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 허정원 센터장

천재성과 힘과 마술을 이끄는 용감한 창의력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기업의 두터운 껍데기를 깨기까지.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센터 허정원 센터장이 보여준 용기 있는 선택.

아모레퍼시픽 허정원 센터장

사람들은 흔히 착각한다. 창의성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현실에 발을 내딛지 않은 크리에이티브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즉 현실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세상에 현현한 크리에이티브만이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있다. 특히 시장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을 확인하는 디자이너에게 현실감각은 반드시 갖춰야 할 소양이다. 차가운 시장의 반응조차 디자이너의 메시지에 대한 소비자의 화답이기에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이를 경청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정교하게 분화된 인하우스 디자인 조직 안에서 현실감각을 체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업은 소속 디자이너에게 꽤 근사한 안전망이지만, 때로 깨야 할 두꺼운 알껍데기가 되기도 한다. 아모레퍼시픽은 최근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기 있는 선택을 했다. 디자인센터에서 크리에이티브센터로 조직명을 변경하고 구성원들의 영역 확장을 꾀한 것.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허정원 센터장이 있다. 2017년부터 아모레퍼시픽 디자인을 총괄한 그는 이번 실험이 디자이너의 영역 확장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허정원 센터장을 보며 오늘날 인하우스 디자인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해답을 찾은 듯했다.

*본 기사는 월간 <디자인> 2022년 6월호 기사를 재편집했습니다.

외부 DNA가 아모레퍼시픽에 스며들기까지

연세대학교 생활디자인학과와 주거환경학과(현 실내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밀라노 도무스 아카데미를 거쳐 2005년 LG전자에 입사했다.
2014년 아모레퍼시픽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2017년부터 현재까지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센터장을 맡고 있다.

어떻게 디자인을 시작했나요?

고등학생 때는 과학을 좋아하는 이과생이었는데 워낙 이것 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건축이나 인테리어 쪽으로 눈이 가더군요. 연세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주거환경학과와 함께 신설된 생활디자인학과를 복수 전공했어요.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조명이었습니다. 학부 시절에 조명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실용성을 고려하면서도 기능성을 넘어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는 오브제라는 점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아요. 과학을 응용해서 아이디어를 무궁무진하게 전개해나갈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고요. 특히 잉고 마우러의 실험적인 조명 디자인을 좋아해서 밀라노 도무스 아카데미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첫 직장이 LG전자였다고 들었어요.

당시 밀라노에 LG전자 분소가 있었는데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특별 채용 공고가 났어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면접을 봤는데 덜컥 합격했습니다. 디자인경영센터 내 MC디자인연구소에서 모바일폰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 디자인경영센터 직속의 전략팀으로 이동하게 됐습니다. 아웃소싱을 총괄하거나 디자인 분소를 운영하는 업무를 맡았죠. 일본 디자인 분소장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당시 제 짧은 경력을 감안하면 과분한 자리였어요. 운이 좋았죠.(웃음) 귀국 후에는 신설된 선행 디자인 조직의 창립 멤버로 일했습니다. 그때 마침 컨버전스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제품 유형별로 나뉘어 있던 기존 디자인 조직을 넘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죠.

아모레퍼시픽으로 이직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애초에 꿈꿨던 조명 디자인과는 점점 멀어진 것 같은데.(웃음)

솔직히 저는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고 달리는 스타일보다 그때그때 제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려보자는 쪽에 가까웠어요. 물 흐르듯 왔다고 할까요? LG전자에서의 경험은 소중했지만, 한편으로 갈증도 있었습니다. 혁신의 방점이 디자인보다 기술에 찍혀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선행 디자인을 계속하다 보니 좀 더 즉각적으로 시장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고 싶더군요. 솔직히 이직 당시 화장품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정 화장품 브랜드를 맡는 일이었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예요. 다행히 이직 후 처음 소속된 디자인 7팀은 다양한 시도를 새롭게 해볼 수 있는 조직이었어요. 이전 회사처럼 선행 디자인을 해볼 여유는 없었지만, 제손을 거친 결과물이 바로바로 시장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만족감이 컸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아모레퍼시픽다움은 무엇인가요?

