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들의 시국 선언 ‘시대 정신’

인권 운동가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많은 문학 작품을 발표한 엘리 위젤은 노벨 평화상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느 한 편을 들어야 한다. 중립을 지키는 것은 가해자에게 도움이 되지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침묵은 괴롭히는 사람을 돕는다.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 지금 소개하는 프로젝트의 기획자와 참여자는 모두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인물이지만 침묵하지 않았기에 비범한 창작자다. 민주주의를 향해 이들이 걸어온 발걸음은 우리가 앞으로 마주할 민주주의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디자이너들의 시국 선언 ‘시대 정신’

지난해 12월 3일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모습을 목도하며 불면의 밤을 보냈다. 8년 전 탄핵이 무색할 만큼 혼란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가만히 기다릴 수 없었다. 1차 탄핵안이 부결되자 행동으로 실천해야겠다는 의지가 뚜렷해졌다. 일상의실천이 기획한 ‘시대 정신’은 정치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마주한 디자이너들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참여한 프로젝트다.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는 군부독재 정권부터 지금까지 정치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며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져왔다. 역사적 분기점마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한 시민들이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시국 선언문이라는 텍스트로 기록되었다. 안타깝게도 과거 시국 선언문에서 엿보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현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도와 배경을 덮어둔다면 2025년이라고 해도 믿을 법하다. 우리는 어쩌면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기에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일상의실천은 민주주의의 타임라인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자는 취지에서 1960년대부터 2024년까지 발표된 시국 선언문을 아카이빙하고 이를 재구성해 디자인계의 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63팀의 참여 작가들은 시국 선언문의 단어나 문장을 발췌해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명확했다. 훼손된 민주주의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 다만 디자이너이기에가능한 방식으로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했다. 단순히 시국 선언문을 인용하는 작업이 아닌, 시각적 재해석을 통해 개인의 메시지와 역량을 드러내며 오늘날 디자이너의 책임과 역할은 무엇인지 반추하고자 했다. 프로젝트를 주도한 일상의실천 권준호 공동 대표는 지금 한국 사회가 분열되어 있는 만큼 ‘시대 정신’이 성별과 세대를 아우르는 통합의 장이 되길 의도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방식을 고민했다. 특정 정권이 퇴진하고 조기 대선이 시작되면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휩쓸려가고 더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권 퇴진을 촉구하기보다는 절차적 정의 위에 세워지지 않은 민주주의가 어떤 위험성을 갖는지, 시대 정신이 흔들릴 때 권력이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 되돌아보고자 했다. 프로젝트의 기획자와 참여자들이 전달하고자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거나 완성된 체계가 아니다. 모두가 계속해서 가꾸어나가야 할 제도로, ‘시대 정신’은 그 과정의 일부로 유의미한 기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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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 시대 정신을 이루는 모습을 시각화한 ‘시대 정신’ 포스터. 디자인 일상의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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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들이 디자인한 포스터, 발췌한 시국 선언문, 시국 선언 발표 단체 및 인원과 민주주의의 타임라인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시대 정신’ 웹사이트’. 디자인 일상의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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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무너질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교과서를 비롯해 많은 문학 작품, 영화, 그리고 뉴스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은연중에 민주주의를 과거의 일 혹은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여긴다.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동시대성’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단순히 독립된 주체가 아닌,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사회에 소속된 인간임을 방증한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기에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민주주의는, 많은 이들이 무임승차했으나 오랜 시간 누군가의 희생으로 치열하게 일궈온 시대 정신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25년을 관통하는 시대 정신은 무엇인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가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인식하길 바란다.”

권준호
일상의실천 공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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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민주 구국 선언문
디자인 전채리 시국 선언문 그러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해서’보다는 ‘국민에게서’가 앞서야 한다. 시국 선언 발표 함석헌 외 16명,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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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사회도 외친다 “윤석열 퇴진!”
디자인 오이뮤 시국 선언문 동물만 행복한 세상은 없다. 시국 선언 발표 2024 동물단체 25곳,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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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시국 선언
디자인 크리스 로 시국 선언문 법의 잣대는 정의로워야 하며 부당한 차별은 철폐해야 한다. 시국 선언 발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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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들은 무엇인가
디자인 김어진 시국 선언문 소리 없이 타오르는 분노를 아는가. 그것은 한없이 깊어지는 절망이자 애써 붙들린 마지막 희망이다. 시국 선언 발표 카이스트 총학생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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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민주주의를 지켜내
디자인 이푸로니 시국 선언문 세계의 민주주의는 연결되어 있다. 시국 선언 발표 요크대학교 한인 학생, 동문, 교수·연구자, 2024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0호(2025.02)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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