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밀라노 살로네 델 모빌레

세계 최대의 디자인 축제,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막을 내렸다. 최근 들어 장외 전시인 푸오리 살로네에 오히려 더 관심이 쏠리는 추세이지만 로 피에라Rho Fiera에서 열리는 살로네 델 모빌레가 행사의 본진이자 뿌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행사 기간 동안 로 피에라는 올해도 어김없이 거대한 디자인 실험실로 탈바꿈했다. 이미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로네 델 모빌레를 거쳐 갔지만 이곳의 지형도를 제대로 읽으려면 한 번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치열한 디자인 격전지에서 포착한 명장면을 톺아봤다.

2025 밀라노 살로네 델 모빌레
01 Communication Campaign 2025 Thought for Humans Salone del Mobile 2025
빌 더긴이 디자인한 2025 살로네 델 모빌레의 커뮤니케이션 캠페인.

전례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도 살로네 델 모빌레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전 세계 37개국에서 온 관람객이 디자인 발신지로 속속 모여들었다. 올해 살로네 델 모빌레의 캠페인 슬로건은 ‘인간을 위한 생각(Thoughts for Human)’.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근원으로 돌아간 주제였다. 캠페인 디자인을 맡은 미국의 사진작가 빌 더긴Bill Durgin은 나무, 금속, 패브릭, 플라스틱이 사람의 피부와 맞닿은 장면을 확대 포착했다. 신체와 가구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어우러진 모습을 통해 조화와 연결, 지속 가능성의 메시지를 가시화한 것이다. 매해 장내 전시의 주무대가 되는 로피에라 파빌리온에서도 이 주제를 고민한 흔적이 엿보였다. 자연을 닮은 따뜻한 컬러와 소재의 활용이 두드러졌고 몸의 움직임이나 자세를 고려한 인체 공학적 제품이 다수 등장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지속 가능성은 여전한 화두였다. 환경 오염과 소비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하는 목소리를 전시장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주최 측의 노력도 돋보였다. 친환경 전시 부스 설치를 장려하는 ‘그린 가이드라인’ 기준을 작년보다 한층 강화하며 기후 재앙 시대의 전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개인과 공동체가 손잡고 올바른 미래를 선택해나가는 것, 그것이 인간을 위한 생각이다. 그것이 올해 살로네 델 모빌레가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전하고자 한 메시지다.” 살로네 델 모빌레 디렉터 마리아 포로Maria Porro의 말이다. 범람하는 디자인의 각축장에서 목도할 수 있었던 건 한시적인 시류와 휘발되는 유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올해의 살로네 델 모빌레는 근본의 가치를 돌아보며 보다 먼 곳을 비추었다.

* 월간 〈디자인〉은 2025년 7월호 기획 기사에서 푸오리 살로네를 깊이 있게 다룰 예정이다.


1. 파빌리온을 밝힌 빛의 스펙트럼, 유로루체

인간을 위한 생각이 생각으로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2년 만에 돌아온 조명 박람회, 유로루체Euroluce에서는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혁신적인 실험의 장이 펼쳐졌다. 많은 기업이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광원 기술과 친환경 소재를 앞다투어 선보이며 지속 가능한 미래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조명 브랜드 아르테미데는 자국의 디자인 전통과 첨단 기술이 균형을 이루는 작품을 선보이며 관람객의 발걸음을 멈추게했고,소재와 물성에 대한 실험적 태도를 보여준 플로스의 전시장은 늘 그렇듯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편 주목할 만한 변화도 있었다. 바로 올해 처음 막을 올린 유로루체 국제 조명 포럼(The Euroluce International Lighting Forum)이다. 유로루체 국제 조명 포럼은 유로루체가 단순한 상업 박람회를 넘어 조명 디자인을 둘러싼 다학제적 연구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공통의 인식에서 출발했다. 첫 번째 포럼 주제는 ‘삶을 위한 빛, 공간을 위한 조명’. 빛과 조명의 사회·문화적 의미와 환경적 역할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이틀간 이어졌다. 포럼이 열린 공간은 일본인 건축가 후지모토 소우가 설계했다. 파빌리온 내에 천연 소나무 기둥을 수직으로 세워 작은 이동식 원형 극장을 만들었는데, 작은 숲처럼 꾸며진 공간이 유기적이고 변화무쌍한 공공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은유했다. 올해의 유로루체는 조명과 빛에 관한 확장된 담론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내후년에 돌아올 유로루체를 기대해봐도 좋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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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장에서 공개한 플로스의 새로운 컬렉션 ’Maap’. ©Diego Rav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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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루체 국제 조명 포럼에서 발표 중인 식물학자 스테파노 만쿠소Stefano Mancuso. ©Saverio Lombardi Vallauri

2. 박람회에 깃든 예술의 숨결

살로네 델 모빌레가 브랜드의 비즈니스 각축전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살로네의 시선은 그보다 먼 곳을 향해 있다. 올해는 세계적인 거장과 손잡고 박람회장 안팎에서 예술적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4개의 전시를 기획했다.