아모레퍼시픽은 일찍이 감성의 역할과 중요성을 감지하고 있는 회사였어요. 이에 대한 최고경영진의 확신과 공감대가 있었기에 1950년대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시대를 풍미한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이 탄생했다고 봅니다. 아모레퍼시픽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비단 소비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감도 높은 미의식을 가진 내부 구성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죠. 브랜딩과 제품뿐만이 아니라 아모레퍼시픽 세계본사, 오산뷰티파크(공장), 원료식물원, 미지움(R&I 연구소) 등 구성원의 업무 공간에도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죠. 디자이너는 물론 경영진도 함께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게 아모레퍼시픽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리따 글꼴. ‘건강한 아름다움’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아리따 돋움, 아리따 부리, 아리따 산스(영문)는 2004년 개발을 시작해 2014년 완료했다.
이후 2017년 중문인 아리따 흑체를 추가 발표했다.

디렉터: 안상수, 미셸 더부르 Michel de Boer(아리따 산스)
감수 : 한재준(아리따 돋움, 아리따 부리)
참여 디자이너 : 이용제(아리따 돋움), 류양희(아리따 부리), 페터르 페르횔Peter Verheul(아리따 산스)
2017년 디자인센터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수십여 종의 브랜드가 있는 회사인 만큼 일반 인하우스 디자인 조직과는 체계나 운영 방식이 조금 다를 것 같은데.

맞습니다. 보통 하나의 브랜드가 곧 그 회사를 대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죠. ‘브랜드=회사’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하지만 저희 고객들이 일상에서 대면하는 것은 아모레퍼시픽이라는 회사가 아닌 설화수, 라네즈, 헤라, 아이오페 등 40여 종의 브랜드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브랜드는 저마다 정체성을 갖고 있죠. 그러다 보니 센터장 혼자 디자인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브랜드마다 브랜드를 책임지는 팀장과 팀원들이 있고 그들이 주도적으로 자기 역할을 하죠. 이들이 각자 주도권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구조가 이상적이며 제 역할은 그런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인하우스 디자인 조직은 사실 그렇게 되기 쉽지 않은데 개개인이 더 드러날 수 있기를 바라지요.

지난해 초 아모레퍼시픽 디자인센터가 크리에이티브 센터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시장 환경과 고객 니즈의 다변화에 따라 회사가 새 사업 모델과 신규 서비스를 다각도로 준비한 것이 변화의 계기가 됐습니다. 디자이너의 역량 변화와 확장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영향을 미쳤고요. 현재 모든 브랜드가 직면한 주요 미션중 하나가 브랜드의 선망성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브랜드의 감성을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모든 고객 접점의 요소를 일관성 있게 창출해야 하죠. 물론 각 디자인 팀은 이전에도 제품과 공간 디자인을 중심으로 이를 수행했습니다만, 크리에이티브센터로 조직명을 바꾼 것에는 활동 범위를 커뮤니케이션 영역으로 넓히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즉 디자인 직무 전문가를 넘어서 브랜드, 채널 그리고 전사 관점의 크리에이티브를 주도하고 콘텐츠를 생산하는 전문가 집단으로 한 단계 진화한 것이죠.

콘텐츠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업무 자체를 콘텐츠 화해보자는 생각이었죠. 디자이너는 누구나 대학 시절 포트폴리오를 만든 경험이 있잖아요? 포트폴리오는 결국 일에 대한 나의 생각을 내 방식으로 어필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작업이죠. 그동안 우리는 제품과 공간, 즉 결과로 말해왔어요. 설명 없이도 “와우!”를 끌어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변했어요. 오늘날 디자이너는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해요. 크리에이터로서 내가 만들어낸 유·무형의 결과를 잘 전달해 공감을 일으키는 것까지가 기본적인 역할이 됐다는 뜻입니다. 스토리텔링은 디자이너 개개인이 업무에서 의미를 찾고 성장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동시에 각 디자이너가 참여하는 브랜드와 채널에도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죠.

자발성이 한층 더 중요해졌겠군요.

