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형 경험’이라는 장대한 놀이터
집에만 있어도 아쉬울 것 없는 세상이다. 소셜 미디어에서 전시 전경을 훑는 것은 예삿일. 공연 실황을 OTT나 스트리밍 서비스로 보고 있자면 시공간이 무색할 지경이다. 어쩌면 공연·전시업계의 최대 라이벌은 휴대폰 화면이 아닐까?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비자의 마음과 몸을 어떻게 움직일까? 그럴 만한 감동과 임팩트를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단연 몰입형 경험 콘텐츠다. 지금 가장 감각적인 경험을 제시하는 이머시브 전시·공간·디자인 그룹을 선별했다.

팀랩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미디어 아트를 얘기할 때 팀랩teamLab을 말하는 것은 이제 진부하다. 그럼에도 팀랩teamLab은 결코 클리셰로 치부되지 않는다. 결성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직 이들의 완성도에 대적할 팀이 없기 때문이다. 팀랩은 마치 서커스 극단이 텐트를 세우듯 세계 곳곳에서 순회 전시를 연다. 또 팀랩 플래닛, 팀랩 보더리스 등의 거점 공간을 통해 상설 전시를 선보인다. 전시 횟수가 늘어난 만큼 식상할 법도 한데, 까다로운 전문가의 재방문까지 이끌어내며 ‘꼭 가봐야 할 전시 목록’ 상위 리스트를 굳건히 지킨다. 이러한 배경에는 ‘집단 창조’라는 팀랩의 철학이 있다. 팀랩은 스스로 ‘아트 컬렉티브’라고 정의하는데 이들에게 아트란 예술, 과학, 기술, 자연의 융합에 가깝다. 팀랩은 설립 초창기부터 아티스트를 비롯해 프로그래머, 엔지니어, 수학자, 건축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팀을 꾸려 작품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직접 구현했다. 팀랩이라는 이름처럼 팀으로 이루어진 실험 집단인 셈이다. 지난해 가장 화제를 모은 전시 공간은 도쿄 오다이바에서 아자부다이 힐스로 이전한 팀랩 보더리스. 팀랩은 관람객이 방황하고 탐험하고 발견하기를 의도하며 50여 개의 방을 만들었다. 공간별로 각각 독립된 콘텐츠를 선보이는 여느 몰입형 전시와 달리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관람객은 방의 경계를 잊은 채 팀랩이라는 우주에 빨려 들어간다. 인류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어떻게 진화할지 궁금하다면 팀랩의 행보를 눈여겨봐도 좋다.


웹사이트 teamlab.art
살아 있는 미래박물관

“미래박물관은 콘텐츠가 끊임없이 진화하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미래박물관 이사장 모하마드 알 게르가위의 말이다. 박물관은 통상적으로 과거의 유산을 되돌아보는 공간이다. 하지만 2022년 두바이에 문을 연 미래박물관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그려나가는 곳이다. 인공지능, 우주 탐사, 기후 위기 적응, 미래 도시, 모빌리티 등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분야를 조망하고, 최신 연구 결과를 접목해 인류의 미래를 시각화하는 데 의의를 둔다. 미래를 탐험하기 위한 미래박물관의 여정은 임시 우주 정거장에 도착하며 시작된다. 바닥을 내려다보면 병든 지구가 보이는데 관람객은 의사나 교사 같은 역할을 맡으며 문제 해결을 고민해야 한다. 다시 말해 미래박물관은 전시 콘텐츠를 만드는 전문가뿐 아니라 대중이 함께 미래 세계를 상상하는 곳이다. 체험형 전시는 5개 층에 걸쳐 펼쳐진다. 우주 거주 공간을 테마로 한 〈OSS Hope〉, 열대우림 생태계를 디지털로 재현한 〈Heal Institue〉,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Al Waha〉 등이다. 전시를 안내하는 인공지능 가이드 아야Aya가 하늘을 나는 택시, 풍력발전소, 지구 궤도를 도는 거대한 구조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미래박물관은 전시 콘텐츠 외에도 건축물의 형상과 규모, 정교한 파라메트릭 디자인과 정보 모델링 기법으로 개관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파사드 면적은 1만 7600㎡, 건물 외관을 밝히는 조명은 1만 4000m에 이르며, 외관의 레이어를 이루는 1024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은 로봇이 제작했다. 내부에는 단 하나의 기둥도 존재하지 않는다. 건물은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 모양 구조인데 빈 공간은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미래, 그리고 그 미래로 나아가는 관문을 상징한다. 아티스트 마타르 빈 라헤지Mattar Bin Lahej가 디자인해 14km의 아랍어 필기체로 외관에 새긴 문장은 두바이 통치자 셰이크 모하마드가 남긴 말로 미래박물관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한다. “우리가 수백 년을 살 순 없지만 우리의 창의성으로 낳은 산물은 우리가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유산으로 남는다. 미래는 상상하고 설계하고 실행하는 사람의 몫이다. 미래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닌, 창조의 대상이다.”




