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전
2022년 11월 23일부터 3월 2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전이 열린다. 해방 이후 근대화, 산업화를 열망했던 국가 재건 시기 미술과 디자인, 산업의 관계를 조망하는 전시다.
1950~1960년대 활동했던 디자이너들의 아카이브
‘美術輸出(미술수출)’.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휘호로 남긴 글귀다.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믿었던 당시 정부는 디자인의 역할을 ‘포장’에 국한하고 이를 장려했다. 하지만 그보다 이전부터 디자이너들은 미술과 산업, 예술과 일상 사이의 접점에서 디자인의 역할을 제시하기 위해 치열하게 답을 모색했다.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전은 1950~1960년대 디자인의 시대상을 당시 활동했던 디자이너들의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전시는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홍택의 유족으로부터 작품과 아카이브를 기증받은 것을 계기로 성사된 기획이기에 더욱 뜻깊다. 한국 디자인의 선구자로 불리는 한홍택은 일본에서 도안과 서양화를 공부하고 1940년 귀국해 디자이너와 교육자로 활동하면서 1945년 우리나라 최초의 디자인 단체인 조선산업미술가협회(현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이하 산미협회) 창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산미협회는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국내에 정착되기 전 ‘산업미술’이라는 이름으로 개념을 정착시키고 산업미술가(디자이너)의 역할을 알리는 데 힘썼다. 전시 제목인 ‘모던 데자인’은 1958년 〈제2회 한홍택 모던 데자인전〉에서 따온 것. 부제는 그보다 3년 전에 열린 〈한홍택 작품전〉의 브로슈어에서 발췌한 문구다. 당시는 산업미술 외에도 도안, 생활미술, 응용미술, 장식미술 등 디자인을 가리키는 용어가 범람했다. 급속도로 전개된 근대화 과정에 따른 혼란 속에서도 디자인이 전문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애썼던 디자이너들의 노력을 환기시키는 이번 전시는 한홍택뿐만 아니라 이완석, 문우식, 배만실 등 디자인사에서 잊힌 이름을 소환한다. 이들이 남긴 각종 스크랩북, 스케치, 흑백사진 등은 70여 년 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어 관람객을 이끈다. 이는 영웅 디자이너가 이룬 눈부신 성취에 초점을 맞추는 회고전이 아닌 아카이브에서 출발한 전시가 가진 매력이다. 한편 동시대 디자이너들의 커미션 작품은 전시장 안팎을 공명하며 시대와 세대가 교류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모던 데자인〉전은 총 4부로 구성되었다. 1부 ‘미술과 산업: 산업미술가의 탄생’은 한홍택, 이완석의 초기 작업과 아카이브를 보여준다. 한홍택의 자화상 주변으로 진열된 곡선자, 컴퍼스 등 지금과는 사뭇 다른 디자이너의 도구에서 시대적 간극이 느껴진다. 광복을 주제로 한 포스터 ‘해방’과 동화책 삽화 ‘어린이 구락부’는 명확한 주제 전달력과 섬세한 표현 기법이 두드러진다. 이중 ‘어린이 구락부’는 이번 전시에서 첫 공개된 한홍택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어린이들을 위해 출판사에서 아동용 책을 활발하게 출판하던 시기였다. 한홍택뿐만 아니라 당시 디자이너들은 삽화 작업을 통해 한글을 보급하는 일에 동참했다. 한홍택과 함께 산미협회 창립 회원이었던 이완석이 1930년대 천일제약 도안 담당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수집한 상표 디자인과 광고, 포장 디자인 또한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귀한 사료다.
