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오리가 철학을 디자인하는 방법

수준 높은 번역, 아름다운 디자인, 논문 중심 기획 그리고 유머와 귀여움 한 스푼

철학에 대한 배움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전기가오리’. 철학계의 구몬으로 불리며, 후원이라는 독특한 운영 시스템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전무후무한 브랜드. 막연하고도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도 전기가오리와 함께라면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전기가오리가 철학을 디자인하는 방법

“전기가오리는 사회정치적인 주제의 철학적 측면에 주목하고, 반엘리트주의를 주창하며, 철학을 둘러싼 격차 문제의 해소에 기여하고자 하는 학문 공동체입니다.” 혼자 공부하다 지친 신우승 대표가 ‘같이’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2012년 시작한 공부 모임이 전기가오리로 발전했다. 최신 논문을 다루는 동시대성, 초심을 잃지 않는 꾸준함(여전히 번역과 공부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여러 가지 방식의 철학 설명 서비스가 주는 새로움 등 전기가오리의 많은 장점 중 디자인에 주목했다. 출판물과 웹사이트 디자인에 대한 색다른 접근을 통해 자신만의 확고한 영역을 구축한 전기가오리. 마침 2024년 웹사이트 리뉴얼을 감행한 신우승 대표에게 디자인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형태의 출판물을 만들다

신우승 전기가오리 대표

2021년 선보인 전기가오리의 로고와 심볼 © 전기가오리
어느새 햇수로 9년 차 브랜드가 됐습니다. 2012년 시작한 공부 모임에 2016년 출판사를 더하며 ‘전기가오리’의 본격적 행보가 시작됐는데요. 당시 로고나 홈페이지, 출판물을 준비하며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궁금합니다.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새로운 형태의 출판물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형태’란 높은 수준의 번역, 아름다운 디자인, 논문 중심의 기획을 의미합니다. 둘째, 함께 공부하는 것의 가치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함께 공부하는 것’이란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모이는 것뿐만 아니라 동등한 개인들이 서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셋째, 독자적인 플랫폼을 꾸리고 싶었습니다. 모객, 유통, 홍보 등에서 완전히 자립적인 체제를 구축한다는 의미입니다.

프랙티스가 디자인한 <서양 철학의 논문들> 시리즈 © 프랙티스
2021년 11–12월 물질적 혜택. 『칸트 입문 4』, 「한나 아렌트」, 「예술의 인지적 가치」, 〈천 논문도 한 문장부터〉 2종, 〈설명 원고 읽고가세요〉 4종, 〈전기가오리로 서양철학사 읽기〉 2종, 〈영어 텍스트 읽기를 도와드립니다〉 2종, 〈보르헤스라는 우물: 바벨의 도서관〉으로 구성했다. © 전기가오리
왜 철학 텍스트를 담은 출판물의 디자인이 중요했나요?

무엇보다도 저 자신이 심미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만들 수 있기를 늘 바라고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보다 더 과감한 디자인 실험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20년쯤 지나 〈OASE〉 같은 잡지를 철학 텍스트를 재료로 삼아 내보고 싶기도 합니다.

<천 논문도 한 문장부터>는 이기준 디자이너와 함께하고 있고, <전기가오리로 서양철학사 읽기>는 윤충근 디자이너,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항목들>은 진달래·박우혁 디자이너와 함께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2022년 1월 물질적 혜택의 일부로 신덕호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배달 플랫폼 노동』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이처럼 다양한 디자이너들과 함께하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디자인 작업을 부탁드리는 메일을 꽤 상세하게 쓰는 편입니다. 조건과 방향을 명료하게 밝히는 메일은 그 자체로 신뢰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 선정에 별다른 기준이 있지는 않습니다. 워낙 잘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작업물을 볼 때마다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파악하여 만들어 둔 긴 목록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 분을 찾아 연락드립니다.

인쇄 중인 〈철학 in da 그래픽 4: 귀여움을 찾아서〉 사진. ‘귀여움’을 주제로 란탄 작가가 작업했으며, 디자인은 6699press가 진행했다. © 전기가오리
출판물은 사이즈는 물론 재질, 두께, 인쇄 방식 모두 다릅니다. 패브릭 양장에 금박을 넣는 고급 사양도 과감하게 시도하고요. 디자이너에게 어떤 가이드라인을 주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작업이 진행되는지 궁금해요.

