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A&T 영상디자인팀 ━ 김원일·이준호
개표 방송의 풍자와 해학, 그 뒤의 숨은 이야기
선거일을 앞두고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건 후보자만이 아니다. 방속국 디자이너들은 하루 치 개표 방송을 만들기까지 어떤 여정을 거칠까? SBS A&T 영상디자인팀을 만나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봤다.

선거일을 앞두고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건 후보자만이 아니다. 이날 각 방송사는 오랫동안 갈고닦은 개표 방송을 선보이며 또 다른 선거를 치른다. 언젠가부터 개표 방송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 시청자들은 리모컨을 손에 쥐고 또 한 번 투표에 나선다.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눈을 사로잡는 그래픽에 한 표를 던지고, 누군가는 영화에 버금가는 연출에 손을 들어준다. 풍자와 해학에 높은 점수를 주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감점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전 국민의 마음을 공략해야 하는 방송국 디자이너들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들은 하루 치 개표 방송을 만들기까지 어떤 여정을 거칠까? SBS A&T 영상디자인팀을 만나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준호(오른쪽) – SBS A&T 영상디자인팀 소속 영상 그래픽 디자이너. UI 영상 디자이너 및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다가 2018년에 SBS에 합류했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총 다섯 번 개표 방송에 참여했다. 2021년 도쿄 올림픽 버추얼 그래픽 제작을 담당하기도 했다.
인물 사진 박순애(스튜디오 수달)
개표 방송 디자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김원일 방송사가 개표 방송 디자인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게 불과 10여 년밖에 안 됐다. 그 전에는 크고 작은 개입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후보자 얼굴이 잘 나온 컷으로 사진을 교체하라며 비서실에서 전화가 오는 식이었다. 이미지 한 장도 함부로 손댈 수 없으니 디자이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부터 현저히 간섭이 줄었다. 그즈음부터 조금씩 새로운 걸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SBS 개표 방송이 시청자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은 건 2012년 총선 때였다. 후보자 간 접전을 줄다리기에 빗댄 애니메이션이 크게 화제가 됐다.
개표 방송은 원래 고루하고 무거운 이미지가 강했다. 파격적인 기획에 대한 내부의 우려는 없었나?
김원일 어쩔 수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상파 3사의 시청률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했는데 SBS는 규모나 인력 면에서 타 방송사를 압도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우리가 가진 무기는 ‘바이폰’이 유일했다. 개표 방송의 시청률을 잡으려면 바이폰에 완전히 힘을 싣는 수밖에 없었다.
이준호 바이폰VIPON은 ‘Voting Information Processing Online Network’의 약자다. 보통 ‘실시간 투·개표 정보 그래픽’이라고 한다. 개표 정보를 숫자로 나열하는 대신 그래픽을 활용해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시스템이다. 실시간 데이터가 들어오면 미리 만들어둔 그래픽 포맷을 입혀 생방송으로 송출한다. 2012년 당시만 하더라도 SBS 독자 기술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타 방송사들도 관련 시스템을 구축해둔 상태다.

기술 격차가 좁혀질수록 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겠다.
김원일 방송사 간 경쟁도 경쟁이지만 요즘은 대중의 눈높이를 따라가는 게 더 어렵다. 조금이라도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러운 CG는 시청자의 눈을 피해 갈 수 없다. 개표 방송, 특히 총선 개표 방송은 후보자만 수십 명이라 시간과 인력이 늘 부족하다. 그 와중에 그래픽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신기술을 도입하며 실험하는 수밖에 없다. 2022년 대선 때는 처음으로 3D 스캔 기술을 도입해 후보자 얼굴을 촬영했다. 그해부터는 카메라 각도나 캐릭터 동세의 제약 없이 다각도로 그래픽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 3D 스캔이 없었더라면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에스파의 ‘넥스트 레벨’ 패러디도 탄생할 수 없었을 거다.(웃음)
이준호 작년 총선 개표 방송에서 선보인 〈국회행: 자리 쟁탈전〉은 ‘언리얼 엔진’이라는 리얼타임 3D 그래픽 툴을 활용해 만들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열차 액션을 패러디한 바이폰이었는데, 언리얼 엔진 덕분에 그래픽 퀄리티를 높이면서도 제작 시간은 크게 단축했다. 이런 식으로 매 개표 방송마다 조금씩 기술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조만간 AI 기술도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내다본다. 작년에 타 방송사에서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선례를 남기지 않았나. 우리에게는 좋은 레퍼런스가 된다.


