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디자이너 시바타 후미에 柴田文江
제품에 온기를 불어넣는 디자이너
부엌용 가전, 체온계 등 일상에서 무엇보다 가깝게 접하는 일용품을 중심으로 다수의 히트 상품을 디자인한 시바타 후미에. 대대로 섬유업을 이어온 가문 출신이라 장인의 작업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온 그녀는 대학 졸업 후 도시바 디자인센터에서 드라이어, 면도기 같은 소형 가전을 디자인했다. 3년간의 실무 경험을 거친 뒤 1994년 디자인 스튜디오 S(Design Studio S)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부엌용 가전, 체온계 등 일상에서 무엇보다 가깝게 접하는 일용품을 중심으로 다수의 히트 상품을 디자인한 시바타 후미에. 부드러운 곡선과 뛰어난 조형 감각으로 일본은 물론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대로 섬유업을 이어온 가문 출신이라 장인의 작업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온 그녀는 대학 졸업 후 도시바 디자인센터에서 드라이어, 면도기 같은 소형 가전을 디자인했다. 3년간의 실무 경험을 거친 뒤 1994년 디자인 스튜디오 S(Design Studio S)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클라이언트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며 자신을 소개했지만, 직접적인 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제품 개발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기 마련 이고, 실적 없는 신인 디자이너에게 일을 의뢰할 정도로 세상은 너그럽지 않으니까. 2년간의 고군분투 끝에 와카야마 현에서 개최한 공모전에서 수상하면서 그녀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됐다. “표준이란 독특함의 반대말이 아니다. 본질을 파악하고,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다면 어떤 디자인도 표준이 될 수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시바타 후미에의 디자인 철학은 2004년 오므론 (Omron)에서 출시한 체온계 ‘켄온쿤’에 잘 드러난다. 당시 체온계 시장은 수은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하지만 디자인은 얇고 긴 원형 몸체 위의 작은 눈금을 읽어야 하는 수은식 체온계에 머물러 있었다. 체온계의 기본 기능인 ‘측정’과 ‘확인’에 주목한 시바타는 센서 부분을 겨드랑이에 끼우기 쉽도록 납작하게 디자인했다. 또한 숫자 확인을 쉽게 할 수 있게 액정을 크게 만들었다. 체온계의 기존 이미지를 의식하지 않고 인체의 틈새와 굴곡, 움직임에서 디자인 핵심을 찾아내 완성한 ‘켄온쿤’은 체온계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서 발표한 조지루시의 ‘주토(Zutto)’ 전기밥솥의 이미지를 180도 바꾸면서 ‘스타일리시 가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시바타 후미에는 이제껏 없던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려고 한 적은 없다. 단지 체온계나 전기밥솥의 기본 기능에 어떤 형태와 디테일이 적합한지 주목하고 고심했을 뿐이다.






시바타 후미에의 목표는 “디자인의 힘으로 기존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최근에는 제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업의 이념, 제품의 서비스나 시스템을 정리하고 재구축하는 프로젝트를 다수 진행하고 있다. “브랜딩이란 제품 그 자체다. 흔히들 광고에 나오는 모델이나 로고가 브랜딩의 주인공이라 생각하지만, 진정한 브랜드 이미지는 제품 안에 담긴 기업의 이념과 역사, 기술이다.” 디자인 의뢰를 받으면 무엇보다 클라이언트의 ‘진짜’ 모습을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그녀의 말은 본질을 파악하고 있다면 어떤 디자인이든 표준이 될 수 있다는 디자인 철학과 맞물린다. 2009년 교토에 오픈한 캡슐 호텔 ‘9h’는 디자인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성공 사례로 꼽힌다. 남성 비즈니스맨의 전유물로 어둡고 저렴한 숙박 시설로 인식되어온 캡슐 호텔에 대해 시바타 후미에는 기본적인 개념의 재정립을 제안했다. 9h를 통해 캡슐 호텔은 잠시 눈 붙이는 저렴한 공간에서 상쾌한 다음 날을 위한 충전의 장소로 거듭났다. 숙박비가 싸기 때문이 아니라 직접 공간을 체험하고 싶어 9h를 찾는 손님이 많을 정도였다.
올해는 그녀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한 지 20주년 되는 해다. 대다수의 사람이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디자이너 하면 시바타 후미에의 이름을 떠올린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30대의 기억은 전혀 없을 만큼 앞만 보고 달려왔다. “어떤 디자인을 설명할 때 ‘여성’이라는 점이 편리하게 사용 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일까? 그저 설명하기 쉽기 때문은 아닐까? 디자인의 본 질은 거기에 없다.” 많은 디자인 평론가가 시바타 후미에의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여성성’을 거론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디자인이었다는 평가도 많다. 그동안 성별에 관한 질문도 질리도록 받아왔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점은 디자이너 시바타 후미에가 가진 하나의 개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Interview
시바타 후미에 디자인 스튜디오 S 대표
어린 시절 어떤 놀이를 좋아하는 아이였나?
