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50주년을 맞은 계선

한국 인테리어 디자인의 살아 있는 역사

디자인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은커녕 마땅한 교과서도 없던 1960년대,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로 문을 연 계선은 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한다. 국내 유수의 호텔과 백화점, 상업 공간, 사무 공간 등 시대에 앞선 세련된 스타일과 디자인 감각을 선보인 공간에는 늘 계선의 이름이 함께한 것이다. 이렇듯 국내 인테리어 디자인 역사의 산 증인과도 같은 계선이 창립 50주년을 맞이했다.

창립 50주년을 맞은 계선

디자인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은커녕 마땅한 교과서도 없던 1960년대,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로 문을 연 계선은 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한다. 국내 유수의 호텔과 백화점, 상업 공간, 사무 공간 등 시대에 앞선 세련된 스타일과 디자인 감각을 선보인 공간에는 늘 계선의 이름이 함께한 것이다. 이렇듯 국내 인테리어 디자인 역사의 산 증인과도 같은 계선이 창립 50주년을 맞이했다. 과거는 물론이고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선구자적 시각과 독창적인 디자인, 높은 품질과 기술 등에서 반백년을 이어온 계선의 기업가 정신을 발견해 본다.


국내 첫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의 탄생

시간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롯데호텔 서울 자리에 당시 반도호텔이 있었는데 1965년 이곳과 소공동의 웨스틴조선호텔을 연결하는 반도조선 아케이드를 지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쇼핑센터가 오픈한 셈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아케이드 한 쪽의 3.9평 작은 공간에서 계선의 역사도 시작됐다. 첫 상호명이 ‘엘리건스 인테리어’였던 계선은 국내에선 처음으로 설립한 실내 건축 전문 회사다. 건물을 짓기 위한 건축 설계 사무실이야 존재했지만 인테리어 디자인의 경우 그 개념이나 필요성조차 인식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장충섭 회장은 본래 디자인만 하고 싶었지만 당시엔 지적 소유권이라는 것도 없었고 한마디로 종이에 연필로 그려주는 그림을 가지고는 값을 받는 게 불가능했다. 그림 속 디자인대로 실행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뜯거나 고치기라도 해야 일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후 사업은 ‘하는 수 없이’ 점차 확장됐다. 나름의 디자인 이상이 존재했지만 주변에 이를 구현할 자재나 도구가 있을 리 만무했기에 직접 제작에 나선 것이다. 문짝 하나를 달려 해도 마땅한 것이 없어 제조해야 했고, 그 문에 필요한 경첩을 만들기위해선 또 다른 공장을 지어야 할 판이었다. 우여 곡절 끝에 실내 공간을 완성했을 땐 그 안에 들여 놓을 가구 역시 품질이나 디자인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눈에 차지 않았다. 요즘에야 외국의 가구를 다 수입하지만 당시에는 관세를 200%, 300%씩 내도 들여올 수가 없었기에 장충섭 회장은 미국과 일본의 유명 가구 브랜드 디자이너들을 만나고 설계실을 쫓아다니며 국내에서 직접 가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프랭크 로이드라이트(Frank Lloyd Wright), 미스 반데어로에 (Mies van der Rohe) 등의 가구와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제작하던 미국의 놀(Knoll) 사를 찾아가 국내 제작의 허가를 받아낸 일은 유명하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놀의 의자, 가구는 높은 품질을 자랑했고 일본 지사를 비롯해 해외로 역수출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감각과 트렌드로 독창성과 전문성을 인정받다

