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지우는 경계 허물기의 노력, 케이이치 타나아미

전쟁과 질병의 상흔 속에서 꽃 핀 팝아티스트의 기록

케이이치 타나아미 작가의 60여 년에 걸친 예술 여정을 조망하는 전시, <Keiichi Tanaami I'M THE ORIGIN>

트라우마를 지우는 경계 허물기의 노력, 케이이치 타나아미

케이이치 타나아미가 구축한 독창적인 예술관

1936년, 도쿄의 한 섬유 도매상의 장남으로 태어나 장래 만화가가 되기를 소망하며 자란 아이. 그러나 그의 유년 시절은 예술적 꿈보다는 전쟁의 폭력과 죽음의 공포로 채워지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 대공습을 겪으며 하루에 몇 번이나 방공호로 피신하는가 하면, 화염으로 가득 찬 하늘과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거리를 보는 것이 어린 그가 겪던 일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메구로역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그냥 타버린 풍경만 있었죠.

케이이치 타나이미

아시아 팝아트의 선구자, 동양의 앤디워홀이라는 별칭을 얻고, 무라카미 다카시(b.1962), 요시토모 나라(b.1959)로 이어지는 슈퍼플랫 SUPERFLAT 미술 운동의 전신으로 꼽히는 인물, 케이이치 타나이미(Keiichi Tanaami)의 시작이 되는 이야기다. 폭격의 한 가운데에서 출발해 충격과 공포, 상실과 상흔의 기억을 안은 그가 어떻게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순수예술과 상업디자인을 넘나들고 통속을 무너뜨리며, 서구 대중문화를 수용하고 전통과도 결합한 그의 일대기가 궁금하다. 마침 지금 대림미술관에서 그의 전시 《Keiichi Tanaami I’M THE ORIGIN》이 열리는 중이다. 해외 첫 회고전이자 대림미술관 역대 최대 규모 개최에 700여 점의 방대한 작품량이 소개되며 의미를 가진다. 포스터, 실크스크린, 애니메이션, 실험영화, 회화, 조각, 미디어아트, 브랜드 협업 오브제, 팬데믹 기간 중 매진한 <피카소 모자상의 즐거움>(2020-2024) 등 그가 한평생 시도해온 여러 장르를 볼 수 있다. 미술관 1층부터 4층, 미술관 옆집으로 관람 동선이 이어지며 시각적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공간의 분위기와 환영의 맥시멀리즘을 느낄 수 있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움직임’을 기반으로 작업한다고 말한 케이이치 타나이미의 작품 세계와 같이 말이다.

고등학생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타나아미는 대학 졸업 후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다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전향하게 됩니다. 미국 만화와 팝 아트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중반부터 실크스크린 작업을 시작한 타나아미는 1968년, 주류 문화를 반대하는 성향의 미국잡지 아방가르드AVANT GARDE가 주최한 반전 포스터 대회에서 <노 모어 워>를 출품해 상을 받게 됩니다.

대림미술관

타나아미는 1981년 결핵을 앓게 되었고, 네 달 가까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요. 생사를 헤매는 가운데 밤마다 약의 부작용으로 환각과 꿈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타나아미는 이 경험을 노트 10권에 달하는 분량으로 기록하여 퇴원 후 자신이 본 환각 이미지를 창작으로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대림미술관

전쟁과 자본 사이의 역설, 급격한 사회 변화와 문화적 혼종 속 언뜻 화려해 보이는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작품. 그 이면에는 트라우마로 집약된 이미지와 죽음의 존재감이 늘 가까이 있었다. 그는 예술과 실용,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이곳 세계와 저편 너머의 문을 허물고 불안과 한계로부터 나아가기 위해 애썼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타나아미가 작고하면서 《Keiichi Tanaami: I’M THE ORIGIN》는 작가 유작전이 되었다. 전시장 초입에 그의 설치 및 병풍 형식의 회화 <백 개의 다리>가 전시되고 있는데, 세속과 신성, 이승과 사후를 연결하고 구분하는 경계이자 만남의 장소로 표현된 작품 속 아치형 다리가 더욱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Interview with 이여운 디렉터

