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부르주아의 ‘비에브르 강에 부치는 송가’
부드러운 책, 아트 상품이 되다
지칠 줄 모르는 예술혼으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던 루이스 부르주아. 회화, 드로잉, 퍼포먼스 등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 고유 영역을 구축한 그녀는 말년에 작품 하나를 공개한다. 부즈주아의 예술 철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비에브르 강에 부치는 송가'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업 일대기
거대한 거미 조각, <마망Maman>으로 유명한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는 조각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하나의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회화, 드로잉, 퍼포먼스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생의 마지막 무렵까지 예술 안에서 살았다. 부르주아 스스로는 페미니즘 아티스트로 불리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영감으로 많은 여성 이론가들과 예술가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페미니즘 아트가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준 부르주아는 무엇보다도 여성의 가사로만 여겨지던 바느질을 예술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현대미술의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부르주아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부드러운 직물 작업을 다수 선보였다. 콜라주 작업을 위해 직접 입던 옷을 작업에 사용하던 그녀는 패브릭의 부드러운 촉감이 마치 과거의 기억을 만지는 느낌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그녀가 2007년에 제작한 <비에브르 강에 부치는 송가Ode à la Bièvre>가 자주 회자된다.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이하 AGNSW, 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의 큐레이터 에밀리 설리번(Emily Sullivan) 역시 이 작품을 두고 부르주아의 예술 철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인기만큼이나 아트 상품으로도 가장 많이 제작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에게 비에브르 강의 의미
25페이지로 구성된 패브릭 책이자 낱장으로도 펼쳐 보일 수 있는 <비에브르 강에 부치는 송가>는 말년의 부르주아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만든 것으로 파리 외곽의 비에브르 강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비에브르 강은 당시 부르주아가 살았던 집의 정원과 그녀의 부모님이 운영하던 태피스트리 복원 작업장을 흘러가는 아름답고 조용한 강이었다. 부르주아는 ‘우리가 그 집을 산 것은 그 강 때문이었다’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비에브르 강은 그녀의 가족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탄닌이 풍부한 비에브르의 물은 낡은 태피스트리를 세탁하거나 복원 과정에서 사용된 염료를 고치는데 유용했으며 강에서 나온 흙 또한 아름다운 정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비에브르 강은 부르주아에게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기억의 원천인 곳이다. 그녀는 형제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정원을 가꾸거나 태피스트리 복원 작업을 하던 직원들을 도우며 유년기를 보냈다. 한편 어린 부르주아가 성숙해지면서 부모님의 복잡한 관계를 중재하기도 했는데, 아버지의 불륜과 어머니의 만성적인 질병이 그녀가 평생 안고 다녀야 했던 불안의 원인이었다. 결정적으로 1932년, 어머니의 이른 죽음 이후 정신이 혼미해진 부르주아는 비에브르 강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아버지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기도 했다.
이처럼 비에브르 강은 부르주아에게 지속적인 인상을 불러일으켰고 수십 년이 흐른 후에 따뜻하고 감각적인 부드러운 책으로 재탄생 되었다. 낡은 리넨이 페이지가 되고 단춧구멍이 있는 부분을 바인딩으로 활용한 이 책은 마치 어린 시절에 접했던 천으로 만든 책을 상기시킨다. 1963년 무렵 부르주아는 “내 옷, 드레스, 스타킹을 만져 보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그것은 나의 과거이기에 내 품에서 꼭 붙들고 싶다”라고 기록했을 만큼 촉각에 대한 감정, 즉 직물이 가진 느낌과 기억력 사이의 관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비에브르 강에 부치는 송가> 비하인드 스토리
1995년, 부르주아는 뉴욕 자택의 옷장에서 오래된 옷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색상 별로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옷들은 있는 그대로 남겨두었고 다른 옷들은 새로운 구성을 만들기 위해 잘라냈다. <비에브르 강에 부치는 송가>는 총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2002년에 처음 제작된 이후 2007년에 새로운 버전으로 만들어졌다. 첫 번째 독특한 버전은 부르주아의 드레스, 손수건 등으로 구성되었고 끊임없는 실험을 거친 두 번째 버전에서 부르주아는 스크린 프린트를 통해 원복을 복제하면서 섬세한 자수들과 과거의 얼룩까지 빈티지 직물의 독특한 특성들을 담아냈다.
<비에브르 강에 부치는 송가>의 구성은 변화무쌍한 날씨나 일상의 기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물의 형상으로 묘사된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수평적 움직임과 나선형 모티프는 부드러운 잔물결을 상징하며 이것이 기억만큼이나 시간에 대한 책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젊은 시절을 상징하는 활기찬 색채의 뭉게구름이 유기적으로 둥지를 틀고 있는가 하면 나중에 ‘강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된 기억까지 담겨있다. 이 작품에 많이 사용된 파란색은 부르주아가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삶의 대부분을 불안함으로 보냈던 그녀가 필요로 했던 희망과 감정의 자유를 상징한다. 결국 부드러운 잔물결의 수평적인 움직임과 나선형 패턴 등 고요하고 평화로운 푸른빛의 이미지들은 노 작가의 기억을 새겨 놓은 시각적인 시(詩)가 아닐까.
<비에브르 강에 부치는 송가> 전시
AGNSW은 현재 진행 중인 부르주아의 대규모 전시 ‘Has the Day Invaded the Night or Has the Night Invaded the Day?’를 기획하면서 <비에브르 강에 부치는 송가>를 테마로 한 굿즈를 새롭게 제작했다. 전 세계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각적으로 재해석한 다양한 오브제를 만들어 온 AGNSW 디자인 팀은 그동안 아트 애호가들에게 좋아하는 예술 작품을 보다 친근한 방식으로 소유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이번 전시와 더불어 부르주아의 독특한 작품을 아트 상품으로 제작하는 일은 뉴욕 이스턴 재단(The Easton Foundation) 과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부르주아의 작품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무수한 이야기를 속삭이며 각자의 해석을 찾도록 격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유년의 기억으로 완성된 일기 같은 작품 <비에브르 강에 부치는 송가>는 한 세기를 살다 간 예술가가 우리에게 남긴 영구적인 유산이라는 데 더욱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