에스 데블린의 빛의 도서관

무대 디자이너 에스 데블린Es Devlin의 설치 작품 ‘빛의 도서관(Library of Light)’은 살로네 델 모빌레를 넘어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통틀어 최대 화제작이었다. 유서 깊은 브레라 미술관 안뜰에 설치한 이 거대한 회전 조형물은 도서관인 동시에 하나의 거대한 책장이다. 작가는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코 에코의 책 속 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책은 마음의 나침반이다. 아직 탐험되지 않은 수많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한다.” 낮에는 책꽂이의 거울이 반사하는 햇빛이, 밤이면 발광 다이오드의 불빛이 황홀경을 선사했다. 유로루체의 빛이 박람회장 외연으로 물 흐르듯 확장된 셈이다. 도서관을 에워싼 몰입의 경험은 매일 밤 8시가 되면 절정에 이르렀다. 영화배우 베네틱트 컴버배치의 녹음된 목소리가 책을 낭독했고, 에스 데블린의 음성과 함께 울려 퍼진 바이올린 선율은 듣는 이를 숨죽이게 했다. 도서관이 스스로 낭독하는 소리는 작품을 가로지르는 LED 디스플레이 위의 텍스트로 변환되어 나타났다. 관람객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과 글 속에 담긴 의미를 곱씹으며 휴식과 사색의 시간을 보냈다. 에스 데블린의 도서관은 2주 동안만 존속했지만 작품의 의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전시 기간 동안 관람객이 기증한 책이 도시의 공공 도서관으로 편입되어 무한한 여정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미술과 문학의 생동하는 힘을 보여준 에스 데블린은 밀라노에 잊지 못할 선물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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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라 미술관 안뜰에 설치한 ‘빛의 도서관’. ©Monica Spezia
파올로 소렌티노의 달콤한 기다림

올해 살로네 델 모빌레의 주역으로 손꼽히는 의외의 인물이 있다. 바로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장 파올로 소렌티노Paolo Sorrentino다. 그가 로 피에라에서 선보인 설치작 ‘달콤한 기다림(La Dolce Attesa)’은 ‘기다림’이라는 보편적인 경험을 유려한 공간 내러티브로 재해석해 호평을 받았다. 파올로 소렌티노는 영화적 서사를 공간에 적용해 관람객이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체험형 전시를 구성했다. 전시의 주무대로 설정한 곳은 병원 대기실이다. 무력하게 앉아 의사의 소견을 기다리는 순간, 인간의 감정과 생각이 어떻게 요동치는지를 실험했다. “기다림은 고통이다. 하지만 달콤한 기다림은 일종의 여행이다. 사람을 어지럽히고, 최면에 빠뜨린다.” 감독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동안 진정한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한다고 설명했다. 무심결에 지나치는 소소한 것들을 발견하며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의 고조를 이끌어내는 전시 공간은 무대 디자이너 마르게리타 팔리Margherita Palli의 손에서 탄생했다. 작품의 일부가 되어 공간 곳곳에서 자리를 지킨 피콜로 극장의 배우들도 전시의 몰입감을 극대화하는 데 일조했다. 영화적 문법으로 완성한 파올로 소렌티노의 작품은 물성 없는 감각과 경험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는 디자인의 실시간 지형도를 가늠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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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기다림’. ©Monica Spezia
피에르이브 로숑의빌라 헤리티지Villa Héritage