대림문화재단 전시기획 총괄 디렉터
대림미술관에서 케이이치 타나아미 특별전을 열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일본 현대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연구하던 중, 대중이 보다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네오팝’ 장르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장르의 개척자이자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구축한 케이이치 타나아미 작가를 조명하게 되었습니다. 케이이치타나아미 작가는 삶의 모든 순간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해왔습니다. 그의 작업 세계를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고자 이번 특별전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과 비교해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대림미술관은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이라는 비전 아래, 익숙한 요소들 속에서 새로운 영감을 발견할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해 왔습니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가와 주제,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인데요. 이번 전시 역시 케이이치 타나아미 작가의 파격적인 작업을 소개하며, 기존 전시들과 맥락을 공유하면서도 더 대담한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작가의 예술 세계를 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700여점의 방대한 작업으로 구성된 점이 이번 전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전시를 공간별로 나누어 다섯 개의 주제로 분류했는데요(1층: INTO TANAAMI’S WORLD, 2층: IMAGE DIRECTOR, 3층: CREATIVE ILLNESS, 4층: TANAAMI’S UNIVERSE, 미술관 옆집 2층 전시 공간: TANAAMI’S CABINET). 각각의 주제를 떠올린 기획의 아이디어가 궁금합니다.

이번 전시는 케이이치 타나아미 작가의 60여 년에 걸친 예술 여정을 조망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초기부터 최근 작업까지 연대기적 순서로 배치하기보다는, 작가의 삶을 뒤흔든 전환점과 그것이 예술에 투영된 방식을 중심으로 카테고리를 나누었습니다. 각 섹션은 작가가 겪은 극적인 순간과 그로 인해 탄생한 작품들을 통해, 작가의 독창적인 시각과 세계관을 보다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습니다.

​그런 기획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공간 디자인에도 심혈을 기울이신 것 같습니다. 시각적으로 압도 당하는 느낌도 드는데요. 어떤 디렉팅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대림미술관의 층별 전시장 구조를 적극 활용하여, 전시를 관람하는 과정 자체가 작가의 인생과 예술을 탐험하는 여정이 되도록 구성했습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각 공간을 경험하는 동안,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대표작에서 차용한 시각적 요소들이 공간 디자인에 반영되어, 마치 미로 같은 그의 머릿속을 직접 탐험하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작품과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독창적인 전시 경험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디렉팅하였습니다.

1936년생 작가가 경험한 전쟁의 상흔, 생사의 기로에서 겪은 환각 등의 트라우마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겪는 환경 및 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케이이치 타나아미가 밀레니얼의 관심을 받는 이유가 뭘까요?

케이이치 타나아미 작가가 젊은 세대에게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단순히 특정 시대의 경험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풀어내는 방식이 시대를 초월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디자인, 애니메이션, 회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했는데요. 이러한 장르 해체적인 태도와 강렬한 시각적 표현 방식은 밀레니얼 세대가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서브컬처 및 오타쿠 문화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더욱 강한 공감을 이끌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전시 개막 후 현재까지 두 달 정도 지났는데 관람객 반응이 어떤지요?

케이이치 타나아미 작가의 열정과 방대한 작업량에 흥미를 갖고 영감을 얻는 분들이 대다수 입니다. 특히 고령의 나이까지, 작고 이전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시었다는 점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관람객 분들께서 놀라워하시기도 합니다.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인 만큼 저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디렉터로서 작가의 방대한 작품을 살피며 그만의 독보적인 예술관과 삶의 여정을 가깝게 보셨을 것 같은데요. 이번 계기로 새롭게 발견·해석하게 된 특성이 있을까요?

전시기획을 진행하면서, 케이이치 타나아미 작가의 작업이 단순한 시각적 강렬함을 넘어,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던 중 한강 작가님의 인터뷰에서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적나라하게 글을 썼다’는 내용을 접했는데요. 케이이치 타나아미 작가 역시 강렬한 색채와 이미지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며, 치유받지 못한 트라우마의 극복 의지와 표현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담아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전시 소개 글 중에 케이이치 타나아미에 대해, ‘방대한 양으로 시각적 과부하를 일으키는 기법의 작업들에 등장하는 모티브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아바타이자 두려움에서 해방된 우리 자신을 구현한 존재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전환한다’ 문장이 무게감 있게 읽혔습니다. 디렉터로서 꼽으시는 이번 전시의 관람 팁이 있다면 뭘까요?

케이이치 타나아미 작가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패턴과 선(line)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그의 작업에서는 시선이 여러 방향으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구성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따라가다 보면 작품이 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듯한 역동적인 감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각 공간이 연출하는 몰입감을 온전히 체험하며, 작가가 구축한 독창적인 세계관 속으로 깊이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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