지금에야 국내 유수의 호텔과 백화점, 상업 공간, 금융 기관, 병원, 고급 여객선의 실내 건축을 도맡아 한 회사로 유명하지만 계선이 처음부터 큰 프로젝트만 맡은 것은 아니다. 초기에 디자인한 것은 주로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외국 항공사의 티켓 오피스로 호텔 외 주요 공공장소에 위치하던 부스에 각 항공사의 매뉴얼대로 특징이 드러나는 인테리어를 선보였다. 당시 외국 문화를 많이 접할 기회가 없었던 국내에선 굉장히 이국적이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디자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계선은 하얏트, 워커힐 등 외국계 호텔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IBM, 휴렛패커드 같은 외국계 기업과 국내 대기업의 쇼륨과 백화점, 병원, 학교 등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절반 이상이 고생스러웠던 기억이라는 장충섭 회장의 말대로 그간 계선이 걸어온 길에는 밝은 빛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재정적 뒷받침이 안 돼 열두 번 이사를 다니고 열세 번째에야 비로소 회사 소유의 공장을 갖게 됐다거나 자금난에 허덕이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뿌리내린 인테리어 디자인의 첫 시작이 엄격히 분리되어야 할 디자인과 시공을 동시에 시행하는 풍토를 만들었다는 자책은 기업의 경영을 넘어서 앞으로의 변화와 발전 방향을 모색하게 한다. 병원이나 학교 등 특수 분야의 영역은 전문 회사가 맡아야 하는데 구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염려와 걱정 앞에선 다양한 분야의 포트폴리오 역시 자랑만이 아니다. 이렇듯 지난 50년의 시간은 단순히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이뤄낸 성과만은 아닐 터. 비슷한 업종의 크고 작은 회사와 경쟁 업체들이 한순간 사라지고 자취를 감추는 가운데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장충섭 회장은 “업계에서 꼭 일등을 하겠다는 욕심이 단가를 낮추고 경쟁을 부추기며 결국 화를 만든다”며 계선은 오히려 요즘 어떻게 하면 매출을 줄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고 말한다. 대학에서 제품디자인을 전공하고 1997년 계선에 합류한 아들 장윤일 사장도 같은 생각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커다란 집을 일년 내내 고치고 증축하며 리모델링하는 모습이 참, 재미있어 보여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다는 장충섭 회장처럼 늘 보던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 지금의 자리에 있는 그 역시 매출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없다.

100년 기업을 꿈꾸는 반백년의 역사

50년이 되어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고, 며칠 전부터는 기분도 이상하고 속에 영 답답한 것이 많다는 장충섭 회장은 현재 인테리어 디자인업계에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디자이너의 주도하에, 그 의도대로 시공이 진행되기보다는 클라이언트가 중간이나 마지막 공정에서 수정을 요구하고 방향을 트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해외 디자이너들이 국내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경우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하고 실망하는 부분 역시 이 지점에 맞닿아 있다. ‘실내 디자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던 시절, 외국 잡지를 보고 현장에서 필요한 용어 하나, 표기 하나씩 사용해가며 축적된 시간이 오늘의 전문 영역을 만들었듯 앞으로 개선되고 바뀌어야 할 부분 역시 많은 것이다. 지난 50년 간 계선을 거쳐간 인재도 많을 터. 초창기 함께 했던 민영백 건축가부터 한국 최초의 아트 디렉터인 이상철까지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디자이너들은 현재 국내 디자인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재 경영도 경영의 주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이 회사에 있을 때 그 역량을 키우도록 한다는 게 계선의 전략이다.

현재 계선에서 발행하는 계간지에는 그때그때의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한편, 디자이너와 실무를 맡은 담당자들의 사진과 이름을 함께 싣는다. 각자가 진행한 일에 대한 소감도 짧은 글로 적는데 회사뿐 아니라 한 개인의 기록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세계적인 건설 회사 백텔(Bechtel)에서는 직원이 다른 곳으로 이직할 경우, 그 사람이 근무했던 이력이며 진행한 프로젝트가 금세 컴퓨터에 쭉 정리돼 나와요. 그걸 바로 이력서로 쓰면 되니까 우리도 곧 그렇게 만들어야지.” 50년 전 인테리어 디자인의 불모지에 첫 싹을 틔웠을 때처럼 장충섭 회장은 지금도 여전히 이루고 싶은 것이 많다. 단순히 회사의 규모와 매출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선진적인 경영 방식과 국내 인테리어 디자인업계의 발전, 무엇보다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디자인과 품질에 대한 부분에서 그렇다. 반백년의 역사가 그냥 생긴 것은 아닐 터. 앞으로 매출을 더 줄이더라도 우리가 더욱 잘할 수 있는 일에만 매진하겠다는 장충섭 회장의 말대로 50년 뒤에도 여전히 한 우물만 파고 있는 전문 회사로서 남아 있기를, 그래서 국내 인테리어 디자인 업계에 100년 기업의 위상을 떨치길 기대해본다.

계선은 어떤 회사?