개표 방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패러디다. 그때그때 유행하는 밈과 콘텐츠를 활용하려면 속도전도 중요할 것 같은데.
김원일 무엇보다 그게 제일 어렵다. 기획은 거의 1년 전부터 시작하는데 유행이 너무 자주 바뀐다. 레퍼런스를 수도 없이 찾아보면서 앞으로 유행할 트렌드를 예측해보려고 한다. 원래는 유튜브도 잘 보지 않았는데 선거 기획팀에 있을 때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쇼츠를 들여다봤을 정도다.(웃음)
이준호 그렇다고 유행하는 콘텐츠를 무조건 패러디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개표 방송은 전 국민이 시청하는 방송인 만큼 특정 세대를 겨냥하기보다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문화 코드를 적용하려고 한다. 풍자 수위를 두고도 끊임없이 의견을 나눈다. 선거 팀은 일단 한번 꾸려지면 철저히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만큼 결과와 책임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기획 초반에는 기자, 디자이너 할 것 없이 공정성 검수에 가장 주의를 기울인다. 검열만 담당하는 ‘레드 팀’이 조직 내부에 별도로 존재할 정도다.
검열 대상에는 어떤 게 포함되나?
이준호 정치적 중립을 벗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만한 시각적 요소는 원천 차단한다. 컬러 하나까지도 굉장히 예민하게 검토한다. 득표율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정 정당을 연상시키는 색을 불필요하게 노출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상대 후보를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표현도 자체 검열 대상이다. 아무리 패러디일지라도 말이다.

과거와 비교해 영상 호흡이 더 짧아진 듯한 인상도 있다.
김원일 실제로 그렇다. 예전에는 영상 호흡을 7~10초 내외로 가져갔다면 요즘은 그보다 훨씬 짧게 제작한다. 영상이 조금이라도 지루하다 싶으면 바로 채널이 돌아가니 어쩔 수 없다. 쇼츠 문화의 영향이 이렇게나 크다.
이준호 그렇다고 하루 종일 이어지는 방송을 전부 쇼츠처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시간대를 고려해 호흡을 달리한다. 오전에는 비교적 차분한 톤을 유지하다가 출구 조사 발표 후 예측 득표율이 나오기 시작하면 빠른 호흡으로 편집한다. 자정에 가까워지면 당선자가 발표되기 때문에 다시 느슨한 템포로 돌아간다. 시간대에 따른 편성의 호흡이 분명히 존재한다.


개표 방송의 볼거리가 지나치게 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원일 지난 선거 때 CG와 그래픽에 힘을 주면서 상대적으로 토론의 비중을 줄인 감이 있었다. 그런데 정당 간 대립각이 심해지면서 시청자들이 예전과 달리 토론을 더 관심 있게 보더라. 개표 방송에서 빠질 수 없는 게 풍자와 해학이라지만 정치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은 요즘 상황에서는 고민이 크다.
이준호 화제성에 혈안이 되어 자극적인 볼거리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개인적으로는 아쉽긴 하다. 2022년 대선 때 〈국민의 마음을 잡아라〉라는 애니메이션 바이폰을 만든 적이 있었다. 국민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정치를 하라는 메시지를 담았는데, 애니메이션 제작이 처음이다 보니 주제가 선명히 전달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시청자가 느끼지 못했을 수는 있지만 제작자 입장에서는 분명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 같은 시도와 노력이 수없이 많았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개표 방송이 대중이 정치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하나?
이준호 선거 기획팀을 꾸릴 때 단기간 동안 함께 일할 디자이너들을 채용한다. 면접을 볼 때 정치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곤 하는데, ‘그렇다’고 대답하는 비율이 예전보다 확실히 늘었다. 젊은 유권자의 정치 관심도가 전보다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개표 방송이 그러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미약하게나마 기여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김원일 개표 방송이 대한민국의 정치나 민주주의에 대단히 이바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우리는 그저 민주주의에 발맞춰왔을 뿐이다. 이 땅에 뿌리내린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준 것이다.
SBS 개표 방송을 보는 모든 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준호 선거가 끝난 뒤에 회자되는 건 몇 개의 장면뿐이고 나머지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개표 방송 하루를 위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불철주야 노력한다. 결코 화제성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는 걸, 수없이 고민하고 덜어내면서 모두를 위한 개표 방송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김원일 우리가 개표 방송에 풍자와 해학을 곁들이는 건 어디까지나 유권자가 선거에 쉽게 접근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부디 투표할 권리를 포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