내가 할 업무를 회사가 알아서 쥐여준다는 인식으로는 현시대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기 어렵습니다. 크리에이티브라는 것은 과제의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 이전에 과제 자체를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올바른 질문을 할 때 제대로 된 답을 찾아갈 수 있죠. 인하우스에서는 대개 디자이너들은 주어진 업무를 수행할 뿐 스스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정의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의사 결정에서도 디자인에 관한 의견만 피력하게 되죠. 그런데 사실 특정 영역에 한정된 의사 결정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잖아요? 회사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은 결국 상품성에 관한 것입니다. 디자인 감각을 갖되 상품 관점에서 최적의 답이 무엇인지 답할 수 있어야 진정한 대화 상대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전통적인 디자인 조직과 업무 수행 방식, 역할 구분으로는 이런 관성을 깨기가 어려워요. 디자이너는 ‘예쁘면 생산 단가가 높아도 소비자들이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 예상이 맞는지, 틀리는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퍼즐우드. 크리에이티브센터의 CP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향 브랜드로 디퓨저와 인센스 스틱, 오브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디퓨저는 론칭 27일 만에 완판되었다.

BM, 제품·콘텐츠 디자인: 크리에이티브전략팀
운영 및 공간 디자인: 리스토어비즈니스팀
그렇지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늘 남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저는 디자이너들이 경험치를 쌓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지난해 중장기 전략 발표 때 ‘리얼 배틀그라운드’라는 표현을 썼는데, 디자이너들이 생생한 경험을 해보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크리에이티브센터가 자율성을 갖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진짜 싸움터를 만드는 것이 주요 골자입니다. 이 싸움터는 물리적인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온라인 공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자신이 구상한 아이디어가 단순한 자기만족이었는지, 진짜 통하는 전략이 었는지 체감할 기회이죠.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자기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실패했다면 겸허하게 경청하는 태도를 배울 것입니다.

자발성과 기획력을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도 마련되어 있나요?

2018년부터 자체적으로 CP(Creative Partners)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년 자신이 발의하는 프로젝트를 필수적으로 수행하는 프로그램이죠. 크게 팀원 개개인이 스스로 자율 주제를 정해 진행하는 방식과 타 부서에서 의뢰서를 받아 진행하는 방식으로 나뉘는데, 전자의 경우 외부 리소스 없이 개인이 진행하도록 세팅하지만, 만약 가능성이 보이면 현실화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도 합니다. 그렇게 아이디어가 실체화된 경우도 꽤 많아요. 후자는 신생 브랜드나 연구소, 인사 및 홍보 조직처럼 사내에 정해진 카운터파트가 없는 조직으로부터 디자인 의뢰를 받는 것인데, 이때 크리에이티브센터는 사내 수많은 조직의 창구가 되어줍니다.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센터의 디자인 전략

아모레 성수. 판매를 넘어 아모레퍼시픽이 지향하는 가치를 드러내는 장소다.
공간의 아우라를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너지를 낸다. 크리에이티브센터는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방문객이 항상 새로움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운영 및 공간 디자인: 리스토어비즈니스팀
아모레 성수 운영을 맡은 배경도 궁금합니다.

크리에이티브센터는 첫 과제로 새로운 리테일 모델을 개발하는 리스토어 비즈니스팀을 신설했습니다. 실제 매장을 운영하는 것과 동시에 신규 리테일 비즈니스 기획 역량까지 내재화하여, 기획부터 크리에이티브 솔루션까지 종합적으로 개발하고자 한 것이죠. 디자인센터 시절에는 주로 ‘오픈’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에이티브센터가 되는 시점부터는 플래그십 운영도 책임을 지며 주도적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았어요. 이를 위해 디자이너 외에 타 직무의 전문가들이 크리에이티브센터로 합류했습니다. 영업,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유기적으로 경험 콘텐츠를 만드는 체계가 됐는데 전공과 직무의 틀을 깨고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인재들이 함께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죠.

또 다른 공간 ‘스토리에이’도 직접 운영하고 있죠?