가이드라인은 거의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이고 저는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을 디자이너의 재량에 맡깁니다. 다만 몇 가지 출판물 시리즈를 하나씩 런칭하기 시작할 때, 그 시리즈들 사이에 통일성을 확립할지 아니면 다양성을 구현할지 고민하기는 했습니다. 지금 나오는 것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양성을 구현하기로, 즉 각 시리즈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도록 기획했습니다. 같은 시리즈 안에서도 표지 베리에이션을 강하게 하는 편입니다.

몇 개의 텍스트를 묶어 펴낸 『야간노동』. 뒤 표지의 날개 일부분은 ‘아무도 쓰지 않은 부고’의 어느 면에 끼워 고인을 추모하거나 책갈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 전기가오리
출판물 중 전기가오리의 색을 가장 잘 담은 출판물은 무엇인가요? 혹은 이제는 구할 수 없지만 이건 좀 탐날 만했다, 하는 디자인들이 있다면요?

많은 디자이너께서 다들 성의 있게 작업해주시기 때문에 제가 한두 개를 고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아니라 후원자 입장에서 이야기한다면, 많은 분께서 『야간노동』과 <전기가오리 철학적 일력>을 말씀하십니다. 전자는 진달래·박우혁 씨께서, 후자는 6699press에서 맡아주셨고, 진행하는 입장에서도 이들 디자이너께서는 거의 완벽하셨습니다.

전기가오리의 아이덴티티를 담은 웹사이트

강렬한 형광 초록색 전기가오리 심볼과 바닷속을 옮긴 초기 웹사이트 디자인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말씀하신 웹사이트 디자인은 초기 디자인이 아니라 중기 디자인에 해당합니다.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전기가오리의 아이덴티티를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기가오리(*)’라는 이름, 바닷속, 유머, 귀여움 등을 키워드로 하여 철학에 대한 심리적 문턱을 낮추고 싶었습니다.

2024년 리뉴얼한 웹사이트 메인 페이지
그리고 2024년 1월 웹사이트를 리뉴얼했습니다. 리뉴얼에 앞서 고민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번역하고 직접 쓴 자료가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예전에 냈던 자료에 대한 요청이 꾸준히 들어와 이번 홈페이지는 아카이브 내지 자료실로 기능하게 됩니다. 기존에 냈던 텍스트를 웹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고요.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운 작업이어서 지금도 계속 디자인 작업 중입니다.

과감하고 다양한 디자인의 출판물, 웹사이트 개편 등을 통해 전기가오리가 이어 나가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문을 닫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형태이든, 어떤 크기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꾸준히 운영하는 것이, 제가 더는 화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설명을 내놓지 못할 나이가 될 때까지 운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 디자인으로 리뉴얼하기 전 패브릭 양장으로 출판했던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항목들>의 표지 배색표. © 전기가오리
그렇게 오래 운영하면서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항목 100편, 서양 철학의 논문 300편, 10권 분량의 철학사, 교과서로 쓰일 단행본 50권 정도를 출판하고 싶습니다. 출판에 머무르지 않고 이들 텍스트에 대한 접근 가능한 설명 원고를 작성하려고 합니다. 물론 온라인 방송으로 설명도 할 것이고요.

​장학 사업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한 분께 매달 200만 원 정도의 장학금을, 그래서 일인당 총 1억 2천만 원 정도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고, 이러한 지원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명 정도에게는 해드리고 싶습니다. 지금은 세 분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전기가오리 철학적 일력: 2023년 상반기〉. 1월부터 6월까지 총 181개의 질문을 담았다. 디자인은 6699press가 진행했다. © 전기가오리
올해 준비하는 계획 중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게 있다면요?

올해는 만들지 않았는데 찾는 분이 너무 많아 연말에 <전기가오리 철학적 일력: 2025년>을 내려고 합니다. 여름부터 단행본 출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서 그것도 기대하실 만합니다. 『철학자의 연장통』, 『페미니즘과 지리학』, 『빈틈없는 철학사』 등이 모두 올해 안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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