건축 킬라 디자인(대표 숀 킬라Shaun Killa), killadesign.com
주소 Sheikh Zayed Rd, Trade Center, Dubai UAE
웹사이트 museumofthefuture.ae
빛으로 피운 예술, 컬처스페이스


외부의 빛과 소음을 완벽히 차단한 공간의 바닥, 벽체, 기둥, 천장 등에 고화질 프로젝트로 명화를 투사하는 몰입형 전시의 오리지널리티를 느끼고 싶다면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도 좋다. 파리의 아틀리에 드 뤼미에르Atelier des Lumières, 뉴욕의 홀 드 뤼미에르Hall des Lumières, 제주도의 빛의 벙커(Bunker des Lumières), 두바이의 인피니티 드 뤼미에르Infinity des Lumières 등 ‘뤼미에르’라는 브랜드로 세계 곳곳에서 디지털 전시 공간을 선보이고 있는 컬처스페이스Culturespaces다. 뤼미에르표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공간의 건축적 특징을 영리하게 활용해 거대한 미디어 캔버스로 활용한다는 것. 벙커, 채석장, 잠수함 기지, 주조 공장, 은행 등 오래된 시설과 건물을 전시관으로 탈바꿈시키는 컬처스페이스의 저력은 창립자 브뤼노 모니에Bruno Monnier의 행보와 맞닿아 있다. 브뤼노 모니에는 프랑스 문화부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며 박물관, 기념관, 유적지를 비롯해 문화적·역사적 기념물을 관리해왔다. 컬처스페이스가 국경을 넘나들며 디지털 아트 센터를 만드는 것 역시 유산과 문화적 경험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예술 공간의 역할은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21세기 전시에서 더욱 중요해진 이유다”라는 브뤼노 모니에의 말처럼 컬처스페이스의 전시 공간은 기존 예술이 대중에게 다가가던 방식을 완전히 허물었다.

웹사이트 culturespaces.com
이머시브의 새로운 챕터, 스피어

2023년 라스베이거스의 베네시안 리조트에 들어선 스피어는 말 그대로 구球다. 하지만 하나의 고정된 구가 아니다. 미디어 파사드로 구현한 외부 스크린은 달, 화성, 농구공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둥근 모양을 활용해 이모지의 표정을 흉내 내기도 하는데 주변에 경전철이나 비행기가 지나갈 경우 그 방향을 쳐다본다. 꽤나 귀엽고 익살스러워 관광객들은 이모지 스크린이 재생될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스피어는 개관 10년 전쯤부터 입소문이 난 매디슨 스퀘어 가든 컴퍼니(MSG)의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기획 의도와 목표는 명확했다. 구 안팎의 모든 표면을 LED로 만들어 극강의 몰입을 할 수 있는 체험형 극장을 짓는 것. 프로젝터로 빔을 쏴야 하는 많은 이머시브 공간에 사각지대가 있기 마련인데 스피어는 이를 모두 없앴다. 건축은 아레나와 스타디움 설계에 특화된 파퓰러스가 맡았다. 16K 해상도의 최첨단 LED 스크린 100만 개를 건물 내외부에 장착하고, 1만 8000여 개의 객석에는 3D 오디오 빔포밍을 적용한 스피커 드라이버 16만 7000개를 설치했다. 여기에 향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4D 기능까지 더했다. 구 형태가 잊힐 정도로 높은 몰입도를 자랑하는 이곳에서 첫 공연을 한 행운의 아티스트는 U2. 최근에는 페기 구가 무대에 올랐으며 데드 앤 컴퍼니, 케니 체스니, 백스트리트 보이스, 이글스도 잇따라 공연을 열 예정이다.