로 피에라에도 아름다움이 깃들었다. 럭셔리 호스피탈리티 디자인의 거장으로 불리는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이브 로숑Pierre-Yves Rochon은 박람회장 안에 궁전을 방불케 하는 전시장을 마련했다. 그는 럭셔리를 재정의하기 위한 도구로 헤리티지를 꺼내 들었다. 전통에만 천착한 것은 아니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언어로서 헤리티지를 조명하고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진일보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고자 했다. 19세기의 웅장한 유리 온실, 영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까지.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 울림을 남기는 걸작에서 영감을 받아 한 편의 서사시처럼 느껴지는 극적인 공간을 선보였다. 전시는 빌라 입구에서 시작해 응접실, 침실, 정원, 음악실 등으로 이어졌다. 방마다 다르게 부여한 메인 컬러는 공간을 옮길 때마다 분위기를 환기하는 요소다. 관람객의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무른 공간은 응접실이었다. 오페라와 디자인의 교집합을 탐구한 이 공간은 연극적인 시노그래피로 가득했다. 드라마틱한 붉은 커튼을 지나 방에 들어서자 오페라 〈라 트리비아타〉의 아이코닉한 무대 의상이 나타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반면 전시장 중심부에 위치한 음악실은 숨 고르기를 위한 공간이었다. 천장의 전통적인 돔 구조가 장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따뜻한 갈색 컬러가 벽을 타고 흘러내리듯 퍼지며 사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피에르이브 로숑은 전통과 현대, 예술과 디자인을 한 그릇에 담아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풀기 위해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익숙함을 뛰어넘는 능숙함으로 모두의 기대를 보란 듯이 넘어섰다.

로버트 윌슨의 마더

실험 연극계의 거장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은 스포르체스코성 안에 있는 론다니니 피에타 박물관에 둥지를 틀었다. 그가 이곳에서 선보인 ‘마더Mother’는 살로네 델 모빌레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개방한 작품이다. 박람회장 바깥에서 누구나 관람할 수 있도록 해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밀라노 아트 위크와의 조화로운 접점을 마련한 것이다. 로버트 윌슨은 ‘최후의 만찬’과 더불어 밀라노에서 가장 상징적인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는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를 위한 헌정작을 공개했다. ‘론다니니 피에타’는 88세의 미켈란젤로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작업한 작품이다. 다리와 팔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윤곽만 드러나 있어 이른바 ‘미완성 피에타’로 불린다. 로버트 윌슨은 이 피에타상을 공간 가운데에 두고 빛과 그림자의 시퀀스를 설계한 뒤 관람객을 그 안으로 초대했다. 30분 길이로 구성된 이 몰입형 작품은 음악과 영상, 빛의 3요소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람객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앉아 빛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 동안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성가가 성스럽고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조각상 위로 서서히 빛이 드리우며 조금씩 모습이 바뀌는데, 그림자의 각도에 따라 마리아가 예수를 보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예수가 마리아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론다니니 피에타’는 무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간, 호흡, 침묵만 존재하는 공간에서 관람객이 내면의 침잠을 경험하기를 바랐다.” 빛의 마술사 로버트 윌슨은 빛과 어둠이라는 무형의 요소만으로 관람객의 감각을 온전히 지배하며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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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윌슨의 ‘마더’. ©Lucie Jansch

3. 미래를 견인하는 젊은 감각, 살로네 사텔리테

큐레이터 마르바 그리핀Marva Griffin이 1998년에 포문을 연 살로네 사텔리테Salone Satelite는 35세 미만의 신진 디자이너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다. 젊은 활기와 실험 정신이 꽃피는 이곳은 세계 무대를 겨냥하는 신예 디자이너들의 등용문이다. 해마다 작품을 엄선해 수상하며 원석 같은 영 디자이너들을 발굴한다. 올해의 주제는 ‘새로운 장인 정신: 새로운 세계(New Craftsmanship: A New World)’. 소재와 형태, 공정 과정을 대상으로 한 각양각색의 실험을 만나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 창작자들의 성찰적 태도가 돋보였다. 영예로운 1등상을 거머쥔 건 일본 디자이너 나가사와 가즈키의 ‘웃수와-주히Utsuwa- Juhi’ 시리즈다. 일본의 전통 공예를 재해석한 화병과 수납 용기 시리즈로, 주재료인 나무껍질을 전통 염색 기법으로 가공하는 친환경적 제작법을 보여줬다. 자연 소재를 활용하는 동시에 장인 정신과 지역 문화를 보존하려는 시도가 높은 점수를 받았다. 2위는 네덜란드 작가 루이스 마리에Luis Marie의 ‘Plissade’가 선정되었다. 접착제 없이 천만으로 세우는 칸막이로, 전통적인 주름 잡기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텍스타일 오브제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밖에 현장에선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의 단체전과 심주용, 왕은지 등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 출신의 작품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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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네 사텔리테 전시. ©Ludovica Mangini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3호(2025.05)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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