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유감 굿즈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때. 유권자가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 기능하도록 돕는 K-집회 준비물 키트를 8팀의 디자이너에게 의뢰했다.

시대유감 굿즈

비상계엄 선포 이후 촛불 집회는 ‘빛의 혁명’으로 진화했다. 변화의 중심에는 2030세대와 K-팝 팬덤, 그리고 그들이 가진 가장 밝은 도구 ‘응원봉’이 있었다. 진영 논리의 한계를 목도한 2030세대는 정치의 대중화를 명확히 보여줬다. K-팝 굿즈는 상품을 넘어 가치관을 드러내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집회 준비물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정치가 권위적 틀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때다. 유권자가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 기능하도록 돕는 K-집회 준비물 키트를 8팀의 디자이너에게 의뢰했다.


모두의 안녕을 위한 낱말들

소수 권력에 의해 사회가 혼란을 맞이하는 일은 역사를 통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우리가 누리는 가치 중 어떤 것은 손으로 잡히지 않는 무형의 것이라 이따금씩 집회에 참여해 비로소 그 의미를 되새긴다. 민주, 평화, 연대, 질서, 자유, 정의가 이 사회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떠올려본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가치는 단어, 노래 가사, 수어, 상징으로 함축되어 나타나곤 한다. 우리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낱말과 모습을 키트에 눌러 담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그 의미를 다시 곱씹을 수 있도록,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가상의 사물을 떠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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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줘

집회를 위한 모자와 스피커. 모자를 둘러싼 종이에는 문구를 기재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데, 모자가 자체 발광해서 밤에도 문구를 읽을 수 있다. 꽃도 꽂을 수 있도록 했다. 스피커는 두 종류로 디자인했는데 사방에 확성기가 달린 미니 스피커는 핸드 타입으로 제작했다. 사전에 녹음한 파일을 재생하는 방식으로, 손잡이에 부착한 터치스크린을 통해 재생 순서와 배터리 유무를 확인할 수 있다. 시각장애나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버튼 스피커를 사용하면 된다. 버튼 위의 점자로 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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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이카(대표 이수향·하지훈)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다양한 시도와 확장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가치와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한다. KBS 〈독도의 무명씨들〉 타이틀 디자인, 경남도립미술관 〈무수히 안녕〉전을 비롯해 유수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王은 없다

“손바닥에 王 자를 쓴 사람을 잡아라!” 어느 때보다 시린 겨울, 길 위에서 소리치는 우리 모두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낸다. 맞잡은 손의 온기를 떠올리며 집회를 위한 목도리, 모자, 장갑 세트를 디자인했다. 이 나라에 王은 없다. 오직 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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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보이어(대표 이화영·황상준)
2016년 이화영, 황상준이 서울에 설립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언어로 온전히 전할 수 없는 내용을 이미지로 시각화하고, 사용자의 의미 있는 경험을 유도하는 비주얼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주로 맡고 있다. 디자인과 예술, 평면과 입체, 텍스트와 이미지 등 다양한 층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그 사이에서 능숙하게 유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나의 세계를 지켜줘

각자가 가진 가장 밝은 빛을 들고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깃발을 든 모습은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싸우는 마법 소녀를 떠올리게 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 가다가도, 세상이 위협받을 때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악당과 맞섰던 어린 시절 만화 속 소녀들이 현실로 소환된 듯한 순간이었다. 마법봉의 영롱한 아름다움을 담은 응원봉과, 변신한 마법 소녀의 전투복에서 영감을 받은 방한·방수용 케이프를 디자인했다. 집회 현장에서 헌법에 대한 이해를 돕는 대한민국 법전과 체력을 보충할 리커버리 바도 준비했다. 지난겨울 집회에서 만난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마법 소녀의 세계관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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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스튜디오 고민(대표 안서영·이영하)
그래픽 디자이너 2명이 운영하는 프린트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성수동 건물 한쪽에서 다양한 책과 음반을 디자인하며 출판 레이블 ‘라스츠카피LASTzCOPY’를 운영하고 있다.


동그라미 키트

선결제 문화, 기부금 운동, 질서 정연하면서도 축제 같은 분위기. 다양한 형태의 집회 문화를 경험하며 많은 사람이 단단한 고리로 연결되어 유연하면서도 결속력 있게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각기 다른 주체가 모여 단단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집회 현장의 모습을 동그라미 키트로 표현했다. 키트는 수많은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물병’, 강한 연대를 상징하는 ‘티셔츠’, 따뜻한 불을 밝혀줄 ‘성냥’, 새롭게 떠오른 선결제 문화를 염두에 둔 ‘컵 홀더’, 집회 현장의 쓰레기를 담을 ‘에코백’, 집에 부착해도 멋스러운 ‘피켓’으로 구성했다.


지금 당장 바로

‘지금(NOW)’, ‘당장(ASAP)’, ‘바로(RIGHT)’ 는 빠른 시간 안에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이 그 어느 때보다 발 빠르게 움직인 이번 탄핵 집회에서 도출한 키워드다. 집회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가독성과 시인성에 집중했다. 간결한 메시지를 담요이자 깃발, 모자, 마스크에 담아 소리가 울려 퍼지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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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스튜디오 빠른손(대표 김도현)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인 & 웹 개발 스튜디오. 브랜딩, 아이덴티티, 포스터, 책, 웹사이트 등을 디자인한다. 직관적이고 선명한 시각언어를 지향하며, 주어진 조건 아래서 다양한 매체의 특성을 디자인에 적용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자 한다.


빛의 영웅을 위한 갑옷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영웅들을 위해 방한 아이템을 디자인했다. 희망을 외치는 빛은 뺨을 감싸고, 정의를 위한 차가운 불꽃은 두 발을 지지하고, 지켜내고자 하는 터전을 향한 애정은 온몸에서 퍼져 나온다. 이 에너지를 시각화해 헤드피스와 부츠, 패딩을 만들었다. 어디에 서 있든 온몸 구석구석에서 우리가 가진 신념이 가시화되어 빛날 수 있도록 말이다. 영웅은 세상을 구한다. 길 위의 우리 또한 세상을 구할 것이다. 따뜻하게, 밝게, 애정을 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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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 for next: 멈추지 않는 목소리를 위하여, 바통 터치 집회 키트

활동가들이 집회 현장에서 연대와 목소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키트다. 여러 사람이 깃발을 함께 꽂아 사용할 수 있는 공유 깃대는 미끄럼 방지와 손난로 기능을 갖추고 있다. 공유 피켓은 DIY 형식으로 만들었다. 민중 가요의 가사 낱자를 절취선에 따라 자르면 개인 구호를 만들 수 있고, 뒷면을 확성기로 변형하면 목소리를 크게 내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공유 방석은 깃대와 피켓을 담는 가방으로 변신한다. 벨크로 방식으로 허리에 고정할 수 있어 편리한 이동이가능하다.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연대를 확장하고 지속하며 목소리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고안한 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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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그래픽 행동가 모임(대표 김희경)
기획 남선미 비주얼 브랜딩 및 그래픽 디자인 이정아 오브젝트 디자인 및 3D 목업 김희경
그래픽 행동가 모임은 권리 단체에 연대하고자 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모임이다. 지난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업무가 과중된 권리 단체의 활동가들에게 연대로서의 그래픽 디자인 노동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까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윤석열 탄핵 울진군민행동’,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등과 연대했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0호(2025.02)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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