디자인 파퓰러스, populous.com
주소 255 Sands Ave., Las Vegas, NV 89169
웹사이트 thesphere.com
탈장르적 크리에이티브, 월도프 프로젝트


지금 세계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급진적이며 감각적인 전시를 보고 싶다면 월도프 프로젝트Waldorf Project를 주목해야 한다. 관람객을 무방비한 원초적 상태로 만들고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의 장벽을 허무는 월도프 프로젝트는 그야말로 ‘예술’이다. 이 창작 집단을 이끄는 디렉터 션 로그Sean Rogg는 마티 수로넨Matti Suuronenn이 설계한 비행접시 형태의 조립식 주택 푸투로Futuro에 착안해 〈푸투로〉 시리즈를 이어나갔다. 1960년대 후반 마티 수로넨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설계한 푸투로는 때때로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로 비쳐졌는데 션 로그는 이러한 창작의 간극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빛을 차단하면서도 빛을 비추고, 감각을 소거하면서도 감각을 동원하는 월도프 프로젝트의 전시는 션 로그가 이질적이고 상반된 두 세계에 천착한 결과다. 월도프 프로젝트의 궁극적 목적은 관람객의 순수한 감각을 일깨우며 공동체적 경험을 선사하는 것. 무용수 250명과 참여자 5000여 명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된 〈푸투로-X〉, 약 1만 m 상공을 나는 에어버스 A330에서 모든 실내 조명을 끈 〈푸투로-A〉가 대표적이다. 4월 26~27일에 스톡홀름에서 선보일 〈버추얼 세레니티〉는 의식의 흐름과 융합에 관한 실험으로, 생체 인식 센서와 VR 기술을 사용해 참여자들이 연결된 가상 세계에서 집단 의식의 잠재력을 탐구할 예정이다.
웹사이트 waldorfproject.com
쇼의 연금술사, 발리치 원더 스튜디오


2013년 마르코 발리치Marco Balich, 잔마리아 세라 Gianmaria Serra, 시모네 메리코Simone Merico가 공동 설립한 발리치 원더 스튜디오Balich Wonder Studio는 현재 업계 최고로 꼽히는 엔터테인먼트 그룹이다. 창의성, 혁신성, 감성을 내세우는데 사실 이 그룹의 원동력은 다양성에 있다. 포트폴리오가 이를 방증한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2014 소치 동계올림픽 & 패럴림픽의 여러 행사를 비롯해 루이 비통, 페라리, 돌체앤가바나, 부첼라티, IWC 등 럭셔리 브랜드의 전시 및 패션쇼 등 다종다양한 몰입형 경험 전시와 쇼를 만들었다. 부동산 개발업자, 엔터테인먼트 기업 운영자, 공공 기관과 협력해 공공 공간을 몰입형 경험의 목적지로 탈바꿈시키는 대규모 프로젝트도 다수 진행했다. 지난해에는 베로나 아레나에서 29인조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몰입형 쇼로 선보이며 클래식업계를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탄생 300주년을 기념한 〈비바 비발디Viva Vivaldi〉로, 발리치 원더 스튜디오는 비발디의 오리지널 스코어와 클래식 음악 코드에 이머시브 기술을 접목해 교향악의 세계를 혁신으로 이끌었다. 1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매진된 이 공연은 오는 8월 베로나 아레나에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 한편 발리치 원더 스튜디오는 2023년, 전 세계 21개 지역에서 130개의 레이블을 운영하는 다국적 미디어·엔터테인먼트 기업 바니제이Banijay에 인수되었다.


웹사이트 balichwonderstudi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