아모레퍼시픽에는 현재 40여 개 브랜드가 독립적인 개체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이 브랜드 활동의 주축이었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정 규모 이상의 브랜드들은 독립적인 플래그십 매장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설화수나 라네즈 같은 브랜드 외에는 브랜드의 세계를 보여줄 공간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스토리에이는 브랜딩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만든 공간입니다. 아모레 성수가 아모레퍼시픽이라는 아우라가 지배적인 공간이라면, 이곳은 그때그때 공간을 채우는 브랜드가 더 두드러지는 곳이죠. 스토리에이는 크리에이티브센터의 고객 경험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 선정부터 팝업 기획, 연출 등을 센터가 총괄합니다.

한남동에 위치한 스토리에이. 약 132㎡에 이르는 지하 공간을 한 브랜드로 채운다.
최근 아모레퍼시픽의 신규 브랜드 ‘롱테이크’의 전시가 열렸는데 크리에이티브센터 내 세 팀이 협업해 진행했다는 점이 의미 있다.

제품 디자인: 브랜드 크리에이티브3팀
비주얼 콘텐츠: 크리에이티브전략팀
공간 디자인: 리테일 크리에이티브팀
한율 빨간쌀 진액 스킨 리미티드 에디션.
흩뿌려지는 홍국균의 율동감과 그러데이션된 레드 컬러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2022 iF 디자인 어워드 위너를 수상했다.

제품 디자인: 브랜드 크리에이티브2팀
트렌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지난 수 년간 급격한 성장을 이룬 K-뷰티 시장이 최근 들어 한 풀 꺾인 모양새입니다. 사드 배치 논란과 팬데믹의 영향이 있었겠지만.

물론 그렇게 분석하는 전문가들도 있지만, 저희는 변명하지않으려고 합니다. 그동안 한류의 영향과 ‘한국 여성의 피부가 깨끗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글로벌 매출이 크게 상승했지만, 최근 둔화의 배경에는 저희의 준비와 대처가 미흡했던 게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OEM, ODM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독립 화장품 브랜드가 늘어났습니다. 중국에는 20만 개 이상의 브랜드가 있다고 해요. 인플루언서의 명성을 등에 업고 등장한 브랜드도 늘어났죠. 저희도 변화하는 추세에 따라 신규 브랜드 론칭 등의 전략을 가져가기도 하지만, 새로운 브랜드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무작정 브랜드 라인업을 늘리기보다 진짜 가치 있고 선망성을 가질 수 있는 브랜드 위주로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시대를 반영하는 시도도 여전히 병행하고 있습니다. 회사 차원에서 좋은 브랜드를 인수하는 전략도 유효하고요. 라인업을 늘려나갈 때 저희는 오히려 함부로 기존 브랜드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자칫 그동안 축적된 브랜드의 정체성이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브랜드의 고유성을 좋아하는 팬이 있는데 우리 입맛대로 바꾸다 선망성을 잃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2022년 iF 디자인 어워드 위너를 수상한 아이오페 슈퍼바이탈 포텐셜 크림 패키지 디자인.
장식을 최소화하되 유기적인 곡선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표현했다. 60% 이상 재활용 플라스틱을 활용한 점도 눈에 띈다.

제품 디자인 : 브랜드 크리에이티브2팀
‘무엇을 하느냐’만큼 ‘무엇을 하지 않느냐’를 선택하는 것도 크리에이티브에서 중요한 덕목이죠. 지난 수년간 브랜드도 늘어났지만 시장도 확장됐어요. 해외 소비자들에 맞춰 디자인 전략을 변화시킨 부분도 있나요?

저희도 일부 로컬라이제이션 전략을 구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글로벌 스탠더드화가 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모바일 시장이 좋은 예입니다. 초기 피처폰 시절에는 각 시장에 맞게 디자인을 변화시키고 나라의 특색에 맞게 기능을 강조하기도 했죠. 그런데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모두가 표준화된 화면과 레이아웃을 바라보면서 지역 맞춤형 전략의 유효성이 희미해졌습니다. 현재 화장품 시장도 유사하다고 생각해요. 핵심이 되는 브랜드의 코어를 지역 시장에 맞춰 바꿀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세계 시장에 동일하게 통용될 만큼 강화하는 게 맞죠. 단, 세부 전략은 그때그때 시장 상황에 맞게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조정할 수 있고요.