1965년 반도조선 아케이드에 상호명 ‘엘리건스 인테리어’로 처음 문을 열었다. 외국 항공사의 티켓 부스 인테리어를 시작으로 국내 유수의 호텔과 외국계 기업의 디자인을 맡으며 인테리어 디자인 분야의 전문성과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1975년 부천공장을 준공, 1979년에는 계선산업주식회사로 법인 전환해 사업을 점차 확장시켰다. 1988년에 오피스가구 전문 생산회사인 계선 오피스 시스템스를 설립했으며 1989년 상공부장관상인 수출의 날 100만불 수출의 탑을, 1994 건설부장관상인 전문건설공사 유공자 표창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주식회사 계선으로 법인 상호명을 변경했다. 현재까지 그랜드하얏트서울, 신라호텔, 웨스틴조선서울, 반야트리, W서울워커힐을 비롯해 국내 유명 호텔의 인테리어와 분더숍, 10코르소코모, 랄프로렌 플래그쉽 스토어, 벤츠 등 상업 공간, 골프 클럽, 크루즈 등의 수 많은 프로젝트를 도맡아 했다.

Interview
이상철 디자인 이가스퀘어 프로젝트 프로듀서
“비즈니스를 하는 진정한 디자이너”

1968년, 당시 나는 산업은행의 홍보 책자를 만드는 일을 했었는데 엘리건스 인테리어에 다니던 친구의 소개로 장충섭 회장을 만나게 됐다. 건축과 실내 디자인, 가구 사업에 이어 그래픽 파트에서도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삼청동 초입에 있던 사무실에 도착하니 찰스 임스 의자가 쭉 놓여진 가운데 곳곳에 유명 디자인 잡지가 꽂혀 있는데 아주 돌아버릴 것 같았다. 늘 책에서만 보았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니까 아, 디자인이 이거구나 싶었던 거다. 바로 사표를 써서 제출했지만 그만 두지는 못했고 대신 퇴근 이후 엘리건스 인테리어에서 일했다. 당시 내가 하던 일은 공사를 맡은 호텔의 CI와 관련 책자 등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책상 위에서 잠들거나 화장실에서 속옷을 빨아 너는 날이 일쑤였지만 참 즐거웠다. 그렇게 2~3년간 일을 하던 어느 날 장충섭 회장이 나에게 한국브리태니커 설립자인 한창기 씨를 소개했다. 자신이 필요에 의해 뽑은 직원이지만 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내 미래와 발전 방향을 봤을 땐, 그와 일하는 것이 더 좋을 거란 판단이었다. 아쉽지만 브리태니커로 옮길 생각을 하라는 장충섭 회장의 말대로 나는 이직을 했고 후에 한창기 씨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하며 아트 디렉터로 일하게 됐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장충섭 회장이 참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다. 내 기억에 장 회장은 늘 자기 일에 전념할 뿐, 돈을 탐하지도 남을 의식하거나 경쟁하려 하지도 않은 분이었다. 계선이 50년간 꾸준히 역사를 이어온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진정한 디자이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내게 오직 장충섭 회장뿐이다.

Interview
이종환 옴니디자인 대표
“국내 인테리어 디자인의 선구자”

장충섭 회장을 처음 만난 건 1970년대 초였다. 당시 나는 한남동에 고급 주택을 짓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집에 놓을 큰 소파 제작을 엘리건스 인테리어에 의뢰하면서 알게 됐다. 그때 계선 공장이 아마 지금의 중구 신당동, 구 성동구청 자리에 있었을 거다. 외국 책에서나 나올법할 장식이며 가구를 만들어내는데 그야말로 획기적이었다. 놀(Knoll)에서 나오는 바우하우스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국내에서 만들고 수출까지 했으니 당시 해외 문물이나 건축, 문화를 접할 수 없었던 환경에서 고급기술을 알고 개안도 된 일종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수십 년간 호텔, 레스토랑, 백화점 등을 시공 설계한 회사로 유명하지만 소파며 목가구 등을 만들어내는 눈썰미와 기술이 참 대단했다고 기억된다. 계선은 아마도 한샘과 그 역사가 비슷할 텐데 한 회사는 가구를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유통업체로 발전한 반면 또 한 회사는 여전히 한 우물을 파며 좋은 설계와 시공을 하는 회사로 남아있다. 매출이나 규모의 차이만큼 서로 다르게 변한 모습이 흥미롭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별다른 인연은 없지만 멀리서 지켜본 장충섭 회장은 늘 겸손하고 점잖은 분이셨다. 디자인사에 별다른 기록도 없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계선이 국내 인테리어 디자인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내가 40년 간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살며 업계에 존경하는 사람이 딱 두2명 있는데 그중 한 분이 바로 장충섭 회장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441호(2015.03)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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