도르 달리와 인연을 맺으며 앤디 워홀 등 여러 아티스트들과 특별한 협업을 진행했다.
여러 아티스트와의 협업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처음으로 협업을 진행했던 달리의 디자인이다. 이는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 활동으로 만든 ‘달리도르 Dali d’Or’라는 금화에서 시작했다. 이 금화는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위해 제작되었던 금화 ‘루이도르 Louis d’Or’에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다. 금화에는 달리, 그리고 달리의 부인이자 뮤즈였던 갈라 Gala Dalí의 초상과 더불어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프랑스 왕가에서 사용되던 플뢰르 드 리스 Fleur-de-lys 문양과 월계수, 달걀 등이 함께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달리는 이 금화를 작품 활동에 활용하거나 친구들의 빚을 갚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이어 달리는 피아제와의 협업 때에도 이 금화를 사용하며 자신의 작품 분야를 넓혔다. 다이아몬드 펜던트, 이어링, 브로치와 커프링크스 등 다양한 제품군으로 완성되었고, 예술가의 독특한 세계관을 느낄 수 있어 현재까지 수집가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동양과 서양 예술의 조화를 꾀한 예거 르쿨트르
피카소가 사랑했던 시계로 유명한 예거 르쿨트르 Jaeger-LeCoultre 또한 스위스에서 시작한 하이엔드 시계 제조사이다. 430개 이상의 특허와 1,300개의 칼리버를 보유하며 시계와 관련한 최첨단 기술을 가진 회사로 유명하다. 특히 이들이 제조한 무브먼트는 하이엔드 명품 시계 브랜드 파텍 필립 Patek Philippe, 오데마 피게 Audemars Piguet도 사용할 정도로 우수함을 자랑한다.
브랜드 대표 모델인 리베르소 Reverso는 직사각형 케이스를 가진 시계로 영국군 장교들이 폴로 경기를 할 때 착용하는 시계가 깨지지 않게 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회전이 가능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단지 시계의 페이스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이 독특한 구조는 시계 뒷면에 다양한 작품이 새겨지며 손목 위의 작은 갤러리로도 활용되고 있다.
브랜드는 최근 우키요에 예술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c.1760~1849)의 작품을 재현한 리베르소 트리뷰트 타임피스를 차례로 출시하며 시계 및 예술 수집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2021년에는 기리후리 폭포를 묘사한 모델을, 2022년에는 아미다 폭포를 묘사한 모델을 선보였으며 올해는 기소카이도 오노 폭포 및 요시쓰네가 자신의 말을 씻긴 야마토 지방의 요시노 폭포를 묘사한 모델을 선보이며 시리즈를 이어나가고 있다.
제조사의 장인들은 정교한 페인팅을 위해 제네바 기법을 사용했으며 최소 80시간의 작업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호쿠사이가 사용했던 색감을 재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원본의 약 10분의 1크기의 공간에 원본과 동일한 세부적인 묘사를 정밀하게 재현하는 과제를 완벽히 해냈다.
예거 르쿨트르는 “약 2,000년 동안 이어진 아시아와 유럽 간의 양방향 문화 교류는 동양과 서양의 모든 예술 형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라며 리베르소 모델을 통해 이러한 역사를 계승하고 동양과 서양 예술의 전통 사이의 소통을 이어나갈 것임을 밝혔다.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위블로가 예술을 사랑하는 법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이어가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과는 달리 1980년에 세워져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위블로 Hublot는 2004년부터 ‘아트 오브 퓨전 Art of Fusion’이라는 콘셉트로 혁신적인 소재들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도전을 시도했다. 순금에 고무를 결합하거나 세라믹, 카본 파이버, 티타늄, 텅스텐 등 기존의 시계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신소재를 적용한 시도는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했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히 고무는 위블로의 활약으로 인해 저렴한 시계에나 쓰인다는 인식이 바뀌면서 여러 브랜드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중이다. 이 밖에도 금과 세라믹을 결합시킨 ‘매직 골드’, 스크래치에 강한 ‘사파이어’가 대표적이다. 자체 개발한 무브먼트 유니코 Unico는 브랜드의 기술력을 돋보이게 했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바꾸는 새로운 도전을 이어나가는 위블로는 2012년 ‘위블로 러브즈 아트 Hublot Loves Art’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시계에 예술을 접목시키는 일에도 도전했다. 리샤르 올린스키 Richard Orlinski, 셰퍼드 페어리 Shepard Fairey, 사무엘 로스 Samuel Ross 등과 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브랜드에 예술적인 비전을 더했다. 2021년에는 아트 마이애미에서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최근 위블로가 협업을 진행하고 있는 예술가는 현재 미술 시장에서 비싸게 팔리는 작품을 만들고 있는 무라카미 다카시와 수많은 명품 브랜드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다니엘 아샴 Daniel Arsham이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위블로를 대표하는 모델들에 그의 마스코트인 ‘카이카이 키키’를 더했다. 협업을 진행한 여러 모델들 중에서 특히 꽃의 모양에 따라 무지개색 보석들이 촘촘히 박혀 완성된 클래식 퓨전 모델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쾌함을 선사한다. 예술가는 실제 시계를 디자인하는 것과 더불어 시계를 모티브로 한 NFT를 제작하며 브랜드를 메타버스 세계로 초대했다.
