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과 건축이 만나는 곳에서, 홍기웅

묵직한 건축물과 화려한 공간, 선명한 그래픽···. 사진가 홍기웅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풍경이다. 피사체가 다를지라도 그의 작업에는 일관되게 느껴지는 질서와 심상이 있다. 점과 선, 면을 가로지르며 포착한 풍경 속에서 마침내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CFC 소속 사진가이자 건축 공간을 찍는 홍기웅의 시선을 따라가봤다.

그래픽과 건축이 만나는 곳에서, 홍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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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장소와 홍기웅 작가의 사진을 살펴봤을 때 농구장 라인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물과 배경 사이에 적절한 긴장감을 주기 위해 50mm 정도의 표준 화각을 사용했고, 사람 키보다 약간 높은 시선으로 촬영했다.” _노경

기종 Canon EOS 5D Mark II
장소 이촌한강공원 농구장

패션 사진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도시와 건축 공간을 촬영한다. 그 시작이 언제였나?

사진과에서 패션 사진과 순수 사진을 전공했다. 학교 다닐 때 포트레이트 촬영을 주로 했는데 주변 친구들을 찍는 경우가 많아 그때는 사람을 대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잘 몰랐다. 졸업 후 패션 광고와 영화 포스터를 찍는 스튜디오에 입사하고 나서야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포트레이트 촬영을 하면 어느 순간 인물을 압도해야 하는데 그게 성격상 쉽지 않았다. 여러모로 고민이 많던 시기에 도시 풍경과 건축 사진으로 관심을 돌렸다. 업과는 별개로 도시를 주제로 ‘그리드 스케이프’ 작업을 진행한 것이 시작이었다. 실재하는 그리드 형태의 건축물을 검은 배경에 재배치해 도시의 공간 구조에 질문하는 작업이었다. 그 무렵 대학원에 진학해 풍경과 도시 사진에 집중했고, 우연히 디자이너와의 접점도 생기면서 이 길로 들어서게 됐다.

초기부터 꾸준히 작업을 의뢰해온 클라이언트가 있다고 들었다.

더퍼스트펭귄과 10여 년째 파트너로 함께하고 있다. 이 팀과의 작업을 계기로 방향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번은 지인이 운영하는 브랜드의 제품을 촬영했는데, 해당 브랜드를 클라이언트로 둔 더퍼스트펭귄이 그 사진을 보고 다른 프로젝트의 작업을 의뢰했다. 홍대 인근에 문을 연 의류 브랜드 오아이오아이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촬영하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만한 규모가 아니었는데 서너 번을 가서 사진을 찍었다.(웃음) 처음이다 보니 아쉬운 것도 많고 클라이언트를 알아가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더퍼스트펭귄이 작업한 다양한 공간을 기록하며 협업을 이어오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가 깊어지듯 일도 그렇다. 긴 시간을 두고 서로 호흡을 맞추다 보니 작업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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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교촌한옥마을의 고택 사이에 자리한 카페, 이스트 1779 내부. 도시 맥락과 어우러지는 붉은 벽돌을 활용했다.
건축 공간을 촬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건축가나 디자이너의 의도와 해석에 충실히 따르려고 한다. 도면이나 스케치 등의 자료를 살피고 촬영 전에 디자이너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며 준비한다. 때로 그들이 스마트폰으로 먼저 촬영한 사진을 보고 원하는 분위기를 파악하기도 한다. 공사 과정에서 기록한 사진에도 흥미로운 정보가 많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방향과 흐름, 가구가 들어오기 전의 구조와 인상 등 촬영 당일에는 단번에 파악할 수 없는 맥락이 숨어 있다. 사진가마다 작업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보다 오래 공간과 관계 맺어온 이들의 시선을 존중하려고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사진가 고유의 해석은 필요하다.

빛과 분위기를 절묘하게 포착한다.

