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단어에서 시작된 탐험,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
29CM가 디자인한 문구인의 세계
문구가 주는 즐거움을 다채롭게 풀어낸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 29CM와 프리미엄 문구 편집숍 포인트오브뷰의 운영사인 아틀리에 에크리튜가 공동 주최한 이 행사는 디자인, 공간, 경험을 통해 문구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했다.

‘문구’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와 기억은 각자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일상 속 필수품이고, 누군가에게는 취향과 창작의 매개체다.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 29CM와 프리미엄 문구 편집숍 포인트오브뷰(Point of View)의 운영사 아틀리에 에크리튜가 공동 주최한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는 바로 이 다양한 ‘문구인(文具人)’의 세계를 존중하고 탐구하는 자리였다. 2025년 4월 2일부터 4월 6일까지 코엑스 더 플라츠 홀에서 열린 행사는 첫 회인 만큼, 기획부터 디자인, 공간 구성까지 세심하고도 실험적인 접근이 더해졌다. 특히 29CM 브랜드경험디자인팀은 ‘인벤타리오(inventario)’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을 보다 자연스럽게 전달하기 위해, 언어와 비주얼, 오프라인 경험을 하나의 디자인 시스템으로 조율했다. 만년필로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듯한 로고 타입, 서류가 정리된 아카이브를 연상시키는 그리드 레이아웃, 그리고 직접 손으로 꾸미는 커스텀 파일 등이 대표적이다. 로고 타입에서부터 키 비주얼, 굿즈, 그리고 고객 경험까지, ‘문구인’을 사로잡는 디자인을 완성한 29CM 브랜드경험디자인팀을 만나 디자인 스토리를 들었다.
Interview
29CM 브랜드경험디자인팀
김세린, 김영은, 전소희

낯선 단어를 브랜드로 만드는 법
‘인벤타리오’라는 행사 이름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스페인어로 ‘물품 및 문건에 관한 기록물과 목록’이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낯선 단어인 만큼 이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공동 주최사인 아틀리에 에크리튜에서 먼저 제안해 주신 네이밍인데요. 저희도 처음에는 “이게 무슨 뜻이지?”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어요. 단어 자체가 낯설기도 하고, 보통 행사명이 좀 더 직관적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가 행사 자체를 좀 더 아이코닉하게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내부 판단이 있었고, 브랜드경험디자인팀 역시 곧 이 생소한 단어를 어떻게 ‘낯설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됐죠.
‘물품과 문건에 관한 목록’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고려했을 때, 시각적으로도 정리되고, 수집되고, 기록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는데요. 그래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바로 서류나 문서가 아카이브 된 파일 혹은 보관함 등에서 느껴지는 질서감이었고요.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리드 레이아웃’을 전체 디자인 모듈 시스템으로 설정했어요. 메인 포스터부터 키 비주얼, 굿즈에 이르기까지 행사 전반에 적용되는 시각 요소를 이 그리드 안에서 정리하고 조율해나갔습니다.



‘인벤타리오’와 마찬가지로 ‘문구인’이라는 단어도 눈길을 끌더라고요. 특히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문구는 자기표현과 창작의 도구로서 소비되는 경향이 강하잖아요. 그 중심에는 ‘문구인’들이 있을 테고요. 브랜드 경험을 위한 디자인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궁금해요.
저희에게도 ‘문구인’이라는 개념이 꽤 낯설었기 때문에 초기에 리서치를 많이 했어요. 그때 발견한 키워드가 있는데요. 바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텀꾸’텀블러 꾸미기처럼 자신의 물건을 꾸미는 문화였어요. 여기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 측면에서도 직접 꾸밀 수 있는 요소들을 최대한 반영하고자 했죠. 문구인들은 다이어리 맨 첫 장에 어떤 문장을 적을지 고심하고, 서로 좋은 문장을 추천해 준다는 사실도 알게 됐는데요. 그래서 취향의 문구(文句)를 모은 문장 노트로 파일의 첫 페이지를 채우고, 다양한 그리드 노트와 스티커로 완성하는 ‘커스텀 파일’을 기획했습니다. 특히, 29CM는 주요 타깃 소비층을 ‘2539 여성’으로 바라보고 있는데요. 저희 팀 대부분도 그 세대에 속해 있어서 “우리라면 이게 과연 재밌을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소비자 입장에서 바라보려 노력했습니다.
‘문구인’을 사로잡는 디자인

이번 행사 전반에 적용된 메인 컬러가 ‘문구인’에게는 중요한 의미라면서요?
네, 맞아요. 저희가 선정한 메인 컬러는 만년필의 블루 잉크에서 착안했는데요. ‘문구’라는 카테고리에 대해 리서치를 해보니 문구인들 사이에서는 만년필의 대표 잉크가 블루라는 인식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디자인 리서치를 해보니 만년필이 사용되던 시기부터 가장 널리 사용된 잉크가 블루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문구를 상징하는 색으로서 의미와 감성, 실용성 모든 측면에서 잘 부합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후 다양한 블루 계열의 컬러를 두고 테스트를 여러 번 진행했는데요. 이번 행사가 주로 SNS 등 온라인 채널에서 확산될 걸 고려해 디지털 화면 상에서 잘 드러나고, 기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PANTONE 299C’로 정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29CM 이름과 운율도 잘 맞더라고요. (웃음)