상업에 종사하는 부모님 덕분에 언제나 많은 사람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이 대화할 상대가 있다면 몇 시간이나 수다를 떠는 아이였다.
일본에는 ‘유리 천장’이 존재하나?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디자인업계에서 그런 걸 의식한 적은 없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 중에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에서는 70%가 여성일 정도다. 하지만 사회 진출 후 10년이 지나면 현장에서 여성 디자이너를 찾기 어렵다. 그들이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비율로만 따지면 일본도 비슷하다. 포기보다는 여성이 출산, 육아 등으로 쉬게 되면서 복직할 기회가 적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돌아올 사람은 꼭 돌아온다. 내 주변에도 5~6년간 아이를 돌본 뒤에 다시 일을 시작한 여성이 많다. 여성 디자이너의 모습을 보기 힘든 데에는 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가 크게 영향을 끼친다. 다시 말해 여성이 남성보다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이 더 많다. 일보다 가정 생활, 육아 등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실현하는 것일 뿐이다. 불합리한 유리 천장으로 인해 설 자리를 잃는다고는 보기 어렵다.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는 디자인 분야는 전통적으로 손을 활동하는 공예, 가구와 패브릭 등 생활용품 분야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자 제품, 자동차 등 산업 디자인계에서 여성 디자이너를 찾기 어렵다. 단순히 흥미가 없어서가 아닐까?
여성은 일반적으로 사물보다 스토리에 강하다. 자연스럽게 그래픽을 비롯한 커뮤니케이션 관련 디자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학생일 때만 해도 자동차에 흥미를 가지고 대학에 들어온 여성 자체가 적었다. 특별히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산업 디자인 계통에 흥미가 없는 여성이 많아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도 찾기 어려운 게 아닐까 싶다.
여성성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 여성성이 당신의 작업에 영향을 미쳤나?
글쎄. 여성성이라. 솔직히 나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주변에서 마음대로 그렇게 단정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이라서’라는 말은 그리 듣기 좋은 표현이 아니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성의 없는 표현이다. 여성성이 내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있다면 일을 시작한 계기 정도다. 일을 의뢰받는 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점이 작용할 때가 분명 있다. 하지만 의뢰하는 입장에서 단순히 설명하기 쉬워서 ‘여성’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가 더 많다. 의뢰를 받는 것은 디자이너로서 또 하나의 기회를 얻는 일이고,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당신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제품에서 다수의 히트 상품을 디자인했다. 일용품을 디자인할 때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사용자의 생활에서 제품이 주역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일상에서 존재감은 분명하지만 ‘나대지 않는’, 자유롭게 적응하고 해석해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완성하는 것에 주력한다. 그런 디자인이야말로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다.
지난해 당신의 대표작 오므론 체온계 ‘켄온쿤’을 발매 10년 만에 리뉴얼했다.
‘사용자에게 더 친절한 형태’를 디자인 지침으로 하는 오므론의 플래그십 모델이다. 외형보다 내부 기능에 초점을 맞췄다. 어떻게 보면 이전 기종의 답습에 가까운 디자인이다. 리뉴얼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게 능사는 아니다. 신제품에서 형태가 담당하는 역할을 제고했다. 이전 모델과 거의 비슷한 디자인을 신제품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선보이는 것은 오므론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 무조건 새로운 디자인이 사용자에게 늘 반가운 건 아니다. 결과적으로 10주년을 맞이한 켄온쿤은 조금 작아지고 가벼워졌으며 측정이 빨라졌다. 기술적인 면을 보완해 제품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한 디자인이다. ‘롱 라이프 디자인 실현’이 목표였다.
당신은 어렵고 딱딱한 기술을 인간의 체온과 함께하는 쉽고 부드러운 디자인으로 번역해왔다. 디자인과 기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다.
인간이 디자인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과 기술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 그 사이에 디자인이 있는 것 아닐까. 최신 기술을 활용해 풍요로운 삶의 가치를 만드는 게 디자이너의 본업이다. ‘기술’ 하면 어감이 딱딱해지기 쉬운데, 신소재를 개발하고 지금까지 없는 무언가를 만드는 게 기술은 아니다. 최신 기술로 완성된 디자인이 우리 삶에 가깝게 다가서는 과정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앞서가는 것과 본질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행위다. 기술 덕분에 사용자의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과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원초적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표현이 아니라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까운 존재를 더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사용하면서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게 디자인의 목표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원시적이며 원초적이다. “디자인에 ‘여성이라서’라는 말은 너무나 간단하고 성의 없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