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파는 디자이너의 영화관, 무비랜드
브랜드 디자인 전문 회사 '모빌스그룹'이 지난 2월 서울 성수동에 영화관 '무비랜드'를 오픈했다. 아메리칸 빈티지 무드의 고도화와 독특한 운영 방식이 돋보인다.
넷플릭스를 ‘창조적 파괴’의 전형이라며 추켜세우던 때가 있었다. 확실히 OTT 서비스는 영상 콘텐츠의 소비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도 있다. 콘텐츠를 보는 방식이 개인화·파편화되면서 집단적 감상의 경험마저 파괴된 것이다.
현학적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기존 영화관은 팬데믹까지 겹치며 총체적인 경영 위기에 봉착했다. 국내에서는 극장 관람객 수가 2019년 2억 2000만 명에서 2023년 1억 200만 명으로 하락했으며, 아직까지 코로나19 이전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관을 오픈한다는 것은 순진하고 위험한 발상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모빌스그룹은 그 위태로운 길을 택했다. 지난 2월 성수동에 문을 연 ‘무비랜드’ 이야기다.
‘아메리칸 빈티지’ 무드의 브랜드 ‘모베러웍스’와 유튜브 채널 ‘모티비MoTV’를 통해 견고한 팬덤을 구축한 모빌스그룹은 공간의 브랜딩·기획·운영 등을 총괄했다. 디자인 전문 회사가 카페나 서점, 매장을 운영하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영화관의 경우는 무비랜드가 국내에서 처음이다. OTT 전성시대에 과감히 영화관으로 출사표를 던진 이유는 이 오프라인 플랫폼이 자사의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최적의 공간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모빌스그룹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모춘은 “모빌스그룹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디자인 회사이고, 모베러웍스는 메시지를 파는 브랜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영화관이 이야기를 파는 오프라인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약 2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모습을 드러낸 무비랜드는 일반적인 영화관의 모습과 한 끗이 달랐다.
취향과 경험을 공유하는 영화관
무비랜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최신 개봉작이 아닌 옛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이다. 첫 달에는 모춘이 직접 큐레이션한 〈대부 1, 2〉 〈대취협〉 〈빽 투 더 퓨쳐 1, 2〉 〈개들의 섬〉을 상영했다. 견고한 배급망을 뚫지 못해 선택한 우회 전략 같지만, 그렇지 않다. 큐레이션한 옛 걸작들은 무비랜드가 취향과 경험을 공유하는 영화관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관객이 먼지 쌓인 창고에서 보물을 찾듯 옛 작품에서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모빌스그룹의 매니징 디렉터 소호의 말이다. 즉 ‘다시 보기’를 통한 경험의 재설계가 이뤄진다는 뜻이다. 콘텐츠뿐 아니라 공간 구성에서도 은연중에 이를 부각했다.
라운지가 대표적이다. 총 3층 규모의 영화관에서 2층 전체를 라운지로 구성해 영화 감상 전에 콘텐츠의 경험을 나누며 이를 증폭시키는 기능을 부여했다. 티켓 발권과 식음료 판매 공간, 기념품 숍을 겸하는 1층에서도 이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모베러웍스는 관객을 헤비 스포일러(heavy spoiler), 스낵 킬러(snack killer), 트래시 컬렉터(trash collector) 세 종류의 페르소나로 나눈 뒤 각자에 맞춰 위트 있는 아메리칸 빈티지 무드의 그래픽 모티브를 개발했는데 기념품 숍에서는 실크스크린으로 이 그래픽을 티셔츠에 직접 프린트해 구매할 수 있게 했다. 영화관을 나선 뒤에도 경험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무비랜드는 전반적으로 모베러웍스 특유의 재기발랄함을 닮았지만 전부 캐주얼한 무드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3층 상영관은 장식을 최대한 배제해 온전히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수작업으로 완성한 오리지널리티
다양한 창작자들과 협업해 공간 곳곳에 각인된 아날로그 감성은 무비랜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특히 모베러웍스가 줄곧 앞세웠던 아이코닉한 시각 모티브를 그대로 활용하되 수제작 등을 더해 좀 더 묵직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소호는 “캐주얼하고 화려한 모베러웍스 스타일을 그대로 이어갔다면 방문객들이 한두 번은 즐기겠지만 금세 질려버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브랜드의 무드는 차분하게 가라앉히되, 모빌스그룹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할 창작자들을 섭외했다”고 밝혔다.
모춘 역시 “작가들의 손때가 묻은 친근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목수, 공예 작가, 주물 공방 등과 협업해 시설물과 작품을 제작했다. 예를 들어 관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간판은 주물 공방에서 작업한 것으로,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손으로 다듬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무비랜드의 BI를 표현한 손잡이도 인상적이다. 모베러웍스의 캐릭터 ‘모조’를 필름 모양과 결합한 형태인데, 모빌스그룹 디자이너들이 펜과 마커로 손수 그린 초안에 목수들의 정교한 손길이 더해져 완성되었다.
도자기를 비롯한 세라믹 작업도 흥미롭다. 2층 라운지 벽면 일부를 장식한 세라믹 월은 세라믹 브랜드 ‘나이트프루티’가 참여해 영화의 결말을 주위에 소문내는 ‘헤비 스포일러’를 표현했다. 도자공예가 ‘마라가람’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재해석한 도자 작품들을 선보이며 영화에 대한 애정과 남다른 개성을 드러냈다.
차별화된 운영 방식
제아무리 아름답게 디자인한 영화관이라도 기성 영화관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결국 답보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를 타개하는 방식으로 무비랜드가 선택한 전략은 큐레이션이다. 이곳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모빌스그룹이 선정한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 큐레이터가 고른 영화를 상영한다. 앞으로 라운지에서는 큐레이터들과 선정한 영화를 비롯해 이들의 철학과 취향 등을 듣는 토크 행사도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상영 전 영상 광고, 외벽 광고판, 컬래버레이션 등을 통해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며 무비랜드에 최적화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 중이다. 일례로 왓챠와는 3월부터 매달 셋째 주 수요일마다 무료로 영화를 상영하는 캠페인 ‘왓챠 파티 at 무비랜드’를 1년간 진행한다. 팟캐스트 ‘무비랜드 라디오’와 모티비를 통해서는 극장 기획과 운영, 브랜드 협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요즘 영화관이 사양 산업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물성은 여전히 유효하며 OTT 시대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멀티플렉스와 독립·예술영화관 사이에서 무비랜드만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공간 안팎에 창작자들이 직접 만든 작업물을 비치했다. 최신 영화 대신 오래된 명작을 상영한다는 점도 이곳만의 특징이다. 뛰어난 상영 환경을 갖춘 대규모 영화관들이 발 빠르게 최신 영화를 선보이는 상황에서 차별화를 위해서는 무비랜드만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소호 모빌스그룹 매니징 디렉터
“무비랜드의 영화 관람료는 2만원으로 책정했다. 이곳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최소 비용으로 산정한 결과다. 일반 영화관에 비해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영화와 공간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의 방문 후기 중에는 ‘평소 영화관에서 볼 수 없었던 오래된 영화를 다시 관람하니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경험한 것 같았다’는 평이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이 공간을 얼마나 오래 운영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먼 훗날 사람들이 무비랜드를 떠올릴 때 이상하지만 독창적인 시도가 이루어진 공간으로 기억했으면 한다.”
모춘 모빌스그룹 크리에이티브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