6.25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미국 원조 물자가 유입되면서 차츰 소비사회가 움트던 시기, 디자이너들은 스스로 먹거리를 찾아야 했다. 비핸스나 인스타그램이 없었던 그 시절 디자이너의 작업을 알리는 유일한 창구는 전시와 공모전이었다. 이곳에서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한 가상의 프로젝트 결과물을 소개하는 일에 몰두했다. 해태제과, 아모레퍼시픽, LG화학, 애경산업, CJ제일제당 등 지금의 대기업이 하나둘 생겨나고 소비재 산업이 부흥하기 시작하던 시기였기에 디자이너들의 관심사도 자연스럽게 제약, 화장품, 제과, 식품 등의 패키지 디자인에 쏠렸다. 이에 2부 ‘모던 데자인: 감각하는 일상’에서는 산업적 토대가 부족했던 시기,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분투했던 디자이너들의 다양한 작업을 소개한다. 2부 끝자락에선 커미션 작품으로 김광철의 ‘로고 아카이브 50-60s, 기업의 탄생과 성장’과 장우석의 ‘한글 레터링 컬렉션’이 감상의 묘미를 더한다. 2부에서 3부로 넘어가는 회랑 공간에서는 동시대 그래픽 디자이너 10팀이 참여한 설치 프로젝트 ‘데자인 시대의 표어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어서 ‘정체성과 주체성: 미술가와 디자이너’를 주제로 한 3부에서는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한홍택과 문우식의 활동을 살펴본다. 1956년 화가로 등단했던 문우식은 1964년 〈제14회 산미협회 회원전〉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디자이너로서 입지를 다진 인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재조명한다. 다음 섹션은 1961년을 ‘한국방문의 해’로 지정할 만큼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전력을 다했던 정부 정책과 맞물린 디자이너의 활동상을 살펴보는 4부 ‘관광과 여가: 비일상의 공간으로’다. 1960년대 산미협회 회원들은 제주도, 강원도 등 지자체의 초청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뒤 지역을 홍보하는 관광 포스터를 그려 전시했다. 지역의 고즈넉한 풍경과 유적지를 이상적으로 표현한 포스터 원화 작품에서 미적 성취를 지향하면서도 메시지 전달을 놓치지 않았던 디자이너들의 독특한 표현 기법을 발견하게 된다.
이번 〈모던 데자인〉전은 같은 장소에서 2년 전에 열린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전과 여러모로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다.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촉발된 디자인의 다층적 움직임을 주목한 〈올림픽 이펙트〉전과 달리, 〈모던 데자인〉전은 ‘디자인’이라는 용어조차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암흑기로만 여겨졌던 그 이전 시대를 해부해 미세한 실천을 포착하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홍택을 위시한 초창기 디자이너들이 단단하게 다져놓은 발판은 이후 등장한 세대들이 디자인의 이름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번 〈모던 데자인〉전을 계기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지금껏 누락되었거나 잊힌 근현대사 디자인을 증명하는 아카이브 기증이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Interveiw with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이현주
“이번 전시가 그동안 놓쳤거나 배제된 디자이너와 작업을 새롭게 조명하는 기회가 됐기를 바란다.”
전시의 계기가 된 한홍택 디자이너의 작품과 아카이브 기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하다.
부친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기증하려고 여러 기관을 알아보던 한운성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에게 김성천 CDR 어소시에이츠 대표와 강현주 인하대학교 디자인융합학과 교수가 국립현대미술관을 추천했다. 2020년 한운성 교수의 작업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 방대한 자료와 작품이 잘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이후 기증 및 수집 절차를 거쳐 2021년 한홍택의 디자인 아카이브와 작품을 미술관에 등록했다. 이번 기증은 개인의 영역에 속했던 디자이너의 아카이브가 공적 영역에 환원됨으로써 한국 근현대 디자인사 연구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홍택은 1세대 디자이너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는 그를 어떻게 재평가하고 있나?
한국적인 도상이 등장하는 관광 포스터 등 몇몇 대표 작품을 통해 단정 지었던 한홍택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데에 한홍택 아카이브 기증이 큰 역할을 했다. 포스터, 책 표지, 브로슈어, 레코드 재킷 디자인 등 지금의 시각에서 봤을 때 디자이너 한 명의 작업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소재와 기법이 다양해 놀랍다. 일관된 조형 언어를 찾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개별 작품만으로 그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한홍택은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한 실천가였다. 기존에 없던 장르를 도입하고 새로운 산업과 제도, 교육,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 접목하며 한국 디자인의 태동과 전개를 이끌었던 개척자로 호명하는 것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당시 기증이 마중물이 되어 여러 디자이너의 유작 및 아카이브 기증이 이어졌다.