확실히 웹 문화가 일반화되면서 판매와 유통 시장, 디자인 전략까지 전방위로 변화하는 듯합니다.

최근 리뉴얼한 해피바스도 비슷한 사례죠. 예전에는 빼곡히 상품이 들어찬 매대에서 소비자에게 어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 제품이 왜 좋은지 패키지 디자인에서 구구절절 피력해야 했죠. 디자인의 목표도 소비자들이 얼마나 더 손이 많이 가게 하느냐에 방점을 찍었고요. 하지만 e커머스가 일반화된 요즘은 다릅니다. 사실 구매는 한순간이지만, 제품은 늘 일상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잖아요? 일상으로 편입하는 순간 높은 가시성이나 부연 설명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죠. 정보가 도처에 널려 있는 세상이기에 디자인에도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라이프스타일 속에서 관계 맺기가 가능한 쪽으로 말이죠. 해피바스 외에 롱테이크, 스킨유 등 아모레퍼시픽의 생활용품 브랜드의 디자인도 동일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프리메라 맨인더핑크. 마인드풀 클린 뷰티 브랜드 프리메라의 남성 스킨케어 라인이다.
강인한 남성성 안에 섬세한 감성이 있다는 메시지를 ‘Reverse & Wit’라는 키워드 아래 시각화했다.

제품 디자인 : 브랜드 크리에이티브1팀
젠더 뉴트럴이나 지속 가능성 트렌드를 봐도 시대의 패러다임이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욕망과 윤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상황처럼 보이네요.

물론 디자이너나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환경에 좋으니까 비싸지만 사세요’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대다수 사람은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이를 위해 희생하지는 않아요. 가치를 지키되 매력적인 상품을 만드는 게 디자이너의 몫이 아닐까요? 다만 한 가지 최근 경향을 보면 욕망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인상은 받습니다. 예전보다 자연스럽고 환경에 신경을 기울이는 방식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크리에이티브센터가 추진 중인 활동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은 ‘유행화장’이라는 콘텐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아모레퍼시픽은 올해로 64년째 정기간행물 〈향장〉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에서 발행한 최초의 정기간행물인데 콘텐츠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이런 귀한 자료가 사료로만 남아 있다는 게 안타까워서 MZ세대 관점에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5월 중에는 아모레퍼시픽의 제품 생산 철학과 생산 스토리를 경험할 수 있는 ‘아모레 팩토리Amore Factory’가 오산 뷰티파크 공장에 오픈합니다. 오산뷰티파크는 미술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인데 아직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죠. 유행화장, 아모레 팩토리,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아트 & 사이언스’ 프로젝트, 센터 내 비주얼 콘텐츠 전문가들의 작품을 알리는 리포트 ‘스튜디오’와 〈캡처드〉전 등 모두 수면 아래에 있던 가치를 끌어 올려 콘텐츠화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려져 있던 영역을 밖으로 끄집어내 콘텐츠화하고 그 공로를 빛나게 해주는 것에 당분간 집중하려고 합니다.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전략팀에서 선보인 〈캡처드〉전.
아모레퍼시픽 세계본사 1층 APMA 캐비닛에서 열렸다.

전시 디자인: 크리에이티브전략팀
아트 & 사이언스. 아모레퍼시픽의 16가지 우수 기술의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3D로 시각화했다.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재해석한 이 콘텐츠들은 2022 iF 디자인 어워드 위너를 수상했다.

기획 및 디자인 크리에이티브전략팀 3D 모션 그래픽 : 홍성우
한국처럼 급변하는 시장에서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요?

저는 트렌드를 좇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계를 지우고 과감하게 시도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설령 결과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도 도전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제 좌우명이 “용감함은 천재성과 힘과 마술을 이끈다”입니다. 괴테가 한 말이라는데 사실 정확하진 않아요. 용감함이 아이디어 (천재성)와 추진력(힘)을 준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는 그다음에 행운처럼 따라오는 마술 때문에 이 말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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