글이나 시에 은유적 표현이 있는 것처럼 사진도 마찬가지다. 빛에 따라 분위기와 감정, 형태와 질감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건물이나 도시, 자연 풍경에 빛이 맺힐 때 우리가 알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오래 머무르기 위해 장면을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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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하우스 오브 아크네 페이퍼〉 발간을 기념해 아크네 스튜디오 청담에서 개최한 전시. 건축물의 구조와 그래픽을 한 프레임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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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네 스튜디오 청담 내부.
작업 전반에서 톤이 어둡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의도가 있나?

사진을 좀 더 오래 들여다보게 하기 위해서다. 한눈에 읽히는 사진보다 두고두고 곱씹게 만드는 사진을 좋아한다. 처음에는 그 형태가 잘 드러나지 않더라도 천천히 파고들다 보면 보인다. 그렇게 피사체의 여러 면을 음미하길 바랐다. 건축 공간이라는 대상 자체가 워낙 복합적인 면도 있다. 건물의 골격, 재료의 질감, 오브제의 형태 등 다양한 레이어를 비추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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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라이터스가 리뉴얼한 리움뮤지엄 아트숍. 전통 건축의 목재 짜임과 격자 형태의 구조를 포착했다.
CFC 소속 사진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사진가로서 두 가지 정체성을 지닌 셈이다.

브랜드 디자인 스튜디오 CFC에서 포트폴리오 촬영을 담당한다. 디자이너의 작업물을 기록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다루는 대상에 차이가 있다. 브랜딩 범위에 따라 명함, 패키지, 제품, 사이니지, 공간 등 다양한 대상을 담는다. 합류하기 전부터 공간 사진을 찍었던 터라 그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 고심했는데 전채리 대표가 제품을 건물이라 생각하고 찍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천천히 호흡을 맞춰간 결과 이제는 CFC의 시각 아이덴티티를 함께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CFC에서의 활동이 사진가로서의 경험을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동료 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관점을 달리하기도 한다. 디자인과 사진 모두 창작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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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C가 개발한 29CM 성수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적용한 작업. 센티미터를 연상시키는 선을 시각 언어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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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C의 티빙 리브랜딩 패키지 디자인. 굵고 생동감 넘치는 로고 타이프를 표현했다. 제품을 건물처럼 구조적으로 포착한 지점이 돋보인다.
도시 풍경을 기록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지난 4월에는 동료 작가인 최용준, 조재무와 도시를 테마로 한 전시 〈스틸니스〉를 열기도 했다. 도시는 홍기웅에게 어떤 의미인가?

도시에서 태어나 살며 크고 작은 변화를 목도했다. 그 변화를 기록하는 일이 도시를 살아가는 내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가령 ‘룰Rule’ 시리즈는 경기장 안에 있는 색상과 라인에서 감지되는 공간의 규칙과 조형성을 탐구한 작업이다. 스포츠 경기를 좋아해 경기장을 자주 찾았는데, 문득 스포츠의 규칙과 공간의 형태가 교차하는 지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렇게 찍고 보니 점·선·면이라는 그래픽 요소와 도시 공간이 묘하게 엮인 작업이 탄생했다. CFC의 자체 프로젝트로 ‘룰’ 시리즈에서 영감받은 점·선·면 그래픽을 엮은 하나의 편집물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웃음) 그 밖에도 한강의 변화를 기록한 ‘한강 뉴 컬러’,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풍경을 담은 ‘언컴포즈드 컴포지션Uncomposed Composition’, 도시 시리즈 등 개인 작업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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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Hour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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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Hours 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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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내 색상과 라인에서 감지되는 공간의 규칙과 조형성을 탐구한 ‘룰’ 시리즈.
궁극적으로 어떤 사진을 하고 싶나?

클라이언트 일과 개인 작업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일의 속성은 다르지만 도시에 대한 관심이 건축 공간 사진으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촬영지 안팎에서 맞닥뜨리는 장소나 풍경이 작업의 소재가 될 때도 있다. 그렇게 그저 필요한 순간에 카메라를 들 뿐이다. 이 일을 하면서 목표가 있다면 누가 봐도 홍기웅이 촬영한 사진인 줄 아는 작업을 계속하는 거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3호(2025.05)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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