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재단 ‘라 베리에흐’의 일곱 번째 전시

잔인한 현실 속 은신처

에르메스 재단 라 베리에흐La Verrière‘의 시리즈 전시 <증강된 솔로solos augmentés>의 일곱 번째 주인공은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세네갈 다카르 출신의 아티스트 펠라지 그바구이디Pélagie Gbaguidi다.

에르메스 재단 ‘라 베리에흐’의 일곱 번째 전시

3개월마다 큐레이터 조엘 리프Joël Riff가 새롭게 선보이는 전시들은 메인 아티스트 한 명과 그와 연계성을 가진 외부 아티스트들이 초청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번엔 ‘앙트르’라는 제목으로 펠라지 그바구이디와 함께 신진 디자인 집단 아이고Aygo의 가구, 프랑스 작가 소피 마리 라루이Sophie Marie Larrouy의 글, 마리안 베렌오Marianne Berenhaut의 조각, 자메이카 출신의 텍스타일 작가 헤시Hessie의 자수 작품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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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전경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은신처 또는 굴을 뜻하는 프랑스어 ‘앙트르Antre’는 작가의 성향을 잘 표현하는 단어다. 회화, 드로잉, 퍼포먼스, 설치 등 변화무쌍한 예술적 실천을 펼치는 펠라지 그바구이디는 반권위주의적이며 반학문적인 인류와 인간에 대한 관계를 시적인 표현으로 표출하는데 ‘앙트르’는 식민지, 이주, 정체성, 권력관계와 같은 심각한 문제들이 존재하는 현재에 실존하지 않는 안전한 공간, 즉 작가만의 은신처를 대변한다. 지리적 위치를 벗어나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관해 얘기한다. 현실이 배가되는 현재의 삶의 방식 속 잘못된 인간의 각인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까? 이곳에선 시간, 공간을 넘나들며 상처, 분열, 무감각, 불침투성을 재결합하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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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도화지를 사지 않고 공책에서 찢어낸 종이, 침대 시트, 그리고 밀가루 포대 위에 아크릴, 연필, 파스텔 같은 순수 안료를 사용해 완성한 회화 작품과 드로잉들은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드로잉과 함께 등장하는 문장들 또한 그렇다. 작가는 글을 통해 본인의 존재를 수용자의 입장으로 드러내고 그것을 작품을 통해 소화시킨다.

제국주의, 팽창주의에 반대하는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침해한 것과 반환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고, 이 결과를 현재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바른 인식을 장려하는 것이 목표다. 그렇게 형성된 것이 안전한 공간에 대한 중요성이고 너무 많은 소수민족이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는 오늘날까지 이 개념이 유효하다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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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지 그바구이디Pélagie Gbaguidi courtesy of the artist © Isabelle Pateer

점점 국제적 인지도가 커지고 있는 펠라지 그바구이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거주하는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라 베리에흐’ 전시가 첫 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벨기에 첫 개인전에 선보인 대부분의 작품들은 전시장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작가의 작업실에서 제작되었으며 특별히 회화와 드로잉에 초점을 맞췄다. 전시장 벽에는 초기부터 집중해 온 회화적 표현법이 쓰인 작품들이 걸려 있고 초청된 외부 작가들의 조각, 자수, 가구 작업을 중앙에 배치하거나 천장에 매달리게 연출해 네 작가들 작품 간 조화로운 다이얼로그를 형성시키고 있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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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작품이 헤시Hessie의 1969작 © Isabelle_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1933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예술가가 된 헤시Hessie의 자수 작품은 그바구이디의 회화들 사이에서 잔잔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오직 스스로가 만든 ‘생존 예술Survival Art’라는 사조에 준거해 작업을 펼쳐온 헤시는 일상 속 구하기 쉬운 재료나 버려진 폐기물에 수선하고 치유하고 연결하는 행위인 바느질을 접목시켰다. 그녀에게 생존 예술이란 본인 가까이에 있는 페미니즘 해방 운동이나 그녀가 헌신적으로 참여했던 여성의 단결을 위한 모임과 연결 지을 수 있는데 이런 의지는 펠라지 그바구이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일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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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가 걸쳐진 벤치가 마리안 베렌오(Marianne Berenhaut)의 2024년작 조각품. © Isabelle_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조각 작품으로 참여한 또 다른 여성 작가 마리안 베렌오Marianne Berenhaut 또한 사회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 해악, 손상, 흉터에 대해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34년생으로 올해 91세인 작가는 길거리에서 수집한 재료를 사용해 강력하면서도 연약한 조각품을 만들어 그리움과 상실, 부조리와 트라우마에 대해 전달하는데, 이 비슷한 활동 방식은 세 여성작가들의 동질성을 보여주면서 ‘앙트르’ 전시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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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abelle_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전시장 공간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드리운 오브제들은 브뤼셀에서 활동하는 젊은 디자인그룹 ‘아이고Aygo’가 창조한 가구들이다. 1996, 97, 98, 99년도에 태어난 네 명의 – 아인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를 막 졸업한 – 신진 디자이너들에 의해 2022년에 설립된 디자인 집단 ‘아이고’는 독특한 호스피탈리티 디자인을 선보이며 불과 2년도 안 되는 짧은 활동 기간에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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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abelle_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뉴욕타임스는 2024년 9월 이들의 행보를 ‘가장 파괴적인 예술적 실험’이라고 칭하며 ‘아이고’의 탐구적 행위를 심도 있게 다루기도 했다. 펠라지 그바구이디가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시기는 2024년 4월이었는데 ‘에스파스 아이고’라고 불리우는 아뜰리에로 사용 중인 6개의 침실을 갖춘 타운하우스를 방문하고 엄청난 시각적 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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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abelle_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파피에마셰 (다양한 종루의 종이, 섬유, 황토분 등을 겹겹이 쌓는 방식으로 형태를 만드는 작업)로 제작한 동굴 모양의 벽 선반, 우레탄 고무로 코팅한 욕조, 재활용한 나무를 깎아 만든 화병 등 원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공간은 본인의 창작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이번 개인전에 동참의 권유하게 되었다. 전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열악한 상태의 공간을 재활용 재료만을 사용해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적 공간으로 탈바꿈한 결과물은 일종의 혁명과도 같다. 그들의 젊은 움직임은 현대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식민지, 페미니즘, 트라우마에 대한 상처와 치유처럼 현시대의 문제 해결 방법으로 예술적 혁명을 벌이는 연장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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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abelle_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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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abelle_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전시 ‘앙트르’는 숨기 위한 은신처가 아닌 오히려 우리에게 문제 해결의 출구를 제안하는 자발적 안식처로 보인다. 세대와 인종이 연결되고 그렇게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서사가 되어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고 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시대에 활동한 작가들의 동질감이 느껴지는 다이얼로그를 발견하는 것처럼 관객을 관찰하도록 유도하며 세대 간 소통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깨달음도 느끼게 해준다. 그때 느껴지는 평함은 작가의 심연을 탐구한 후 찾아오는 보너스다.

Information
앙트르(Antre)
장소
라 베리에흐La Verrière​
기간 2025년 1월 15일 – 3월 29일
운영 시간 화요일-토요일(12:00 ~ 18:00) *무료입장
웹사이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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