로고 타입 디자인에도 공을 많이 들이셨다고요. 만년필로 적은 글씨의 느낌에서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디자인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도 궁금합니다.
로고 타입 또한 ‘인벤타리오’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무드에서 출발했는데요. 쌓여 있는 서류 위에 누군가 만년필로 정갈하게 기록한 듯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싶었어요. 그리드 노트처럼 칸칸이 정리된 형태부터, 가위나 자, 컴퍼스 같은 문구 도구의 기하학적인 형태까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테스트했습니다. 무엇보다 인벤타리오라는 이름이 생소한 만큼, 글자 자체가 명확하게 읽히는 것이 가장 중요했는데요. 복잡한 요소들은 덜어내고, 직선의 획은 단단하게, 획과 획이 연결되는 부분은 마치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매끄럽게 다듬어, 처음 보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였습니다.
메인 포스터는 디테일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더군요. 가위, 스탬프, 붓, 컴퍼스, 집게 등 그리드 바탕 위에 표현된 그래픽 요소들이 눈길을 끌던데, 이 도구들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포스터에 등장하는 문구 도구는 이번 행사를 위해 기획한 ‘문구인 테스트’와도 맞닿아 있는데요. 29CM가 큐레이션 한 29가지 문구 상품을 만날 수 있는 29CM 브랜드관에 가면 QR코드를 통해 문구인 테스트를 경험할 수 있어요. 영감을 주고받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 몰두하는 사람, 수집하는 사람, 창작하는 사람까지 다섯 가지 문구인 페르소나를 설정했고, 각 페르소나를 상징하는 도구들을 포스터에 배치했습니다.

초기에는 페르소나와 도구를 일대일로 연결하려는 시도도 있었는데요. 작업을 진행하면서 기계적으로 매칭 하기보다는, 디자인적으로 시각적인 재미가 있는 도구들을 고려해 선정하는 방향으로 정리하게 됐습니다. 가위나 컴퍼스처럼 둥글고 직선적인 형태를 가진 도구들은 포스터 내에서 시각적인 포인트가 되거든요.

한편, 문구인 테스트를 통해서는 관람객이 부담 없이 자신의 취향을 탐색할 수 있는데요. ‘Guide to better choice(더 나은 선택을 위한 가이드)’라는 29CM의 브랜드 미션과 감도 높은 취향 셀렉트숍이라는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해요. 막연하게 ‘당신의 취향을 찾아보세요’라고 던지기보다는, 그간 29CM에 쌓인 문구인들의 리뷰와 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제안할 때 몰입도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무엇보다 테스트를 통해 발견한 ‘나의 취향’을 오프라인 공간에서 직접 경험하고, 실제 물건을 29CM 앱에서 편리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이러한 구매 경험이 자연스러운 과정이 될 수 있도록 브랜드관을 구성하고자 했고요. 각 페르소나에 맞는 상품을 29가지씩 큐레이션 했고, QR코드 스캔을 통해 연결된 페이지에서 제품을 찾아보는 재미를 더해 색다른 구매 경험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포스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실제로 물감을 칠하거나 선을 긋는 수작업의 흔적도 보이던데요. 디지털 환경에서 주로 사용되는 시각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작업 방식을 고수한 이유도 있을까요?
맞아요. 포스터나 키 비주얼 속에서 실제로 붓으로 물감을 칠하거나, 만년필로 선을 그어 수작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질감을 남겼는데요. 디지털 환경에서는 깔끔하고 정제된 이미지들이 주로 사용되지만, 문구인이라는 타깃 자체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저희도 디지털로 완성하기 전에 아날로그 감성을 더해줄 수 있는 실제 손의 터치감을 넣고 싶었어요.


브랜드경험디자인팀이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건 작년 8월부터였는데요. 약 9개월간 작업을 준비하면서 수많은 테스트와 수정을 거쳤습니다. 물감을 직접 섞어 원하는 농도를 찾고, 포스터와 비주얼 속 모든 요소가 그리드에 맞춰 정렬될 수 있도록 손으로 하나하나 그리면서 완성도를 높였죠.


