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월간 〈디자인〉이 주목하는 디자이너 15팀] 함지은

조용하게, 하지만 성실하게 한 발씩 나아가는 함지은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제 막 문을 연 스튜디오의 이름은 ‘상록’이다.

[2025 월간 〈디자인〉이 주목하는 디자이너 15팀] 함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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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지은 — 북 디자이너. 홍익대학교에서 회화와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출판사 열린책들 디자인 팀장으로 일했다. 최근 독립하여 ‘상록’을 설립했다.

“종이는 하루살이 같은 두께 안에 우주를 품을 정도의 뜨거운 힘을 감추고 있다.” 북 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의 말이다. 종이책 시대가 공공연히 막을 내렸지만 책은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 실체 없는 데이터가 생성과 휘발을 반복하는 가운데, 책의 명징한 물성이 비로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함지은은 그 가치에 오래전부터 매료되어 있던 사람이다. 책이라면 어려서부터 사족을 못 썼지만 전자책을 쓴다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수없이 많은 책을 고르고 만지고 모으던 그가 종이책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북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출판사로 직장을 옮겼다. 스스로를 북 디자이너라고 소개해온 지 햇수로 10년을 채운 2024년, 함지은은 6여 년간 몸담았던 출판사 열린책들을 떠나 독립을 결심했다. “디자이너의 시도를 독려하는 분위기에서 매번 새로움을 골몰해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그 지난한 고민의 과정이 곧 나를 훈련시키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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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볼라뇨 20주기를 기념하는 특별 합본판 〈2666〉. 소설책으로는 보기 드문 커다란 판형에 은장 테두리로 압도적인 느낌을 주었다.

인하우스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홀로 설 힘을 기를 수 있었다는 그의 말은 결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다. 지난 10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포트폴리오가 이를 방증한다. 〈2666〉은 ‘2024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되며 그의 커리어에 오래도록 남을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위엄 있는 국배판과 날 선 각양장으로 장정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냈다. 반면 ‘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을 만들면서는 비우고 덜어내는 법을 익혔다. 표지에 얹은 최소한의 시각 요소만으로도 작품의 정수를 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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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가위로 오린 종이를 스캔해 표지 일러스트를 만들었다.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도 창작의 메커니즘은 한결같다. 모든 디자인은 예외 없이 원고를 읽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일상에서는 취향의 감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만 일을 할 때는 주관과 개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어떤 경우에도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뜻 디자이너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소요소가 책 내용과 결부되어 있다.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의 경우가 그렇다. 형형색색 별색 표지가 ‘과감하고 아티스틱’하다는 세간의 평을 받았지만, 사실 시리즈 전권의 표지 컬러는 정직하게 책의 줄거리에서 추출한 것이다.

조용하게, 하지만 성실하게 한 우물을 파는 태도는 함지은의 작품 세계 전반에 스며 있다. 그가 여전히 손으로 선을 긋고 가위로 종이를 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맛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기꺼이 수고를 감수하는 것이다. “책으로 정보를 얻는 시대가 지났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북 디자이너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제는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 표지를 쓰다듬다가 책장을 넘기게 될지 누가 아나. 내가 만든 책이 누군가의 독서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최근 영국 출판사와 계약을 마쳤다는 그는 이제 국내를 넘어 세계로 발을 넓히기 시작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한 발씩 나아가는 함지은의 다음 행보를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제 막 문을 연 스튜디오의 이름은 ‘상록’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59호(2025.01)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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