다니엘 아샴은 브랜드의 앰버서더 및 파트너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며, 스위스의 유명한 휴양도시 체르마트에서 20m 규모의 해 시계를 제작했다. 스위스 산맥의 자연 환경을 활용한 이 시계는 오벨리스크 모양의 수정 크리스털 판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려면 스키 리프트를 타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늘 새로운 도전을 즐겼던 브랜드와 더불어 ‘신비로운 현대 고고학’ 작품을 남기는 예술가에 어울리는 작품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아샴은 “이 임시 설치 작품은 쏜살같은 시간이 어떤 느낌인지 포착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른 모든 이들의 초, 분, 시간 및 날짜의 경과를 초월하는 기억을 만들며 영속할 것입니다.”라며 작품을 소개했다.
이탈리아 디자인 감성을 디자인에 접목한 리처드 밀
2001년에 설립되어 앞서 소개한 위블로 보다 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독특한 디자인과 신소재,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인기를 얻고 있는 리처드 밀 Richard Mille은 ‘손목 위의 F1 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튼튼하고 가벼운 시계를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퀄리티 있는 시계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기 때문에 소량 생산되고 가격 또한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비싸지만, 그 때문에 더욱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최근 이들이 선보인 RM 07-01 모델은 1980년대 이탈리아 예술 및 건축 운동인 멤피스 디자인 Memphis Design에 영감을 받아 디자인되었다.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대부로 불리는 에토레 소트사스 Ettore Sottsass가 이끈 포스트모던 디자인 그룹은 기존의 기능주의적인 모던 디자인에 반기를 들며 활동했다. 그래서 다채롭고 선명한 컬러, 자유분방하면서 위트 있는 디자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불구불한 선, 원, 삼각형 등과 같은 형태에 높은 채도를 가진 원색이 주를 이루는 스타일이 특징이다.
리처드 밀은 자사를 대표하는 성능과 혁신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자유분방함이 가득했던 디자인 운동의 아름다움을 시계에 접목시켰다. 톡톡 튀는 컬러뿐만 아니라 멤피스 디자인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페이스 디자인은 고성능의 시계를 걸작의 반열로 이끌었다. 확신컨대, 이 시계는 그 어떤 패션 아이템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라 본다.
1960년대 건축에서 영감을 받은 MB&F의 시계
시계 분야의 권위자로 꼽히는 막시밀리안 뷰셰 Maximilian Büsser가 이끌고 있는 독립 하이엔드 시계 제조사 MB&F는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형태와 기술로 시계를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오롤로지컬 머신 N°9 Horological Machine N°9, HM9는 1940-50년 대 생산되었던 자동차와 항공기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제트 엔진을 연상시키는 케이스, 기계의 아름다움을 극한으로 이끌어낸 기계식 무브먼트 등 독특하고 복잡한 기술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높은 가격대로 판매되지만 희귀한 디자인이 예술 작품 그 자체로 여겨지기에 시계 수집가들 사이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선보인 HM11 모델은 1960년 대 중후반의 실험적인 건축물에 영감을 받았다. 그와 더불어 르 코르뷔지에의 신념으로 알려진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 une maison est une machine à habiter’를 바탕으로 ‘집이 시계라면 어떨까?’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 결과 HM9 보다 더 독특한 형태의 시계를 세상에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UFO의 모양을 연상케 하는 시계의 중심에는 플라잉 투르비옹 Flying Tourbillon이 자리 잡고 있으며, 투명한 케이스 덕분에 이 부품이 동작하는 모습을 어느 각도에서나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를 둘러싸고 있는 4개의 공간에는 시간, 파워리저브, 온도를 표시하는 디스플레이와 더불어 용두가 달려 있어 시계로서 역할을 만족스럽게 해낸다. 티타늄, 사파이어 크리스털과 같은 고급 소재와 더불어 섬세하고 복잡한 구조는 시계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을 극한으로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구조의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시계의 크기는 일반적인 손목 시계와 동일한 42mm 크기로 만들어졌다. 예술 작품이나 마찬가지인 시계를 만들기 위해 설계자, 엔지니어 모두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스와치 & 아트: 반 세기 가까이 이어져 온 창의적인 협업
1970년 대 쿼츠 시계의 보급으로 기존의 기계식 시계가 사라질 뻔했던 ‘쿼츠 파동’의 시기에 스와치는 과감하게 쿼츠 무브먼트로 저가 시계를 만드는 동시에 시계에 예술을 접목시키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냈다. 1985년에 한정판으로 140개만 제작된 키키 피카소 Kiki Picasso와의 협업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캔버스’로의 첫걸음을 뗀 작품으로 인정받으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86년에는 키스 해링, 1990년에는 알레산드로 멘디니, 1996년에는 애니 레보비츠 Annie Leibovitz, 백남준, 오노 요코, 1999년에는 렌조 피아노 Renzo Piano, 2019년에는 돼지 화기인 피그카소 Pigcasso 등과 협업하며 시계의 예술성을 높이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동일한 시계의 모양이지만, 참여한 이에 따라 시계의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밖에도 뉴욕 현대미술관, 우피치 미술관, 퐁피두 센터, 루브르 아부다비 등 세계적인 미술관과도 협업하면서 명화의 이미지를 시계에 녹여냈다. 또한 스와치는 시계 디자인에 예술을 더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술계가 성장할 수 있도록 예술 단체 및 행사를 후원하고 있다. 반 세기 가까이 시계 브랜드가 예술계에 쏟아부은 열정으로 우리는 일상 속에서 예술을 더욱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들의 노력이 계속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