앞서 짧게 언급했지만, 특히 그리드 시스템이 핵심이었습니다. 모든 비주얼 작업을 시작할 때 실제 그리드 노트를 모듈처럼 짜두고, 그 안에서 포스터와 키 비주얼, 심지어 굿즈까지 맞춰 디자인했거든요. 그래서 포스터를 확대해서 보면 각 선들이 하나도 뒤틀리지 않고 전부 맞춰져 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죠. 현장에서는 관람객들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부분일 수 있겠지만, 이러한 디테일이 쌓여야 전체적인 행사의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덕분에 “29CM가 하면 역시 다르다”, “페어를 만들어도 29CM만의 차별점이 있구나”와 같은 평가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만약 저희 문구 페어를 다녀오시고 이런 느낌을 받으셨다면, 브랜드경험디자인팀이 의도한 바가 어느 정도 전달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율의 미학, 협업을 디자인하다

이번 프로젝트가 약 9개월간 이어진 긴 호흡의 작업이었다고 하셨어요. 긴 시간 동안 브랜드경험디자인팀 내에서 의견을 모으고 조율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초반에는 방향성을 두고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는데요. 팀원들이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의견을 내고, 직접 실험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계속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게 생각한 대로 바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요.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했던 것도 막상 수정해서 다시 테스트해 보면 오히려 더 잘 맞는 경우들 많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아이디어를 머릿속으로만 두지 않고, 실제로 다양하게 시도하고 결과물을 보면서 또 의견을 주고받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디자인 방향을 정리해 갔습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는 제작물이 워낙 많았어요. 파일 속지 40종, 그리드 노트가 25종, 단어 스티커가 40종, 그래픽 스티커 12종까지, 수십 가지를 디자인하고 관리해야 했거든요. 하나하나 컨트롤하는 게 복잡하고 까다로웠지만, 최종 결과물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웃음)


특히 이번 행사는 공동 주최사부터 협찬사, 그리고 69개의 참가 브랜드까지 다양한 협업자들과 함께했잖아요. 29CM만의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번 프로젝트가 내부적으로만 복잡했던 게 아니라, 외부 협업도 굉장히 많았어요. 공동 주최사인 아틀리에 에크리튜를 비롯해 협찬사 두성종이, 그리고 69개의 참가 브랜드까지 정말 다양한 파트너들과 함께했죠. 디자인 관련해서는 저희 브랜드경험디자인팀이 전체를 주도했습니다. 키 비주얼부터 웹/앱 관련 페이지 디자인, SNS 관련 디자인, 오프라인 굿즈 디자인 모두 저희 팀에서 맡았어요. 내부 공간 디자인 조직과 협업해 행사장 내의 사이니지 연출물도 함께 디자인했고요. 물론, 공동 주최사와도 디자인 작업물을 공유하며 결을 맞춰가는 과정도 거쳤습니다. 예를 들어 메인 컬러 톤을 정할 때도 그랬어요. 포인트오브뷰에서는 잉크색처럼 더 진한 블루를 원하셨고, 저희는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잘 어울릴 수 있는 블루 톤을 고민했죠. 그래서 진한 버전, 산뜻한 버전 등 다양한 톤을 테스트하면서, 온라인 확장성까지 고려해 최적의 절충점을 찾았습니다.

협찬사였던 두성종이와의 협업도 저희에게는 중요한 포인트였는데요. 문구 페어인 만큼 최대한 종이와 나무만을 이용해 전시 집기를 디자인했거든요. 저희가 원하는 종이 질감을 먼저 제안하고, 두성종이에서 역으로 더 적합한 종이를 추천해 주시는 방식으로 의견을 주고받았어요. 그래서 실제로 리플릿, 시딩 키트, 파일 속지 등에서 사용하는 종이가 모두 달라요. 물성 자체에서도 다양성을 줄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파트너들과 함께 작업하면서도 ’29CM다움’을 유지하는 게 정말 중요했는데요. 29CM다운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공간디자인, 크리에이티브, 커머스 전략 각 조직의 담당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많은 의견을 나누며 이번 행사를 완성했습니다. 브랜드경험디자인은 그래픽 디자인을 주로 담당하고, 공간디자인팀은 브랜드관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공간에서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공간 기획을 담당해 주셨고, 크리에이티브 조직은 문장부터 영상, 기획 등 여러 방면으로 인벤타리오가 가진 메시지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힘써 주셨습니다. 모든 요소가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게 운영 측면에서 커머스 기획 조직도 힘써주셨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인벤타리오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극대화하기 위해 각 조직이 자신의 영역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서로의 기획을 보완하며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 자체가 바로 29CM다운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관람객이 꼭 발견해 주었으면 했던 디테일이 있다면요?
이번 인벤타리오 문구 페어는 어느 한 부분만 보고 가시기보다, 공간 곳곳에 숨겨진 작은 디테일까지 즐겨주시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관람객들이 다섯 가지 문구인 페르소나에 따라 스티커를 붙이고, 종이에 메모를 남기면서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하는 경험이 바로 그렇죠. 특히 29CM 브랜드관 뒤편에 설치된 다양한 컬러의 종이들은 파스텔 옐로, 그린, 블루, 핑크 등 서류철에서 영감을 받은 색상들인데요.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고르며 자기 취향을 기록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준비했어요. 관람객 각자가 발견한 ‘나만의 취향’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시간이 되었다면, 저희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충분히 닿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