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
현대 포니 쿠페 콘셉트 50주년
50년 만에 복원한 현대 포니 쿠페. 당시 디자이너였던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다시 한번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내한한 그와 나눈 포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자동차 디자인의 미래 이야기.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 이름도 생소한 콘셉트카 한 대가 등장한다. 현대 포니 쿠페. 그땐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동양의 이 신생 자동차 브랜드가 훗날 글로벌 자동차 산업에 한 축을 맡게 될 줄은. 지난해 현대자동차는 현대 포니 쿠페를 디자인했던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함께 복원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현대자동차 울산 EV 전용 공장 기공식에 맞춰 내한한 거장에게 포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자동차 디자인의 미래를 물었다.
포니 복원 프로젝트
최근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에 관한 관심이 뜨거웠다.
포니 쿠페 콘셉트 프로젝트를 진행한 게 50년 전의 일이다. 이처럼 오래된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는 게 놀랍고 기쁘다. 특히 젊은 세대가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 신기하다. 포니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요즘 같은 소비사회에서 한때 유행하고 사라진 교통수단으로 치부하지 않고 가치를 알아봐주는 것 같아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5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나?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을 만난 게 인연이 됐다. 자동차를 생산하고 싶은데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디자인을 구현해줄 파트너를 찾고 있다고 하더라. 그가 만약 피아트 같은 회사에 문의했다면 포니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규모가 큰 자동차 회사에서 그런 제안은 황당무계하게 느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처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회사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만큼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모든 생산 공정이 완비된 줄 알았는데 막상 돌입하니 준비된 게 거의 없더라.(웃음) 무엇보다 제대로 된 부품 공급업체가 없었고, 공정의 정교함 역시 떨어졌다. 그런데 당황스럽긴 했어도 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창업주의 결단력과 훌륭한 기술자들 덕분이었다. 특히 숙련된 기술자들 덕분에 생산 비용을 상당 부분 절감할 수 있었다.
긴 시간이 흘러 다시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소감이 궁금하다.
반갑기도 했지만, 솔직히 힘들었다. 도면 등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자동차 디자인의 미래
2006년 본지와 인터뷰에서 아시아 디자인 시장의 부상을 예견한 바 있다. 다시금 전망해본다면?
솔직히 예전만큼 자동차 디자인의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다. 변수가 너무나 많아진 탓이다. 내가 자동차 디자인을 시작한 게 1955년이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정말 많은 자동차 잡지가 있었는데 단골 소재가 미래, 특히 2000년대의 자동차에 관한 기사였다. 지금 그 잡지들을 들춰 보면 적중한 게 하나도 없다.(웃음) 그럼에도 속도를 최우선 가치로 두던 과거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고속 주행을 위한 기술과 디자인은 이미 상당 부분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그 결과 너무 많은 사람이 길 위에서 사고로 죽게 됐다. 따라서 안전 규범이 날로 강화되고 있으며 디자인 역시 안정성에 방점을 두고 진화할 것이다. 또 불황이 지속되면서 경제적 디자인이 중요해지지 않을까 싶다.
자율 주행 기술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
솔직히 자율 주행 기술은 운전하는 즐거움을 빼앗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달갑지는 않다. 앉아서 뉴스나 보게 되겠지.(웃음) 익스테리어보다 인테리어가 중요해지면서 소비자가 외관을 보고 차를 고르는 일도 줄어들 것 같다. 하지만 내 푸념과 관계없이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무엇보다 차량 인테리어가 거실을 닮아갈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거실과 닮아도 실제 거실이 될 수는 없다. 주행 시 안정성도 확보되어야 하고, 불시의 충격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에 따라 전반적으로 인체 공학적 설계가 정교해질 것이며 제3의 공간이 탄생할 것이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보는 것은 내장 조명이다. 차 안에서 엔터테인먼트 경험이 강조되면서 조명의 역할이 커질 것이다.
사실 당신은 탁월한 제품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카메라(니콘 F3), 손목시계(세이코 7A28-6000), 심지어 권총(베레타 Px4 Storm)까지 만들었다. 이런 전천후 활동이 가능한 비결이 있나?
자동차는 물론 다른 영역의 제품을 디자인할 때도 원칙은 동일하다. 정확한 수학적 계산을 바탕으로 하는 것. 나는 결코 상상력만으로 디자인하지 않는다. 디자인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다. 소형 제품인지, 대형 운송 수단인지, 럭셔리 카인지에 따라 적용해야 하는 논리는 달라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수학이라는 기본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최근 제품 디자인 시장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두 가지다. 미니멀리즘 그리고 디지털 기술과의 결합. 혹자는 이것 때문에 제품 디자이너의 입지가 줄어들었다고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 디자이너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글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기본을 지키라는 것이다.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았을 때나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이를 어떻게 실체화하느냐가 디자이너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질이다. 건축에 지켜야 할 기본이 있듯이 자동차나 의자 디자인에도 기본이 있다. 복잡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기본이 무엇인지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 물론 창작의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디자이너로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