지난해 4월 이완석 아카이브도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그의 유족인 예화랑 김방은 이사와 이윤국 선생이 한홍택 아카이브 기증 기사를 보고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이완석 유족의 컬렉션에는 문우식의 ‘강원의 설악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문우식 유족과 연락이 닿아 여러 작품과 자료를 살펴볼 수 있었다. 또 2020년에는 여성 공예가이자 디자이너로 활약했던 배만실 아카이브의 기증도 이루어졌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일부만 공개했다. 앞으로 중장기적 조사, 연구를 거쳐 배만실 아카이브 또한 입체적으로 소개할 기회를 만들 것이다. 단순히 연대기순으로 디자이너 개개인을 주목하는 접근보다는 미술관이 다루고자 하는 담론, 의제를 중심으로 디자인의 정의를 확장하는 전시를 이어가고자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한 문우식은 그간 디자인사에 잘 거론되지 않은 인물인데.
디자인사 연구에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몇몇 인물이나 사건, 현상에 의지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많은 부분을 놓치거나 단선적으로 서술해온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싶다. 아무래도 아카이브의 부재, 1차 자료 접근의 어려움이라는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또 디자인이라는 학문 영역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그 경계를 넘나들던 인물이 누락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이번 전시가 그동안 놓쳤거나 배제된 디자이너와 작업을 새롭게 조명하는 기회가 됐기를 바란다.
동시대 디자이너 커미션 작업에 대해 소개해달라. 어떻게 기획한 건가?
긴 세월을 버텨내고 대중과 만난, 원본성을 지닌 당대 작품과 아카이브에 주목하면서 시대적 맥락을 들여다보게 하는 세심한 각주 역할을 하길 바랐다. 더 도슨트(백윤석)의 〈골목 안 풍경 1, 2, 3〉은 시대의 풍경을 공감각적으로 구현한 커미션 작품이다. 한국 근현대 영화 17편을 포함해 뉴스, 국가 홍보 영상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역동적인 삶의 모습은 경직되고 궁핍한 잿빛 이미지로 굳어진 시대의 심상을 풍부하게 만든다. 전시에서 작가로 호명되는 디자이너 이외에도 당시에는 수많은 무명의 도안가, 디자이너들이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의 손에서 탄생한 다양한 광고 삽화부터 기업 로고와 한글 레터링을 입체적인 시각으로 보여주는 김광철과 장우석의 커미션 작업은 우리에게 어떤 인상, 기억으로 남아 있는 시각 기호를 소환하는 역할을 한다.
전시에서 아쉬웠던 점은?
방대한 아카이브를 모두 살펴보기엔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전시가 다루는 시대적 범위도 워낙 넓고 디자인 분야 특성상 개별 작가의 연대기적, 양식적 서술로는 충분하지 않은 작업의 시대적 맥락을 두루 살피는 과정에서 종과 횡으로 작가와 시대를 살펴보는 노력이 압축적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또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는 한국 디자인에 관한 레퍼런스가 미술, 건축 분야에 비해 너무나 부족하다는 점도 아쉬웠다. 전시장 출구로 나가기 전 벽면에 연표를 부착하고 전시 도록에도 상세 연표와 참고 문헌 등 이번 전시를 통해 모은 자료를 빼곡하게 실은 것도 차기 디자인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카이브 전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모던 데자인〉전 개막식에 참석한 한운성 교수는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뒤를 돌아보아야 할 때”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번 전시의 의의를 압축한 한마디라고 본다. 그동안 시선을 두지 않던 것들에 오래 머물고 사유하는 시간을 제공하는 아카이브 기반의 전시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기간 2022년 11월 23일~3월 26일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전시 기획 이현주
전시 디자인 김소희, 홍예나
그래픽 디자인 이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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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